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
* * *
"네가 원한다면 오늘 그랬던 것처럼 있을 수 있어."
시아의 눈동자가 몽롱한 빛을 띄었다.
네가 좋아해 준다면.
이런 스킨쉽도,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행동도, 시선을 맞추는 각도조차 의도한 대로였다.
시아는 유빈이 어떤 행동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도서관에서와는 달리 이번에는 동요를 숨길 수 없었다. 유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왼쪽 손이 잡히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가는 손가락이 파고들어 얽혔다. 깍지를 끼는 손은 그를 절대로 풀어주지 않겠다는 듯이 죄어들었다.
"으."
그는 가족 이외의 이성과 이런 식으로 접촉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농도 짙은 공기가 점점 축축하고 뜨겁게 물들어 갔다. 침착을 찾으려고 발버둥치던 유빈의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로 다운된지 오래였다.
"나는 그 멍청이들이랑은 달라. 널 괴롭히지 않을거야. 오히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시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피할 수 없는 거리에서 피하고 싶지 않은 열기가 뜨겁게 흘러넘쳤다.
"네가 바라는대로 해주고 싶어."
"내가 바라는대로, 라니."
"나 귀엽지 않아?"
대답은 필요 없었다. 윤시아는 누구보다도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은 귀엽다고.
"순진하고, 소극적이고, 귀여운 여자아이가 옆에서 너만을 바라봐 주는 상황은 어때? 너도 알지만 나, 내숭 하나는 대단하다고 자부하는데. 분명 만족할거야."
천천히 몸을 돌린 시아가 유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베일처럼 펼쳐졌다. 목 언저리를 간질이는 부드러운 감촉.
"아예 연인이 되어도 괜찮아. 별로 만나지 못한다고 불평하지 않을거고, 널 귀찮게 하지 않을거야. 놀자는 진우를 거절하기 위한 명목으로도 써먹기 좋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시점에서 이미 날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뜻 아니야?"
유빈은 쓴웃음을 짓고 잡혀있지 않은 팔로 아인슈페너를 집어들었다. 그가 빨대로 한모금 빨아들이는 것을 기다려 준 시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아닐거라고... 생각해."
그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감정이 이성을 향한 호의, 사랑이라고도 칭할 감정일지.
무엇보다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이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게 맞는지 알아내기 전에 행동해버릴 정도로.
"그렇게까지 해서 내가 뭘 해줬으면 하는거야?"
유빈은 지금까지 친구들의 부탁이라면 대부분 들어주었다. 오죽하면 스스로도 호구라고 생각할까. 시아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까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넌 남들의 호의를 사는 '귀여운 자신'을 싫어했잖아. 난 이래보여도 마음 편히 대할 수 있는 상대로 있었다고 자부하는데."
"응. 맞아. 네 앞에서 난 정말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단지 시아는 불안해 진 것 뿐이었다. 친구라는 관계로는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을 것 같았다.
"부족한거야. 친구로는."
시아는 자조했다. 그녀는 줄곧 미워했던 자신의 '귀여운 척'을 형편 좋게 써먹고 있었다.
유빈을 보다 강하게 묶기 위해서.
"내 마음은 내가 알지만, 네 마음은 알 수 없어. 어디로 향할지 몰라. 그러니까 네가 스스로 나에게 오도록. 깊게, 깊게 빠질 수 있게."
그것을 위해서라면 저런 연기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선을 그을 필요도 없이 마음껏 응석을 부리면 되는 것 아닌가.
마치 애정을 갈구하는 아기 고양이처럼. 홍유빈이라는 사람이 절대로 그녀를 놓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게 확신을 줘. 날 놓지 말아줘. 날... 좋아해줘."
흐느끼듯이 유빈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녀가 웅얼거리며 파고들었다. 온기를 찾으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겨울 아침의 몸부림이 이와 같을까.
아무래도 더 이상 두고 볼 수 만은 없었다.
"잠깐. 진정해."
턱.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유빈은 살며시 그녀를 밀어냈다. 저항 없이 떨어진 그녀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뱉은 말에 대한 부끄러움. 유빈은 손을 뻗어 흐트러진 시아의 머리카락을 대강 정리해 주었다.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빌지 않는다며?"
"...그 말은 취소야."
"정말이지."
솔직히 끌리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귀여운 여자애가 이토록 자신을 원하고 있는데 무덤덤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아를 위해서라도 지금 이대로 그녀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대로 너와 내가 사귀어도 그건 제대로 된 관계가 되진 못할거야. 네가 '내가 좋아할 귀여운 너'를 연기한다고 하면 더 그렇지."
거짓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견고할 리 없다. 마음 없는 연인관계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난 너에게 호감이 있지만, 결국 너와 마찬가지야. 내가 널 좋아하는지 확신하진 못하겠어. 워낙 하루하루 사는게 힘겨웠으니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그러니까."
시아는 우울하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목소리부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안된다는 거지?"
"그래. 애초에 너에게 그 가면을 쓰게 할 리가 없잖아."
시아가 얼마나 그 가면을 꺼리는지 알고 있는 유빈이 그런 것을 요구할 리 없었다.
"그리고 그런 연기 같은거 안해도 넌 충분히 귀여우니까 됐어."
"피. 입에 발린 말은."
"진짠데."
오늘 하루동안 몇 번이나 두근거렸는지 그녀는 알까. 그리고 방금까지 연기를 하고있지 않은 그녀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를 얼마나 주의 깊게 새겨들었는지. 얼마나 곱씹었는지.
그녀는 모르겠지. 유빈은 아직도 잡혀있는 왼손을 풀었다. 거절 당해서 힘이 빠졌는지 어렵지 않았다.
이번에는 축 늘어진 그녀의 검지를 조심스럽게 집었다. 손을 잡는 것에 비하면 소극적이고 수줍은 접촉이었다.
"이건 뭐야?"
"대신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렇게 하자."
그녀가 원하는 것은 결국 보다 강한 연결이었다. 쉽게 없어지지 않을 두 사람의 관계.
자신을 좋아해 달라고 그녀는 말했다. 만인의 호의를 사고 절묘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녀 답지 않은 연약한 말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사귀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널 좋아하게 만들어줘."
"뭐?"
"크게 보면 오늘 네가 한 행동과 다를게 없을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연기 없이야."
다시 말하지만 그는 부탁에 약했다. 시아의 호소를 넘겨버릴 수 없었던 그는 그녀의 부탁에 응하기로 했다.
"나도 노력할게. 너를 좋아하도록, 그리고 네가 날 좋아할 수 있게. 그러면 언젠가 우리는 연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 뭐야 그게."
"좀 이상하면 어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진심이야? 네 말대로면 넌 스스로 나한테 얽매는 꼴이잖아."
"그걸 원했으면서 말은 잘해요."
서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연인이 되자고 약속하는 상황이었다. 시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쩐지 진 기분이었다.
"어쩐지 요상해지긴 했지만, 그런 걸로 어때?"
"너도 정상은 아니야."
친구일 뿐인 상대에게 여기까지 해줄 필요는 없을텐데.
그 말을 들은 유빈은 속으로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떠올렸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정도의 현명함은 가지고 있었다. 말 했다간 진우와 한 묶음이 되지 않냐고 화를 냈을 테니까.
아. 유빈은 무언가 알아챘다는 듯이 손바닥을 마주댔다. 시아는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쳐다보았다.
"이걸 썸이라고 하는걸까?"
"절대 아니야."
힘이 쭉 빠졌다. 시아는 오늘까지 했던 많은 고민들이 쓰잘데기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게 뭐야. 생각했던 거랑은 너무 다르잖아!"
그녀는 휙 몸을 돌려 유빈에게 등을 기댔다. 아까와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계속 툴툴거리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유빈은 적당히 대꾸해주면서 커피를 즐겼다. 역시 시아는 이렇게 마음을 풀고 있을 때가 가장 익숙했다.
"되게 큰맘 먹고 한 말이었는데."
"후후. 쑥맥을 쉽게 봤구나."
"거 참 자랑이다. 하지만."
턱. 머리 위쪽으로 손을 뻗은 시아가 유빈의 뺨을 쿡 쿡 찔렀다. 유빈은 굳이 피하지 않았다. 그녀 나름의 화풀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가 열받는지 찌르던 손이 이번에는 슬쩍 뺨을 꼬집었다. 아프진 않았다.
"각오해. 오래 끌 생각 없으니까."
"살살 부탁해. 난 연약한 모태 솔로라고."
허허롭게 넘기는 유빈을 유심히 쳐다보던 시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속삭였다.
"그리고 마음 바뀌면 얼마든지 말해. 난 몸뿐인 관계여도 괜찮으니까."
으엑.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 같은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거기에 표현 방식이 지나치게 적나라했다.
"말! 고운말! 플리즈!"
"풋. 아하하."
그 후로는 언제나와 같았다. 게임도 별로 못한 김에 편히 쉬려고 몸을 늘어트린 유빈과 생각나는대로 대화를 이어가는 시아.
"아. 맞아. 그 후배는 어떤 것 같아?"
"유한? 어떤 것 같냐는 건 무슨 소리야?"
"하늘이 좋아하잖아. 될 것 같아?"
유빈은 침음성을 흘렸다. 남의 연애에 끼어들어서 잘된 적이 없는 그에게 참으로 고민되는 화제가 아닐 수 없었다.
유한은 착하고 성실한 후배였다.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았다. 외모도 잘생겼고 연하이기까지 했다.
"하늘이가 가끔 흘리듯 말하는 취향을 생각해보면 가능성은 없진 않은 수준인가."
"취향? 그런 것도 말한 적 있어?"
"여자애들 끼리는 그야 말 안하겠지. 워낙 예뻐서 조금만 잘못 말해도 바로 퍼지니까."
유빈이 상대일 때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이 때문인지 연애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연애가 진절머리 난다던가, 달라붙는 남자들이 기분 나쁘다던가. 그런 이야기들 사이에 조금씩 들었던 말들을 정리하자면.
"연하, 순진."
이 두 단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솔직히 요즘 고딩 중에 순진한 녀석이 어디 있겠냐고 생각했었어."
"그렇지."
"근데 있더라."
유한은 정말로 '순진'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렸다. 어리버리한 건 아니고 멍청한 건 더더욱 아니지만 어딘가 새하얗고 귀여운 느낌을 주었다.
"문제는 유한이 하늘이에게 이미 반해 있다는 거야."
"그게 문제가 돼?"
"상대가 하늘이면 문제지."
"...아."
시아가 작게 한탄했다. 하늘이는 일반적인 여학생들과는 다른점이 하나 있었다.
그 외모나 털털한 성격은 분명히 특징적이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가 현재 연애를 포기하게 만든 이유.
"하늘이는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
김하늘은 마주하고 있는 상대가 자신을 좋아한다면,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 귀신같이 알아챈다.
이게 농담 같지만 정말이었다.
과거 첫 대면부터 끝까지 무뚝뚝하고 무표정이었던 친구와 함께 논 적이 있었다. 그 친구가 먼저 돌아가고 난 뒤, 하늘은 유빈에게 말했다.
"다음부터 저 사람 있을 때 날 부르지마."
"응? 왜?"
"날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라서 그래."
유빈이 보기에는 그 어떤 낌새도 없었는데 하늘이는 확신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 친구에게 물어보니 어떻게 알았냐고 기겁을 했다. 내내 덤덤해 보였던 것은 과도한 긴장으로 표정근이 굳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도 하늘은 족집게처럼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상대를 걸렀다. 애석하게도 진우와는 이미 지나치게 친해진 후여서 끊어내지 못했다.
"하늘이는 연애를 피하고 있어. 누구랑도 사귀고 싶지 않다고 여러번 말하기도 했고."
"그런 상황에서 만나면."
"눈 마주치는 순간 끝. 한이는 기회 한번 없이 첫사랑을 날리는거지."
취향이고 뭐고 하늘이는 지금 연애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이어지는 건 무리였다.
"첫사랑이었구나."
"그런 태도인데 첫사랑이 아니면 그게 더 신기할 것 같다야. 방법이 있다면..."
유빈의 눈이 어둡게 번뜩였다.
"잠깐. 이건 혹시?"
"유빈아? 왜 그래?"
"아니. 별거 아니야. 아무튼 방법이라면 하나 있긴 해. 그걸 하려면."
유빈은 하늘을 좋아하는 두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나는 진우. 원수 같은 절친.
다른 하나는 유한.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친근한 후배.
"...내가 도와줘야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