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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16화 (16/31)

〈 16화 〉 작전명 페르세우스

* * *

진우와 농구를 하고 시아와 영화를 본 토요일 이후. 유빈은 하나의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아."

학교 도서관의 대출석에 앉아있던 유빈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점심을 먹고 업무를 끝낸 나른한 오후였다. 점심 약속이 있다고 자리를 비운 사서 교사 대신 앉아 있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계속 서가를 향해 있었다.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책을 정리하고 있는 후배. 유한이 바로 그의 고민의 원흉 중 한명이었다. 아무것도 모른채 서가를 누비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한숨이 치밀었다.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거야? 그렇게 어려운 문제도 아닌데."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핀잔을 준 것은 옆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시아였다. '마틸다'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녀는 같은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찾아 빌렸다. 이것도 그 중 한권이었다.

유빈의 고민은 간단했다. 유한을 도와주는 것은 진우에 대한 배신이 된다. 그렇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가?

진우가 하늘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상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우의 마음을 알고 있는 이상 유한과 김하늘이 이어지도록 돕는다면 그것은 진우에 대한 일종의 배신이었다.

"임진우랑 한이를 두고 그렇게 결정을 못 내리는 이유가 뭐야? 내가 보기에 누가 더 나은지는 명확한데."

"아무리 폭력적이고 짜증나도 3년지기잖아. 그렇게 쉽게 배신할 수는 없어."

"걔는 앗싸리 뒤통수를 후려 쳤지만 말이야."

유빈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그 뒤통수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도 욱씬거렸다.

아직까지도 진우는 하늘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하늘이의 뒷담을 하고 다녔다. 본인이 먼저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냥 모른다고 치고 한이를 돕는 건 어떨까? 유빈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래도 아직은."

그래, 아직은.

그 말에 담긴 유빈의 갈등은 이번 일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진우와 친구로 3년을 지냈다는 것은 그 거칠고 고집 쎈 기질과 비정상적인 논리에 3년을 고통 받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친구라고 잘 맞을 수 만은 없잖아. 서로 어느 정도는 참고 가는 부분도 있는거지."

"너랑 진우 사이의 교환비가 안 맞는 것 같지 않아?"

"아직은. 괜찮아."

흥. 시아는 코웃음을 치고는 다시 책을 펼쳤다. 그 '아직은'이 얼마나 가는지 두고 보자는 태도였다.

"다 했습니다!"

"어. 수고했어."

그 사이 반납된 책들을 모두 정리한 유한이 북트럭을 끌고 왔다. 웃는 얼굴이 눈부셨다.

잘생겼고, 키도 170은 넘고, 성격도 좋았다. 상대가 하늘만 아니었다면 마음 편하게 소개해 줬을텐데.

"하늘이 말인데. 오늘 온다고 했거든?"

"네? 정말이요?"

"근데 지금 일이 너무 많이 밀려있어서 말이야. 인사만 간단하게 하고 나랑 고생 좀 해줘야겠다."

"에..."

그것이 실망스러워하는 반응이라는 것은 명백했지만 그렇다고 일을 시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일단 화, 수요일 담당자들의 일처리가 눈 뜨고 보기 힘들정도로 엉망이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그리고 이것이 하늘이에게 유한의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일단은 서가 정리부터 할까. 하늘이 오면 부를테니까 부탁할게."

"네."

아쉬워도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한은 불평 없이 움직였다.

"다 널 위한 일이다. 언젠가 알아 줄 날이 올진 모르겠지만."

이번 달에 새로 들어온 책들에 바코드를 붙이는 '라벨링(Labeling)' 작업을 하면서 유빈은 입구쪽을 계속 확인했다. 하늘이 온다면 그 때부터 그는 계속해서 상황을 조정해야 했다.

툭. 시아가 다 읽은 책을 덮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그녀는 유빈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냥 편하게 하고 있어. 김하늘이 오면 내가 말해줄게."

"아, 그래? 고마워."

유빈은 한결 마음을 놓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바코드를 반듯하게 붙이려고 온 정성을 들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시아는 의자를 슬쩍 끌어 옮겼다. 좀 더 유빈에게 가까운 위치였다.

"그래서. 그 방법이라는게 뭔데?"

"설명하자면 좀 긴데."

"괜찮으니까."

점심 시간은 아직 30분 이상 남아 있었다. 남은 업무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본 유빈은 혀를 찼다. 상당히 촉박했다. 이러니 동아리 시간마다 노동 밖에 못하고 끝나지.

어흠. 헛기침을 한 유빈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 능력, 아니 눈치?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능력이라고 할게. 하늘이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몇가지 의문이었던 점이 있어."

자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시간을 들여 계속 만나 본 상대라면 알 수 있다고 해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초대면인 상대조차 꿰뚫어보는 건 분명히 특수한 경우였다.

"도대체 어떻게 판단을 내리는걸까? 눈빛? 냄새? 기색? 분위기? 몸짓? 말투?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걸 알 수 있지? 그것도 처음 만난 사람을 상대로."

"보통은 모르지 않을까?"

"그래. 네 말 대로야. 보통은 모르지. 아마 설명을 들어도 그런가보다 할 뿐 공감하거나 이해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해."

아마도 빈번하게 자신을 좋아하는 상대를 마주하면서 생긴 일종의 초감각에 가까울 것이라고 유빈은 추측했다. 수 많은 연애 감정을 받아보면서 단련된 백발백중의 호감판독기.

"남들보다 민감하게 어떤 반응을 포착할 수 있는거겠지. 아마."

"무슨 판타지도 아니고 그게 뭐야."

이미 능력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능력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을거야. 가장 기본적인 건 직접 만나는 것."

만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초능력이었다. 시아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초면에 낯을 가리는 사람은 많아. 그런 식으로 쉽게 영향을 받는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해. 목소리는 아닐거야. 표정도 아니야. 몸짓? 그럴 리가."

"그럼 남은건..."

"눈."

유빈은 반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초면이라도 인사를 할 때 눈을 마주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쳐 지나가도 눈을 마주치는 경우는 많았다.

그녀는 '자신을 보는 상대의 눈'을 통해 호감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유한이 김하늘과 가까워지려면 우선 친해지기 전까지 눈을 마주쳐서는 안돼."

어느 정도 이상으로 친해진다면 연애 감정을 가졌다는 이유로 내쳐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선례로는 매우 안타깝지만 진우가 있었다.

하늘이는 사람을 냉철하게 잘라내는 것을 어려워 했다. 진우는 그런 면을 이용해 들러 붙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친구로 남을 수 있었다.

정에 약한 부분을 이용한다. 칭찬받을 행동은 아니었다. 명백하게.

"그리고 유한이 그 사실을 알아서도 안되지."

"왜?"

"의도적으로 눈을 피하면 부자연스럽잖아. 한이가 연기를 잘 할 것 같지도 않고. 누가 그런 상대랑 친해지고 싶겠어."

메두사의 목을 베려면 그녀를 봐서는 안된다. 시아는 순간 하늘과 메두사를 겹쳐보았다. 닮은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둘 다 마주치는 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그게 외모에 놀라서 굳는가 돌이 되어 굳는가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거 가능한 일이기는 해?"

"내가 고생하면 어떻게든. 정 힘들면 선글라스라도 붙여버리지 뭐."

"붙여? 씌우는게 아니라?"

"순간접착제로 붙여두면 벗지 못하는 변명 정도는 되겠지."

시아는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유빈은 진심이었다. 눈을 마주치고 감정을 읽을 시간을 주면 그 순간 게임 오버라니 이 무슨 망겜이란 말인가.

지금부터 들여야 하는 수고를 생각하면 차라리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한이가 지랄맞을 정도로 순진하고 성실하지 않았다면 시도도 하지 않았을텐데."

"그거 칭찬 맞지?"

"칭찬이야."

침침한 눈을 비비며 토해내는 한 마디는 어쩐지 신경질적이었다. 그런 그를 슬쩍 훔쳐본 시아는 다시 한번 의자를 끌었다. 유빈과의 거리가 조금 더 줄어들었다.

"애초에 내가 왜 고생하면서까지 저 녀석의 연애를 도울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그러게. 그렇게 힘들어질 거라면 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아. 게다가 아직 고민하고 있지? 진우 때문에."

시아는 진심이었다. 유한이 보기 드물 정도로 기특한 후배이긴 하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특별히 친해진 것도 아니었고 서로 아는 것은 이름과 얼굴 정도였다. 유빈이 포기하겠다,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별 말 없이 웃어 넘길 수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최우선은 어디까지나 유빈이었다.

"한 눈에 반한다고 해도 하필 하늘이냐고."

"그만큼 예쁘기는 하잖아."

"좀 덜 예뻤으면 좋았을텐데."

투덜투덜. 유빈이 불만을 끊임 없이 늘어놓는 것을 가만히 들어주던 그녀는 어느덧 한 뼘 거리 밖에 남지 않은 거리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힘들어도. 결국 도와줄 거지? 하늘이를 위해서 하는 일이기도 하잖아."

묻기는 했지만 사실 시아는 확신하고 있었다. 유빈은 유한이라는 후배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만약 유한을 위해서만이라면 이렇게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빈은 유한의 사랑이 하늘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귀찮은 계획을 짠 것이었다.

남자친구가 있다면 지금처럼 온갖 남자들이 꼬이는 일도 줄어들 것이고, 진우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연애감정으로 인해 생겼던 수 많은 지독했던 일들을 다소나마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건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본인은 필요 없다고 하겠지만 말이야."

더 이상 연애는 질색이라는 하늘에게 있어서 쓸데없는 참견일 뿐일 수도 있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들키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에는 절교 선언을 듣게 될지도 몰랐다.

"뭐, 이유가 그것 뿐인건 아니지만..."

"응? 더 있어?"

"지금은 됐어. 아, 끝났다."

40권이 넘는 책에 바코드를 붙인 유빈이 책을 순서대로 책상 한켠에 쌓아올렸다. 10권씩 4줄. 쌓인 책 때문에 책상의 양 옆에 칸막이처럼 벽이 생겼다. 이것으로 하늘이가 올 때에 대한 대비는 끝났다.

"이제 등록만 하면 돼."

"아직 해야하는게 더 있어?"

"기껏 바코드를 붙였는데 시스템에 등록을 안하면 의미가 없어. 대출 반납 처리는 할 수 있어야 하잖아."

"되게 하는 일 많구나."

이번에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유빈. 그는 상당히 다급해 보였다.

무슨 이유가 있는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시아의 눈은 유빈을 위 아래로 살폈다. 자판을 치고 있으니 손은 못 잡겠고, 그렇다고 몸을 찰싹 붙이는 것은 도서관에서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하물며 도서부장인 유빈이 상대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때였다. 김하늘이 도서관 입구로 들어온 것은.

"유빈."

"아. 왔구나."

시아의 부름에 유빈이 고개를 들었다. 정면 입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구 근처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그 모습조차 이목을 끄는 상황.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인데 주변이 화사해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유빈은 책들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껏 거리를 좁힌 것이 무의미해지자 시아가 안타까운 탄성을 흘렸다. 조금만 빨리 움직일걸.

일어난 유빈을 본 하늘이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한쪽 팔에 몇권의 책을 끼고 있는 상태였다.

"시아, 유빈아. 여기 있었구나. 선생님은?"

"점심 약속이 있어서 나가셨어."

학교 점심이 맛이 없는 건 교사도 학생과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사서 교사는 자주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웠다. 그 대부분은 점심 약속 때문이었다.

"할 일 많이 남았어요? 좀 도와줄까?"

"아니요. 새로 들어온 후배도 있어서 괜찮아요. 야, 유한!"

부르는 말을 듣고 책장 사이로 고개를 쑥 내민 유한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금방이라도 달려오려는 것 같아서 손짓으로 멈췄다.

"거기 다 정리하면 와!"

"넵!"

먼 발치에서 꾸벅 고개를 숙인 그가 책장 사이로 사라지자 유빈은 남몰래 안도했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이라도 이렇게 먼 거리에서 눈빛을 읽는 것은 무리였다.

아직까지 별 변화가 없는 하늘의 표정을 보면 유한이 가진 호감은 느끼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건 무슨 책이야?"

오히려 하늘은 시아가 들고 있는 책에 관심을 가졌다. 순식간에 가면을 뒤집어 쓴 시아는 둥글둥글한 미소로 화답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야."

"좀 봐도 될까?"

"응. 물론이지."

화기애애하게 떠들기 시작하는 두명. 유빈은 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일단 이번 한번만 도와주고, 그 다음 일은 다시 생각해 보자고.

열심히 일해서 갚아라, 한아. 소처럼 일해라! 제발 내가 널 도왔다고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다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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