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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13화 (13/31)
  • 〈 13화 〉 스릴, 쇼크, 서스펜스

    * * *

    #

    토요일. 언제나처럼 일어난 유빈은 창문을 열었다. 이젠 여름에 다가가고 있는 봄의 아침공기가 방 안으로 빨려들어왔다. 깊게, 깊게 숨을 들이킨 그가 몸을 쭈욱 늘렸다. 평소였다면 하루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슬피 여겼겠지만 오늘은 작정하고 정한 휴일이었다.

    얼마만에 갖는 휴식인가. 어쩐지 감개무량한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종일 뒹굴면서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지만 이미 약속을 잡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잘 잤니?"

    거실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TV를 보고 있었다. 이미 식사를 마쳤는지 식탁에는 빈 그릇들이 놓여 있었고, 한쪽 의자에 앉은 어머니가 밥을 먹고 있었다.

    부엌으로 가면서 은밀하게 어머니의 표정을 확인한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이 밝다는 것은 나가서 놀고 온다고 해도 기분이 그리 나빠지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뭐야, 형이잖아. 안녕."

    아침으로 먹을 식빵과 버터를 꺼내오자 어느새 식탁에 앉은 동생이 인사를 건냈다. 자다 막 깨서 부스스한 머리가 야성적으로 뻗쳐 있었다.

    "안녕."

    "오늘 농구한다고 그랬지. 언제 나가?"

    "아마 아침 먹고 10시 정도에?"

    지금 시간은 8시. 아직 여유롭게 준비할 수 있었다. 찬장에서 꺼낸 토스트기에 식빵을 꽂은 그는 길게 하품하면서 버튼을 눌렀다.

    "동생도 데리고 가면 어떠냐. 운동 좀 시켜줘라."

    "엑."

    "저는 상관 없는데요. 진우도 괜찮다고 할거고."

    "아뇨, 아뇨, 아뇨, 아뇨!"

    격하게 고개를 흔드는게 그렇게나 싫은가 싶을 정도였다. 그의 운동을 싫어해서 이런 일은 분명하게 거절하는게 일상이었다.

    집에만 있지 말라고 한 두마디 더 던지는 어머니와 괜찮다고 물러서는 동생. 그 사이에서 유빈은 조용히 토스트를 씹어 삼켰다.

    식사 시간에는 가능한 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어디에 지뢰가 묻혀 있을지 모른다면 하늘을 날지 못하는 한 그 위를 걷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법이다.

    주말에는 아버지도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오늘 어디 나가니?"

    마침 TV를 끄고 일어난 유빈의 아버지가 다가왔다. 한쪽 손에는 아직 따뜻한 커피 잔이 들려 있었다.

    "네. 진우랑 농구하기로 했어요."

    "좋네. 재밌게 놀아라."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유빈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는 일상적으로 그에게 여러가지를 요구하고, 또 당부하지만 아버지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폭탄을 떨구고는 했다.

    그것은 자기계발 과제일 때도 있었고 어떠한 지적 영역의 조사 보고서일 때도 있었으며, 새로운 운동일 때도 있었다. 신선한 자극은 즐겁기도 했지만 빈 시간에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그에게 있어서는 다소 부담이 되기도 했다.

    그날은 유난히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날씨도 좋았고 해야 할 숙제도 당장은 없었다.

    재촉도, 조급함도 없는. 근래들어 가장 평온하고 온화한 아침이었다.

    #

    학교의 농구 코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진우가 혼자 몸을 풀고 있었다.

    "반팔 반바지면 안 춥냐?"

    "안추워."

    진우는 추위를 별로 안 타는 체질이라 겨울에도 자주 반팔을 입고 나타나곤 했다. 지금 같은 봄, 그것도 여름에 가까운 봄이라면 저렇게 입고 있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슈팅 연습을 하는 진우를 지켜보던 유빈은 몸을 돌려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주말이라 텅 빈 운동장은 공허한 적막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공이 바닥에 튕기는 소리가 막힘 없이 뻗어나갔다.

    주말에 농구를 하겠다고 학교 운동장을 오는 고등학생은 그들 뿐인 모양이었다.

    "일단 어쩔래? 1대 1로 10점 내기?"

    "내가 너랑 1대 1을 어떻게 이기냐."

    임진우는 체육 실기를 준비중인 교내 제일의 스포츠맨이고 홍유빈은 몇 없는 운동 시간도 깎아서 공부에 투자하는 허약체였다. 몸싸움부터 성립이 안될게 뻔히 보였다.

    "설마 내가 진심으로 너랑 경쟁을 하겠어? 살살 할테니까 걱정 마."

    "에휴. 그래, 하자."

    어차피 두 사람이면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었다. 유빈은 입고 온 바람막이를 벗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유빈이 그렇게 농구를 못하는 건 아니었다. 반에서 교내 농구대회에 나갈 선수를 뽑는다면 5명째에 턱걸이로 걸릴 만큼은 했다.

    다만 진우는 그 중 첫번째로 불려서 주장이 될 수준이었고, 실력 외에도 체력적인 차이가 컸다. 진우는 유빈이 공부에 투자하는 그 이상으로 운동에 전념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잠깐. 그건 이렇게 하는거야."

    자연스럽게 1대 1 시합이었던 게임은 농구를 가르쳐주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자세를 교정하거나 드리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온 몸이 땀으로 축축해져 갈 즈음, 휴대전화의 알람이 울렸다. 12시 반. 점심을 먹으러 갈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움직임을 멈췄다.

    슬슬 힘이 부쳤던 유빈은 마지막으로 공을 휙 집어 던졌다. 텅. 안타깝지만 백보드에 맞고 튕겨나왔다.

    "좀만 쉬었다 가자."

    유빈은 비틀비틀 벤치로 걸어가 앉았다. 진우는 그 와중에도 쌩쌩한지 공을 몰며 농구 코트를 돌기 시작했다. 대단한 체력이었다.

    챙겨온 가방에서 얼음물이 담긴 물병을 꺼낸 유빈은 한번에 반 넘는 양을 들이켰다. 차디찬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달아오른 몸을 진정시켜주었다.

    "­파하."

    따뜻한 날씨, 솔솔 부는 바람에 땀이 식으면서 기분 좋은 시원함이 느껴졌다. 쉬기 시작하니 피로감이 조곤조곤 몰려오더니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았다.

    "야, 졸지 마."

    "안 졸아."

    어느새 감고 있었던 눈을 뜨니 온 몸이 흠뻑 젖은 진우가 손가락 위로 공을 돌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농구 코트 옆의 급수대에서 물을 뒤집어 쓴 모양이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날씨가 워낙 따뜻해서 가는 사이에 마를 것 같았다. 축축한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진우가 물었다.

    "민재한테 연락은 했어? 오늘 온다 그랬잖아."

    "어디서 점심 먹을지 정하면 그쪽으로 온다던데. 뭐 먹고 싶은거 있어?"

    "뭐든 상관 없어. 피씨방에서 대충 떼워도 되고."

    "아, 그럴까?"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귀찮았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뭘 먹든 비싼건 못 먹을테니 편하게 먹으면서 놀 수 있으면 됐다.

    "그럼 민재한테도 그렇게 말한다?"

    "그래."

    식비를 줄이면 그만큼 피씨방 시간에 쓸 수 있었다. 가진 돈이 별로 없는 유빈에게 있어서 그것은 중요한 이점이었다.

    "어제 좀 바빠 보이던데. 신입생들 때문이야?"

    "어. 설마 도서관 분류표도 못보는 녀석들이 태반이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어제 가르치면서 느낀건데 정말로 도서관 10진 분류표를 이해하지 못한 학생들이 꽤 됐다. 숫자와 한글 순서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게 그나마의 위안이었다.

    "진짜? 순 멍청이들이네! 그걸 어떻게 몰라!"

    얼굴도 모르는 상대를 참 쉽게도 까는구나. 유빈은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했다. 수위는 낮아도 조금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거 말고도 업무를 가르쳐줘야 했으니까 좀 바빴지. 너희는?"

    "우리?"

    "신입생은 좀 들어왔어?"

    진우는 2학년이 되면서 항상 놀던 친구들을 모아 동아리를 하나 만들었다. 문예창작 동아리, 라는 거창한 이름이 달린 그 동아리는 2학년생만 1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인당 1동아리 소속이 규정이라 유빈은 들어가지 못했지만 민재, 시아, 하늘을 포함한 친구들 대부분이 이 동아리 소속이었다.

    "들어왔어. 한 4명 정도?"

    "그 정도면 적당하네. 애초에 친목 동아리였던 걸 생각하면 오히려 꽤 들어온 편 아니야?"

    "신입생들은 친목 동아리라는 걸 모르잖아 빡대가리야."

    "내가 빡대가리면 넌 새대가리냐. 나보다 성적 낮잖아."

    "말대가리다 새끼야. 비겁하게 팩트 꺼내지 마라."

    "이런 망아지 같은 새끼. 어차피 공부 안하면서 뭘."

    동아리 활동보다 모여서 놀 생각으로 만든 동아리지만 그래도 잘 굴러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담당 교사도 있을테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교사가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마냥 놀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서로 욕설을 주고 받고 있지만 두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대화였다. 유빈은 평소에는 욕설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진우와 대화하다 보면 감정이 상해서 거친말을 뱉고 마는 경향이 있었다. 그만큼 친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민재도 온데. 버스 타고 있다니까 10분 정도면 오겠네."

    피씨방으로 들어가자 옅은 담배냄새가 훅 풍겨왔다. 유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왜? 담배냄새 심하면 다른데로 갈까?"

    "아니. 그렇게 심하진 않은데..."

    "그럼 왜?"

    유빈은 들고있던 바람막이를 피씨방 의자에 걸쳤다.

    "어머니가 내 옷에서 담배냄새를 맡으시면 피씨방 갔다는 걸 눈치 채실테니까."

    "...너희 어머니는 옷 냄새도 맡아 보시니?"

    "어."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진우는 할 말을 찾지 못했고 유빈은 이 화제로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고 있자."

    "응."

    3년지기는 서로의 뜻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동갑내기 절친은 나란히 앉았다. 기왕 놀러 나왔는데 우울한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라면과 음료를 시킨 유빈은 곧 걱정을 잊고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미 말했듯이, 오늘은 휴일이었으니까.

    중간부터는 민재도 합류했다. 게임을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 덕에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1시간 정도 게임을 한 2시경. 문제는 갑작스럽게 발생했다.

    "응?"

    쥐 죽은 듯이 조용했던 휴대전화가 울리더니 하나의 문자를 띄웠다.

    [도와줘.]

    어쩐지 드는 불길한 예감에 유빈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급박해 보이는 문자를 그냥 둘 수 없었던 그는 전화기를 집어들고 일어섰다.

    "나 화장실."

    "빨리 갔다와."

    피씨방 밖으로 나간 그에게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시아였다.

    [시간이 없어. 도서관 앞. 어서.]

    도서관 앞? 시간이 없다?

    [무슨 일이야]

    물어봐도 대답은 오지 않았다. 유빈은 고민에 빠졌다.

    오늘은 도서관에서 '마틸다'를 상영하는 날. 시아가 도서관에 있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를 부르는 이유였다.

    도서관은 고등학생들이 마주치기 쉬운 장소였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은 많았고,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가방만 두고 놀러 나오는 학생도 많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녀가 과거의 악연과 마주쳤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장소가 도서관이라는 점이었다. 마주하기 싫은 상대와 만나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아."

    그에게 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잰걸음으로 피씨방으로 들어간 그는 바람막이를 챙겼다. 한창 게임 도중이었던 두 사람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뭐야? 벌써 가게?"

    "어머니가 오래."

    "너도 참 힘들게 산다."

    그가 어머니의 말에 따라 중간에 돌아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진우와 민재는 별 말 없이 다시 게임에 열중했다.

    바람막이를 대충 걸친 그는 승강기도 이용하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피씨방과 도서관은 그리 멀지 않아 뛰어서 3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단지 문제가 되는 건 그 3분이 시아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

    욕설을 퍼붓는 데에는 1분이면 족하다. 유빈은 다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아침에 했던 농구의 피로로 다리가 욱씬거렸지만 무시했다.

    도서관 앞이라면 정문인가? 아니면 입구인가? 괜찮을까? 늦지는 않았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도 빠르게 도서관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먼 거리에서도 보이는 정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도서관 입구.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흐르는 땀방울을 훔친 유빈이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한적한 주말 오후라 도서관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무도 없는 주변. 자리를 옮겼나?

    강제로 잡혀 어두침침한 곳으로 끌려가는 시아의 모습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설마 그렇게까지 일을 벌일까 싶으면서도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기를. 그가 그렇게 빌며 전화 화면을 띄웠을 때­

    "와 줬구나."

    "시아?"

    찾고 있던 상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몸을 휙 돌린 그는 먼저 시아에게 겉으로 보이는 문제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청난방 위로 걸친 가디건, 무릎 위에 걸쳐지는 반바지. 평소와는 다른 케쥬얼한 복장이었다. 잠깐, 케쥬얼?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은 어제 하굣길에서 나누었던 대화였다.

    "고마워. 기뻐."

    평소와는 다른 달콤한 목소리였다. 유빈은 알고 있었다. 저 목소리는 그녀가 보여주는 가면의 일부, '귀여운 나'를 만들어내는 요소 중 하나였다.

    "왜 그래?"

    "나 어때? 귀여워?"

    유빈의 물음을 무시한 채 시아가 팔을 살짝 벌렸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대답했다.

    "...귀엽다고 생각해."

    "에헤헤."

    넌 누구냐.

    그는 격한 혼란에 빠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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