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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12화 (12/31)

〈 12화 〉 내일을 기대하는 너와 나

* * *

다음 날. 유빈은 금요일마다 있는 동아리 시간에 맞춰 도서관으로 향했다. 원래 동아리 시간에는 부장에게 할당된 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오늘은 새로 들어온 부원들에게 서가를 정리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솔직히 말하면, 유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숫자, 그리고 가나다 순으로 찾아가서 꽂으면 끝나는게 도서관의 책 배열이다. 설마 고등학생이 숫자를 못 보는 건 아닐테고, 그렇다고 한글을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 그걸 몰라서 할 수 없다는 건 살면서 도서관을 한번도 가 보지 않았다는 것처럼 들렸다.

자신처럼 도서관을 좋아하진 않을 수 있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도서부원이라고 해서 모두가 도서관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자료를 찾기 위해,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말인가?

"안녕하세요."

아직 도서관에 온 부원은 없었다. 사서 교사에게 인사를 건낸 후 그는 빠르게 서가의 정리 상황을 파악했다. 언제나처럼 엉망이었다.

"얘네는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거야?"

꽂힌 위치는 뒤죽박죽이고 책들 위에 가로로 놓인 책들도 여럿 있었다. 비치된 컴퓨터들은 전원이 켜져 있었고 소파와 의자는 이리저리 어질러져 있었다. 도대체 금요일 당번들은 뭘 하긴 했는지 의문일 지경이었다.

"선생님. 오늘 점심시간에 당번 왔어요?"

"아니. 그래서 반납된 책들도 정리가 안 됐을거야."

맙소사. 오늘은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대로 서가 정리에 전원을 동원해야 할 모양이었다. 유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저것들이 일을 제대로 할까."

모범이 되어야 할 2학년들은 당번을 땡땡이치기 일쑤였고 1학년들은 1학년대로 책임감이 없었다.

오늘 날짜인 신문을 지정된 위치에 전시한 유빈은 너덜너덜해져서 수리가 필요한 책들을 들고 대출대 뒤쪽의 테이블로 향했다.

책을 수리하기 위한 종이 테이프를 꺼내던 그에게 남학생 하나가 다가왔다. 파손된 부분을 확인하느라 몰랐는데 그 사이 부원 중 한명이 와 있었다.

기억에 있는 얼굴. 1학년 도서부원 중 한명이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부장 형!"

"유한. 맞지?"

"네!"

씩씩하게 대답하면서 웃으니 곱상한 얼굴이 훤했다. 푹신해 보이는 갈색 곱슬머리에 수려한 얼굴. 모르긴 몰라도 인기 좀 있을 법한 미형이었다.

유빈은 가장 처음에 받았던 입부 신청서를 떠올렸다. 성이 유, 이름이 한. 장래희망란에 동화 작가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사서 교사에게 듣기로는 도서관에 자주 와서 일을 돕는 모양이었다. 아직 요일 배정이 안됐는데 성실하기도 하지. 그나마 이런 부원들이 있어서 도서관이 아직 굴러가고 있는 것이었다.

"빨리 왔구나. 적당히 자리에 앉아 있어. 다들 오면 시작할테니까."

유빈은 파손된 도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표지는 물론이고 내용도 몇장이 너덜너덜했다. 글자가 있는 부분까지 훼손된 경우도 있었다.

책을 험하게 다뤘다는게 눈에 훤히 보였다. 원래 책을 파손했을 경우 바로 보고하면 어렵지 않게 수리할 수 있다. 대부분은 페이지 끝 부분이 갈라지거나 책이 접히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임을 물어야 할까 두려워 조용히 넘어가는 학생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러면 수리하지 못한 채 여러 사람이 이용하게 되고, 별 것 아니었던 파손 정도가 심각해진 뒤에야 발견된다.

지금 손보고 있는 책이 그런 경우였다. 표지는 구멍까지 뚫려 있었다.

"저. 형. 지금 뭘 하고 계신거에요?"

"응?"

고개를 드니 유한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수서는 부장의 업무라 일반 부원은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신입생인 유한이 신기하게 볼 만 했다.

"수서. 책을 고치는거야."

수서라고 하면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고등학생의 솜씨로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깔끔하게 해도 찢어진 부분을 이어 붙여 책의 형태를 유지시킬 뿐인 조악한 작업에 불과한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해도 학생들의 거친 손을 탄 책들은 더 이상 자료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고, 곧 폐기된다. 유빈은 책을 함부로 다루는 학생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책을 오래 볼 수 있게."

툭. 종이테이프로 보강된 책은 붕대를 감은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유빈은 씁쓸한 기분으로 책의 표지를 쓰다듬었다. 다음에 볼 때면 작별이겠구나.

많이 망가진 책은 자주 대출되는 인기 서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자주 대출되는 만큼 반납된 책을 정리할 때 만나는 일도 빈번했다. 주에 한번 씩 보다보면 책이라도 정은 드는 법이었다.

"신기하네요. 그런 건 처음봐요."

"그렇겠지. 수서는 내 업무니까 서가 정리하다가 파손된 도서가 있으면 이쪽 테이블에 가져다 둬. 당번인 날이나 동아리 시간에 한꺼번에 해결할테니까."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인인 유한은 잰걸음으로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싹싹한 태도에 싱글벙글한 표정, 풍성한 갈색의 곱슬머리.

골든 리트리버?

"되게 인사성 밝네. 개 같다고 하면 기분 나빠하려나?"

순수한 의미로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후배였다. 말 잘듣고 성실한 후배라니, 그래도 세상은 아직 그를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쟤는 목요일로 배치해야겠다."

1학년들은 선착순으로 원하는 요일에 배치되었지만 유한은 아직 신청하지 않았다. 다른 요일에 자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모처럼 일 잘할 것 같은 후배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권력남용이지만 유빈은 신경쓰지 않았다.

물론 부려먹기만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른 요일은 2학년들이 일을 잘 안하기 때문에 유빈과 같은 요일에 일하는 것이 유한에게 있어서도 나은 일이었다.

"선생님. 쟤 목요일 당번으로 정해도 될까요?"

"그래. 되게 열심히 하는 애니까 잘 봐주고."

"옙."

교사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거리낄 것 없었다. 유빈이 손짓하자 한창 떠들고 있던 유한이 다시 달려왔다.

한번 보냈다가 다시 부르니 미안한 느낌도 들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부르셨나요?"

"너 목요일 당번으로 배정됐어."

유빈은 그렇게 통보했다. 갑작스러웠지만 유한은 이유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하늘 같은 선배님과 선생님께서 정하신 일이니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목요일이요. 네, 점심시간에 오면 되는거죠?"

"기본적으로는 점심시간에만 오면 돼. 점심 빨리 먹고 와서 북트럭에 쌓인 책들 정리하고 도서관 시설 관리만 하면 되는데, 이거는 있다가 한번에 설명할 거고."

힐끔 시계를 보니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유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시간은 충분했다.

"애들 불러. 동아리 활동 시작하자."

"네!"

설명하고, 직접 보여주고, 정리 시키고. 그가 엉망진창이라고 평했던 도서관은 점차 봐줄 만한 모습으로 정돈되어갔다. 대충대충 설렁설렁 일하는 것들을 보고 있자니 열이 뻗쳤지만

쉬는 시간에는 찾아온 하늘이와 가볍게 잡담을 주고 받았다. 후배들이 도대체 저 여신은 누군가하며 얼이 빠져있는 바람에 하던거나 마무리하라고 윽박질러야 했다.

계속 갈구다보니 부장=무서운 형으로 각인 된 것 같았지만 상관 없었다. 무서워서라도 일을 똑바로 한다면 충분했다.

"유빈이 형!"

그런데 다른 후배들과는 달리 중간부터 그를 바라보는 유한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정확히 중간의 쉬는 시간을 기점으로 열렬한 관심을 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칭도 어느새 부장 형에서 유빈이 형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대체 뭐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유한의 시선은 서가 정리를 끝나고도 계속되었다. 슬슬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못 본 사이에 팬이 생겼나봐. 축하해."

키득. 동아리가 먼저 끝나서 유빈을 찾아온 시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한쪽 손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마틸다'를 소중하게 들고 있었다.

부원들을 보내고 업무를 마무리하고 있던 유빈에게 그다지 기분 좋은 축하는 아니었다. 다 알면서 놀리는게 분명했다.

"팬은 무슨."

"뭘 했길래 연하 남자애의 하트를 꽉 잡은거야?"

"저기요, 표현 좀 자제해 주시겠습니까."

양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리는게 명절에 만나는 삼촌과 겹쳐 보였다. 만날 때마다 여자친구 사귀었냐고 물어보는 바로 그분. 분명히 말하자면 유빈은 모태솔로였고 대답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애초에 그는 이성애자였다. 남자 후배와의 염문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딱히 한게 없어서 이해가 안가. 평소대로 정리 좀 시킨 거 말고는 없었단 말이야."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

대화를 나눈 것도 활동 전에 수서에 대해 가르쳐 준 것 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유빈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쉬는 시간에 모르겠다는 문제 좀 가르쳐 줬지만 그거야 항상 하는 일이잖아?"

"그 외에는?"

"책 정리랑 대출반납 처리 가르쳐주고, 신문 교체하는거 보여주고, 자잘한 팁 같은거 좀 알려줬는데."

"흐응."

별거 안 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어보였다. 하지만 시아는 굳이 지적해 주지 않았다. 유빈 입장에서는 정말로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유한이 그를 뜨겁게 응시할 이유로는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유가 어찌됐든 후배한테 존경 받는건 잘 된 일이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아. 혹시 그건가?"

유빈은 설마하는 심정으로 가방을 챙기고 있던 유한을 불렀다. 친구들은 이미 다 갔는데 유빈에게 할 말이 있는지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초면인 시아에게 인사부터 한 그가 힐끔 힐끔 유빈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물어보고 싶은거 있어?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던데."

"아! 죄, 죄송합니다. 티 났나요?"

"엄청."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듯 두 손으로 뺨을 문지르다가 우물쭈물하면서 눈을 치떴다. 금발에 가까운 갈색 머리칼 아래로 순진한 눈망울이 반짝였다.

일부 계층에게 대단히 인기를 모을 수 있을 것 같은 모습. 옆에서 시아가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올려다보기. 남자가 이렇게 소화할 수 있을 줄이야."

유빈은 순간 무슨 스킬 같은거냐고 물어볼 뻔 했지만 입을 꾹 닫았다. 안 그래도 수줍어하면서 말을 못하고 있는 후배를 위함이었다.

잠시 후 용기를 낸 유한은 고개를 푹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아까 쉬는 시간에 오신 친구분, 혹시 남자친구가 있으신가요?"

Pardon?

쉬는 시간에 온 친구라면 한명 뿐이었다. 유빈은 탄식을 금치 못하고 눈가를 덮었다.

"어리석은 불나방이 하나 더..."

"네?"

"힘내!"

"네?"

유빈과 시아의 반응에 당황한 그는 눈만 끔뻑거렸다. 도대체 이런 반응이 왜 나오는거지?

"일단. 남자친구는 없어. 근데 걔 이름은 알아?"

"네. 친구들이 김하늘 선배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그래. 아까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아, 아니요! 아니에요! 그냥 저는 되게 예쁜 누나라는 생각에 궁금해져서!"

"결국 반했다는 소리잖아."

유한은 손사래를 쳤지만 태도에서 이미 명백했다.

"...목요일 당번 성실히 나와라."

"옙."

"내가 당번일 때 자주 놀러오니까 소개는 시켜준다. 그 이상은 바라지 마."

"아, 네! 감사합니다!"

순식간에 만개하는 웃음꽃에 유빈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래, 소개 하는 것 뿐인데 뭔 일이 생기겠어. 옆에서 시아는 '골든 리트리버...'라고 중얼거렸다. 똑같은 걸 생각한 모양이었다.

몇번이고 감사를 표한 유한은 인사를 하고서는 나는 듯이 도서관을 나섰다. 감정대로 행동에 드러나는게 정말이지 개 같은 후배였다.

"괜찮겠어?"

"안 괜찮을 것도 없잖아. 말 그대로 소개할 뿐이야. 나머지는 알아서 할 일이지."

가방을 맨 그가 흐뭇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지켜보던 교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서 교사는 잘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계단을 내려가 출입문을 지나다가 시아가 두 손을 짝 부딪혔다.

"아, 맞아. 나도 물어볼 것 있었어."

"뭔데?"

그녀는 성큼성큼 걷더니 그의 앞에 서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가지런한 단발이 찰랑거리며 흘러내렸다.

마침 지는 태양이 그녀의 머리 위에 있어서 눈이 부셨다.

"귀여운 옷이랑 청순한 옷, 그리고 캐쥬얼한 옷이 있으면 뭐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아?"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됐으니까. 어때?"

의도는 말하지 않은채 시아가 계속 그를 재촉했다. 애초에 옷도 종류가 천차만별인데 저런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유빈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백날 고민한들 남의 속을 다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캐쥬얼한 옷."

"그래?"

점짓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 유빈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으면서도 말을 이었다.

"귀여운 거야 평소에도 의식해서 입고 다니잖아. 뭔진 모르겠지만 새로운 걸 입어보는건 어떨까, 해서."

늘어놓고 보니 쓸데 없이 길게 말했나 싶었다. 그래서 결국 한마디 덧붙였다.

"흘려 들어."

"풋. 내가 물어봤는데 흘려 들을 리 없잖아. 아무튼 알았어."

어쩐지 시아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기대되는 일이라도 있는건지 가벼운 허밍과 함께 리듬에 맞춰서 걷기 시작했다. 유빈은 굳이 묻지 않았다.

그래, 행복하면 됐지.

"오늘 시간 있어?"

"없지."

"그럴 줄 알았어."

내일은 농구 약속이 있는 날이니 숙제를 끝내둬야 했다. 벌써부터 지칠 것 같아 우울해하는 유빈의 뒤를 따르면서, 시아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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