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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17화 (17/31)
  • 〈 17화 〉 운명처럼 피어나다

    * * *

    유빈은 머리가 좋았다. 그런 그가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고 충분한 고민을 거친 뒤에 '가능하다'라고 말 했다면 그것은 정말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조금의 자신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얻은 몇가지 성취는 주변 상황에 맞춰가다보니 얻은 것에 불과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그다.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중에 할 수 있는 것이 껴 있을 수는 있었다. 반면 가능하다고 말하면 그건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정말로 확신했다. 적어도 이 첫 대면에 한해서 유한과 김하늘이 눈을 마주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이거 바코드 입력 했으니까 가져가서 정리해. 신간도서 코너에 빈 자리 만들어 뒀거든?"

    "옙!"

    "그거 끝나면 그 옆쪽의 만화 코너에서 파손도서 찾아서 가져다줘."

    "네!"

    "다음에는 저기 컴퓨터 자료석 돌면서 게임하는 사람 있나 보고 있으면 이름이랑 반 확인해서 명단에 적어둬."

    "네!"

    눈을 마주친다고 바로 감정을 읽을 수는 없없다. 적어도 눈을 마주치고, 감정에 변화가 생길 정도의 시간은 있어야 했다.

    유빈은 그런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정말로 조금도 틈이 없을 정도로 유한을 굴렸다.

    만약 유한에게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고 있었다면 아무리 성격 좋은 유한이라도 불만을 표했을 것이다. 시아는 몰라도 하늘이라면 한 소리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빈은 유한에게 일을 시키면서 본인도 일을 했다. 쉼 없이, 끊임 없이, 신속하게!

    평소라면 적당한 수준만 하고 쉬었을 것이다. 이 쌓이고 쌓인 일들은 목요일 이전의 요일 당번들이 땡땡이를 쳤거나 게으름을 부렸기에 생긴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고작 목요일 한번 나올 뿐인 유빈이 다 해결하는 것은 옳지 못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금요일의 동아리 시간에 다 같이 해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오늘은 그 일들을 목요일로 끌어와서 해결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한이에게 시킬 일은 충분했고, 동시에 유빈이 해야 할 일도 과할 정도로 많았다.

    "이거 중앙계단 앞에 있는 잡지 서가에 꽂아줘. 훼손된게 꽤 있을텐데 그런 건 회수하고."

    "넵!"

    "아니 도대체 여배우 수영복 사진만 뜯어가는건 무슨 생각이야? 감시카메라라도 달아 둘 수 없나."

    유한이 두 개를 해결하는 사이 유빈은 세 개 이상을 해결했다. 그것은 도서관 청소, 서가 정리부터 수서, 자료 등록, 관리, 구매, 이용자 안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30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아는 하늘이에게 안긴 채 감탄했다.

    "대단해. 정말로."

    도서실 컴퓨터로 게임을 하다 걸린 명단을 1학년 교무실에 전달해 달라는 심부름을 마지막으로, 유빈은 유한을 도서관 밖으로 내보냈고, 그 순간 예비종이 쳤다.

    이제 한이는 바로 교실로 돌아가리라. 즉, 유빈은 정말로 유한이 호감을 들킬 틈을 주지 않았다.

    하늘이의 능력에 대해서는 유빈의 생각 대로였는지 지금도 유빈의 작업량에 걱정을 하고 있을 뿐 유한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거 풀어줘."

    "아, 벌써 시간이... 나 먼저 갈게!"

    "응. 이따 보자."

    자신을 풀어주고 떠나는 하늘에게 손을 흔들어 주면서도 시아는 감탄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해했다. 이래서 하기 싫어했구나.

    일을 시키는 것은 간단했다. 하지만 시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부장으로써 잘못된 행동이었다.

    밀린 업무를 본인도 같이 해야한다니. 안 그래도 피로에 찌든 그가 하기 싫다고 투덜거릴만 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번만 도와주는 거니까."

    이번 첫 만남을 잘 넘길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진우 본인은 모른다고 해도 진우와의 의리가 있으니까 유한과 하늘의 관계에 더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이 이상은 엄밀히 말하면 결국 타인에 불과한 유빈이 간섭할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 유빈의 속내를 읽은 시아는 어쩐지 익숙한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착한 녀석이다, 좋은 점도 있다. 유빈이 변명하듯이 그렇게 말하고 나면 꼭 진우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얻어 맞는다. 여기까지가 항상 잃어나는 일련의 패턴이었다.

    "불길해."

    "그런 무서운 말은 말아주라."

    "이제 곧 안 좋은 사건이 생길거야. 오늘의 일을 계기로."

    "하지 말아달라니까."

    유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문제가 더 생기는 것은 사양이었다.

    더군다나 진우와 다투면 끝 마무리가 항상 찝찝했다.

    '야, 이건...'

    '됐어. 아, 됐다니까. 내가 말을 말지. 으휴.'

    '아니, 되기는 무슨...'

    '좆 같아서 원.'

    빠직. 떠오르는 과거의 단편에 유빈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주로 서로 납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우가 대화를 거절하고, 더 이상 그 화제를 꺼낼 수 없는 식으로 끝났다.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고 불쾌감만 남기는 최악의 태도. 유빈은 그렇게 평했다.

    말을 말아? 그냥 자기가 틀린 걸 인정하기 싫은 것 뿐이겠지. 유빈은 진우가 그럴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그 밉살맞은 얼굴을 힘껏 후려쳐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순식간에 오르는 혈압에 현기증을 느낀 유빈이 머리를 짚었다. 참으로 쓰레기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시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생각한 이상으로 유빈이 진우에게 받는 스트레스는 컸다. 무엇보다 화를 내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화가 났다.

    "미안. 괜한 말을 했나봐."

    "아니야. 솔직히 나도 그럴 것 같긴 해."

    "왕창 당하고 돌아오면 위로해줄게."

    "너 솔직히 안 미안하지?"

    "미안한 건 정말이야. 기회를 놓치지 않을 뿐."

    목요일의 그 일이 있던 이후로 시아는 적극적으로 그에게 달라붙었다. 둘만 있을 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명백히 그때 했던 대화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겠다. 그런 그녀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주변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말이 많았다. 사귀는게 분명하다는 파와 아직 썸에 불과하다는 파로 갈렸지만 당사자들은 그들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상해 있는줄도 모르고 김칫국부터 마시는 멍청이도 있었다.

    "얼마 전에 말이야. 정확히는 어제."

    "응."

    "진우가 와서 너랑 사귀냐고, 사이 좋아보여서 잘 됐다고."

    "응."

    "그러면서 속 편하고 시원해졌다고 신나게 떠드는게 정말 짜증났어."

    유빈이 시아와 사귀면 하늘을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사라진다. 지금까지 몇번을 부정해도 의심하던 그가 드디어 '유빈은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이었다.

    앓던 이가 빠진 듯한, 고민이 해결된 그 표정. 그런 놈을 아직도 친구라고 챙기는 스스로에 대한 비참함으로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유빈은 굳이 진우의 착각을 부정하지 않았다. 착각이 아니게 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다시 의심받고 싶지 않았다.

    "친구란건 도대체 뭘까?"

    "난 잘 모르겠지만..."

    진우가 지금까지 유빈을 어떻게 대했는지 아는 시아가 단언했다.

    "적어도 걔는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래?"

    그렇다면 그는 지금까지 친구도 아닌 녀석을 위해 온갖 수모를 겪은 머저리일 뿐이었다.

    "난 잠깐 안쪽 확인하고 올테니까 먼저 가있어도 돼."

    "아니. 기다릴게."

    예비종이 치고 좀 지나서 아슬아슬할텐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열쇠를 집어들고 빠른 걸음으로 도서관 내부를 가로질렀다. 선생님 대신 도서관 문을 잠가야 했다.

    도서관을 한바퀴 돌며 남아있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하늘과 유한을 만나게 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을까. 거절한다고 별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유한이 유빈을 경유하지 않고 하늘이를 만났다면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끝.

    안타까운 일이지만 달리 말하면 그 뿐이었다. 거절당했다고 유한의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겠다."

    자기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든 주제에 이런 일에 끼어들어 버렸으니. 가능한 한 이번 일이 진우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시아야."

    "응?"

    "오늘 내가 한건 진우한테 비밀로 해 줘."

    "나야 걔랑 애초에 안 친하니까 상관없어. 하지만..."

    "하지만?"

    "하늘이가 말하지 않을까?"

    그렇게 싸우면서도 자주 함께 노는 두 사람이다. 오늘 유빈의 후배를 만났다는 말 정도는 쉽게 나올 수 있었다.

    "신이시여."

    "너 무교잖아."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을 찾게 되는거야."

    유빈은 진지했다. 다시 말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없다는 뜻이었다.

    "뭐, 기도한다고 뭔가 해결됐다면 지금 내가 이렇게 살고 있지도 않았겠지. 가자. 늦겠어."

    하루 하루 지날 때마다 돌아가기 싫어지는 집. 끝이 보이지 않는 공부. 분기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시험. 마음대로 안되는 결과.

    그는 머리가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예상할 수는 없었다.

    유빈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태는 그가 모르는 곳에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

    "선배님!"

    좀처럼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호칭에 하늘이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속한 문예창작동아리에도 신입생들은 들어왔지만 부장도 아닌 그녀는 하급생들과의 교류가 없다시피 했다.

    애초에 각자 원하는 형식으로 글을 쓸 뿐인 동아리에서 1, 2학년들이 함께 무언가를 하는 일은 없었다.

    즉,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넬만한 후배라고는 지금 단 한명 뿐이었다.

    저 멀리에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던 유한이 달려왔다. 제법 열심히 달린 것 같은데 숨하나 안차고 멀쩡해 보였다.

    이게 젊음인가. 자신도 18살에 불과하면서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유한이구나. 안녕."

    "안녕하세요. 돌아가시는 길인가요? 저도 이쪽 길로 가는데."

    평소에는 진우나 민재, 아니면 다른 친구와 함께 하교를 하지만 오늘은 드물게 혼자서 돌아가는 날이었다.

    마치 잰 것 같은 타이밍. 별 접점도 없는데 다가오는 상대. 하늘은 어쩐지 쌔한 느낌이 들었다. 진우가 고백하려고 자신을 불렀을 때 느꼈던 그 느낌 그대로였다.

    혹시 날 좋아하나?

    이게 굉장히 자의식 과잉이나 나르시스트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당연한 의심이었다.

    지극히 객관적으로 그녀는 예뻤고, 먼저 접근하는 남성의 대부분은 흑심이 있었다.

    그녀의 귀납적 결론에 따르면 이 후배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너..."

    하늘은 자신이 눈을 마주쳐야 호감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알았다면 유빈이 방해하더라도 반드시 눈을 맞추려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빤히 보는 상대라면 눈을 마주치기 마련이었다. 그 덕에 지금까지는 문제 없이 상대의 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유한도 자연스럽게 '왜 이러시지?'하고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유빈이 알았다면 통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가 필요 없는 수고를 들여가며 막았던 그 상황이 지금 벌어졌다.

    "왜 그러세요?"

    그녀가 유한의 눈동자를 통해 엿본 것은 뜨겁고 격렬한 감정이었다.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는 화끈한 열기가 선홍빛으로 타오르는 감각.

    그것은 맑은 동시에 순수했다. 투명하면서 거울처럼 반짝였다. 유한이라는 남자아이의 사람됨을 그대로 비추는 것처럼.

    해질녁 태양의 빛이 눈동자 너머에서 빛났다. 보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온기. 주홍빛 하늘이었다.

    "...아니야."

    이것은 그녀가 아는 감정이 아니었다. 맹세컨데 지금까지 그녀는 이런 감정을 본 적이 없었다.

    동경? 선망? 이건 어떤 마음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너 혹시 게임 하는거 있니?"

    그렇다면 괜찮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적어도 한이가 그녀에게 가진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꺼릴 이유는 없었다.

    유빈과도 친해 보였으니 이 기회에 가까워지면 좋을 것 같았다.

    "네? 네!"

    당연히 유한은 기쁘게 대답했다. 물은 것에 대해서, 묻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주저리주저리 떠들기 시작했다.

    동생이 생기면 이런 기분일까. 위로 언니 한명이 있을 뿐인 그녀는 가진 적 없는 동생의 그림자를 겹쳐보았다.

    그랬다. 그녀는 흑심이 아닌 연애 감정을 알지 못했다. 지극히 뛰어난 외모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기 마련이었고, 다가오는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연애 감정 이상으로 어딘가 질척거리는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 감정이 뻔히 보이기 때문에, 고백을 받을 수록 그녀는 더욱 연애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그렇다면.

    그런 그녀가. 흑심만을 연애감정이라 알아왔던 하늘이가.

    어떻게 오롯한 호의, 사랑을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하지만 사태는 유빈이 모르는 곳에서 운명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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