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14화 (14/31)

〈 14화 〉 널 놓칠 수 없어

* * *

#

"갑자기 왜 그래?"

"응?"

"갑자기 왜 그러냐고."

"응?"

"아니, '응?'이 아니라..."

"응?"

유빈은 입을 다물었다. 흔들림 없는 미소로 마주하는 눈빛에서 그냥 넘어가라는 압박이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는 일단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눌려있던 피로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올라오는 현기증에 이마를 짚은 그는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무튼 별 문제는 없는거지?"

물어보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유빈아?"

그것을 화가 났다고 생각한걸까. 불안한 기색으로 시아가 유빈의 안색을 살폈다.

다급한 척 문자를 보내면 마음 약한 유빈이 와 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왔으니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이제보니 유빈은 여기까지 달려와서 지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문자 하나 때문에 그는 친구들과 놀던 것도 내팽개치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미안해. 나는,"

"다행이야. 별 일 없어서."

피곤에 절은, 그만큼 걱정했다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시아의 말문이 막혔다. 가면 아래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나'가 이를 악무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면이 문제였다. 유빈이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 그를 불렀다.

당장이라도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귀여운 나'가 그렇게 말하자 유빈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 걸 본 적이야 있지만 자신이 그 대상이 되는 건 처음이었다. 냉소적이고 직설적인 면모를 완전히 지운 모습이 그에게는 낯설었다.

"이렇게 불러서 미안해. 나, 마틸다를 보려고 왔는데 도서관에서 영화를 본 적이 없잖아. 혼자 들어가기 무셔워서... 으아, 혀 깨물었다."

"조심해야지. 하여튼 그래서 나한테 와달라고 했다는거지?"

"응.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

시무룩하게 풀이 죽은 그녀가 발 끝으로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계산된 행동이라는 걸 알아도 귀여운 모습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걱정했던게 더 커서 그렇지 당연히 화는 났다. 시아는 그가 걱정하도록 의도한 문자를 보내 그를 속였다. 그냥 말해서는 선약이 있는 유빈이 거절할테니까.

그렇다면 짜증이라도 내 볼까. 유빈은 금방 그런 생각을 접었다. 단지 그를 괴롭히기 위해 이런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쁜 짓이라는 건 본인이 이미 이해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쩔 수 없네."

현재 시각 2시 10분. 지금부터라도 돌아가면 다시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진우와 민재는 아직 피씨방에 있고 시간은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 선택지를 포기했다.

"들어가자. 언제 시작이야?"

"응?"

"시간."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 2시. 그때 문자로 '시간이 없다'고 했으니 30분 안에 영화가 상영될 터였다.

"2시 20분이야."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자료실에 들리기에는 촉박한가. 그냥 가야겠네."

대출증이 들어있는 지갑을 꺼내며 앞장 서는 유빈. 시아는 급히 뒤를 따랐다.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같이 봐 줄거야?"

"어."

어째서? 시아가 물어보기도 전에 유빈은 대답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든 이미 여기까지 왔고, 공짜고, 안하던 짓을 하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싶고."

단지 혼자 들어가기 무서워서 불렀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평소에 최대한 그를 쉬게 해주려고 배려하던 윤시아가 아닌가. 그런 이유로 이렇게 행동할 리 없었다.

거기에 만약 이유가 그것 뿐이라면 가면을 쓰고 그를 대하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거기에 영화 한편 같이 봐주면 음료수를 사주겠다니, 안 갈 수가 없네."

찡긋. 유빈은 어울리지도 않게 씩 웃었다. 음료수 한잔으로 봐주겠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고마워."

"됐어. 마틸다는 나도 좋아하는 작품이고 영화에도 흥미는 있었어."

단지 영화를 싫어해서 안 봤을 뿐. 유빈은 뒷말을 생략했다. 영화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 시아가 더 미안해할 것이 분명했다.

도서관 시청각실은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어두운 내부는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는지 서늘하고 건조했다. 유빈은 축축한 땀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바람막이 앞섬을 여몄다.

"땀 식으면 감기 걸리겠는걸."

시청각실 안쪽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도서관의 문화사업이라고 해도 홍보가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영화 '마틸다'를 보고 싶은 사람이 별로 없었거나.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더니 자주 쓰이지 않는 의자에서 퀘퀘한 냄새가 풍겼다. 학교 시청각실과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학교 시청각실 같아."

옆에 앉은 시아도 그렇게 느꼈는지 작게 속삭이고는 다소곳한 웃음을 흘렸다. 낯간지러운 숨결이 귓가를 간질였다.

진짜 적응 안되네. 유빈은 속으로 신음했다.

묘하게 평소보다 거리감이 가까웠다. 본래 그녀의 가면은 남들과 선을 긋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친해진 것 같아도 더 이상 좁혀지지 않는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오늘의 그녀는 본성을 드러내고 있을 때 보다 가까웠다. 걷고 있을 때 자주 손등과 손등이 스치거나, 어깨가 맞닿는 걸 보면 명백했다.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 이성에 대한 면역이 적은 유빈은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친하게 지냈던 여자 사람 친구는 한 자릿수에 불과하고 이성관계로 발전한 상대는 없었다. 혈연 중에도 여자는 사촌 누나 한명 뿐.

낯을 가리는 성격과 담백한 태도에 가려져 있지만 그는 사실 쑥맥이었다.

"영화는 원작이랑 많이 달라?"

다른 사람들도 있는 영화관­도서관이지만­에서 조용히 말하는 것은 당연한 에티켓이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가까웠다. 팔과 팔이 밀착되어 있어서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가까워!

유빈은 입을 꾹 다물고 팔짱을 꼈다. 동요를 들키지 않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전체적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아. 가족 중에 주인공의 오빠가 다소 착하게 나오거나 외모가 삽화랑 다른 정도지. 그 외에는 사건이 모두 끝난 뒤에 주인공이 아직도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던가..."

"다른 건?"

"별로 없어. 다른 건 직접 보면서 확인해 봐."

유빈도 영화를 본 건 아니라서 대략적인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시아가 몸을 떼자 그제서야 유빈은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 시작한다."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는 시아. 스크린에서는 긴급 상황에서의 대피로를 설명하고 있었다. 내용은 극장에서 영화를 볼때와 마찬가지였다.

"이거 도서관에서도 하는구나."

도서관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모양인지 영상 수준은 좀 떨어졌다. 프로젝터와 스피커도 영화관의 설비와 비교하면 조악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영화를 보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도서관 예산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겠지..."

"응?"

"아무것도 아니야."

업계의 슬픈 사정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과자라도 사올걸 그랬나?"

"글쎄. 음료수 정도면 몰라도 과자는 먹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기대감과 긴장으로 발을 구르던 시아는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하면서 잠잠해졌다.

천재 소녀 마틸다. 비열하고 멍청한 가족과 폭력적인 교장.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마틸다의 편이 되어주는 선생님 제니퍼 허니.

많은 우여곡절을 지나 마틸다와 제니퍼는 교장을 쫓아내고 함께 살게 된다. 해피엔딩.

같은 내용이라도 소설과 영화로 보는 것은 받아들이는게 달랐다. 시아는 엔드 크래딧이 끝나고 나서도 잠시동안 그대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아."

"...응, 가자."

영화를 보고 나오니 이미 시간은 4시가 넘어 있었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 시아는 유빈의 팔을 잡아 끌었다. 유빈은 저항 없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어두운 곳에서 화면만 보고 있던 탓인지 잠에서 깬 것 같이 나른했다.

"카페 가자. 사주기로 했잖아."

"그냥 편의점에서 캔음료나 하나 사줘도 되는데."

"그러면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안돼. 얌전히 보상을 받아라!"

"얌전히 보상을 받으라는 건 또 처음 들어보네."

음료수를 사주면 봐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비싼걸 사달라는 건 아니었다. 같이 영화를 봐 줬으니까 그에 대한 감사도 있다는 뜻인가. 유빈은 그녀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평소에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4200원짜리 아인슈페너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카페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적했지만 우연히 2인석은 비어있는 자리가 없었다. 유빈은 자연스럽게 4인석으로 향했다.

"주문은?"

"아인슈페너!"

번쩍. 유빈은 설래는 가슴을 끌어안고 자리에 앉았다. 평소에는 카페에 와도 2000원 짜리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이 끝이었다. 자그마치 2배가 넘는 가격이라니.

시아는 그런 유빈의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런 별 것 아닌 일에서도 유빈은 행복해하곤 했다. 점심시간에 잠을 푹 자서, 그날 가져온 커피가 맛있어서, 바람이 선선해서.

힘들고 우울한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힘을 내기 위한 버릇. 유빈은 그런 식으로 이유를 들으면 웃을 수 없는 버릇이나 특기를 몇개 가지고 있었다.

"영화는 어땠어?"

주문을 하고 돌아온 시아는 유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귀여운 나'를 꺼낸 채였다.

"정말 재밌었어."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턱을 괴었다. 잠시 아무런 말 없이 영화의 여운을 곱씹는 두 사람.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자니 다시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는 오늘 어째서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했을까?

처음 유빈은 시아가 자신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모종의 이유로 그를 믿을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가면을 썼을 것이라고.

하지만 부쩍 가까워진 거리감과 태도가 그런 생각을 부정했다. 애초에 멀어지려고 했으면 영화를 같이 보자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른 이유로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힌트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시아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곧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시아야."

"응? 왜?"

싱글벙글한 표정은 정말로 보기 좋았지만, 역시 그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아는 시아는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저런 식으로는 웃지 않았다. 물론 그가 몰랐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괴리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슬슬 이유를 알려주지 않겠어?"

"......"

무엇에 대한 이유를 물어보는지 시아가 모를 리 없었다. 시종일관 달꽃처럼 피어있던 그녀의 미소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지금 이곳에 남은 것은 '본성'이라고 불린 윤시아였다.

"보여주고 싶었어."

그녀는 맨 처음 그렇게 말했다.

"보여주고 싶었다고? 뭘?"

"넌 알거야. 내가 1학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비명. 폭력. 멸시. 질투. 분노. 작년에 지나온 지옥 같은 광경들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너라도 모를거야. 나에게 네가 해준 일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내가 한 일들인데?"

"그걸 받아들이는 건 나잖아?"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었다. 유빈은 잠자코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널 놓치고 싶지 않아. 솔직히 어떤 관계라도 상관 없어. 중요한 건 네가 나와 있어준다는 거니까."

"어우. 이렇게 열렬한 고백을 받을 줄 몰랐는데."

시아가 보여준 감정은 연애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열렬한 고백이기는 했다.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두지 않은 의미를 유빈에게 두고 있었다.

그녀는 많은 고민을 했다. 직접 말하지 않아도 유빈이라면 그녀의 이런 모습에 눈치를 챌 것이다. 부담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멀어지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절대로.

"너절하게 빌 생각은 없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건 최후의 최후, 정말 마지막 수단이니까."

"그래서."

유빈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침착하고 다정했다. 시아는 그의 태도에서 말을 이어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보여주고 싶었다는건 무슨 뜻이야?"

"아, 잠깐만."

시킨 음료를 가지러 가기 위해 시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빈도 일어나려 했지만 시아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종종걸음으로 사라진 시아는 곧 아인슈페너와 자신이 시킨 카페모카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아인슈페너를 유빈의 앞에 두고, 카페모카를 그 옆자리에 두었다.

그리고는 털썩. 유빈의 옆에 앉았다.

"어?"

"이런거."

무심코 몸을 빼려고 한 유빈의 팔을 붙잡은 시아는 몸을 가까이 기댔다. 그 눈은 어디까지나 냉정하고 차가웠지만 그 심처에서는 짙은 감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유빈은 고양이를 앞에 둔 쥐가 이런 기분일까, 하는 태평한 감상을 떠올렸다. 어차피 지금 그는 시아의 이야기를 듣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