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우는 녀석, 웃는 녀석, 웃는 녀석, 웃는 녀석
* * *
[정말 안되냐?]
"어. 숙제 남은게 꽤 많거든. 내일 학원 가기 전에 끝내야 해."
[너도 참 불쌍하게 산다.]
불쌍하게 산다. 진우가 유빈에게 자주 하는 말이었다. 마음대로 놀지도 못하고 공부에 매몰되어 살고 있는게 그의 눈에는 퍽 불쌍해 보인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유빈은 그 말이 듣기 싫었다. 진우가 놀면서 자신의 연애사업에 시간을 쓰는 만큼 자신은 공부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방향이 다를 뿐 동정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스스로를 비참하게 느낀 것은 진우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별개로 그 선택이 자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태풍이 와도 목숨을 걸고 학원을 가고, 지진이 일어나도 학교 안에서 자습을 하는 그런 인생을. 그는 선택한 적이 없었다.
그의 인생에서 그가 선택하고 성취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까지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열심히 해라.]
"그래, 잘 놀아라."
전화를 끊은 유빈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고작 몇마디 대화했는데 기분이 나빠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화를 받지 말 걸 그랬다.
집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순탄했지만 그 속은 새까맣게 타고 있었다.
달리는 지하철 안. 손잡이에 몸을 맡기고 서 있든 유빈이 다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집으로 가고 있다는 보고를 해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어머니? 지금 집으로 가는 길이에요. 네, 그냥 집 가려고요. 네, 네."
그냥 자고 싶다.
그 말은 결국 입 안에서만 맴돌다 사라졌다. 지하철에는 자리가 없었다. 앉아서 졸 수도 없으니 그는 꼼짝없이 깨어 있어야 했다.
텅 비어버린 머리로 돌릴 곳 없는 스트레스를 곱씹던 그는 다시 울리는 휴대전화에 인상을 찡그렸다.
어머니인가?
그러나 화면에는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표시되어 있었다.
어쩌면 담임 교사보다 오랜 시간을 교류했을지 모르는 사서 교사였다. 저장은 했어도 지금까지 쓰이지 않았던 연락처. 예상하지 못한 경우였다.
"...여보세요? 선생님?"
[유빈이 맞지? 지금 통화 가능하니?]
"네. 괜찮습니다. 무슨 일 있나요?"
[이번에 들어온 애들한테 업무를 가르쳐 줘야 하는데, 혹시 다음 주는 일주일 동안 점심시간에 와줄 수 있을까?]
도서부원의 업무는 요일 당번제였다. 자신이 맡은 요일에 도서관에 가서 서가와 시설을 정리하는 것이 주 업무로 그렇게 복잡하거나 어려운 일은 없었다.
"원래 각 요일 2학년들이 1학년들을 가르치기로 하지 않았나요?"
[원래 그랬는데 자기 담당 요일에 안 오는 애들이나 서가 정리를 잘 못하는 애들이 많아서... 네가 한번 가르쳐 주는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
"일주일..."
점심 시간은 주로 숙제에 투자하기 때문에 일주일이나 날아가는 것은 부담이 컸다. 유빈은 다른 도서부원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일 좀 해라 망할 새끼들아.
"혹시 내일 동아리 시간에 한번에 가르쳐 주는 건 안될까요?"
[괜찮겠니? 동아리 시간에 할 일이 너무 많아지는 것 같은데 안 힘들겠어?]
"괜찮아요. 그럼 내일 한꺼번에 교육할게요."
일이 늘었다. 유빈은 한숨과 함께 힘 없이 고개를 떨궜다.
#
"아우, 싫다. 무슨 소리 하는거야."
시아는 유빈, 민재와 헤어져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진우가 있는 모임을 피하기 위한 구실로 다른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공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죽상이던 유빈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유빈이 없는 그룹 안에서 그녀는 언제나처럼 가면을 꺼내들었다. 표정이 웃은 얼굴로 굳어지면서 가슴 한켠이 꽉 조여왔다. 그것은 답답한 감각과 함께 보호구를 입은 것 같은, 안전 벨트를 찬 것 같은 안심감을 주었다.
"그런거 아니라니까아. 정말."
"에이, 또 그런다. 다 보인다니까?"
별 것 아닌 화제에 깔깔 웃음이 터진다. 지금 왜 웃는지도 모른채 시아도 같이 웃었다.
적당한 카페에 들어가서 있는대로 수다를 떠는데 지나보면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 무가치한 대화가 그녀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은 즐겁고 편했던 도서관에서의 기억. 온갖 질문에 귀찮아 하면서도 티내지 않고 받아주던 유빈.
그녀는 눈 앞에서 오가는 생산성 없는 이야기보다 자신에게 집중했다. 소심하고 귀엽게 맞장구 치는 자신의 외면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지켜보았다.
쓰고 있는 가면은 사실 완벽하다고 자부할 정도로 견고하고 깔끔했다. 단순한 대화로는 간파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그만큼 그녀가 자신을 숨기고 살아온 시간은 길었다.
마치 제 3자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줄곧 고민해 왔던 것에 결론을 내렸다.
이 정도면 해볼만 하다고.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지금까지 지겹게만 느껴졌던 이런 연기도 써먹을 데가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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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가 문젤까.
쪼로록, 민재는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마시면서 턱을 괴었다.
역 근처의 어느 카페. 먼저 있던 모임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이 세 명이 남아있었다.
자주 놀 수 없는 유빈과 다른 약속 때문에 불참한 시아를 빼면 학교에서 만나는 그 인원 그대로였다. 알고 지낸지도 꽤 지났고 서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대화는 끊김없이 이어졌다.
주로 하는 게임의 정보, 학교에서 있었던 일, 가족과의 마찰, 곧 먹을 저녁. 이어지는 주고 받음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낄 정도로 진우와 하늘의 이야기는 막힘이 없었다.
이럴 때 보면 참 사이가 좋아 보이는데.
"너는?"
"응?"
"뭘 멍때리고 있냐 새끼야. 저녁 먹고 싶은거 있냐고."
"아, 저녁."
치킨은 점심에 먹었으니 저녁은 담백하게 먹고 싶었다. 민재는 약 3초 정도 고민하다가 엄지를 척 내밀었다. 멋진 미소도 빼먹지 않았다.
"뜨끈한 국밥 어때?"
"꺼져! 아저씨냐 너는!"
국밥 맛있는데. 저녁으로 국밥 먹는게 뭐 어때서.
국밥을 정말 좋아하는 그는 시무룩해졌다. 아저씨라는 말도 묘하게 상처를 줬다. 입이 걸다는 것 정도야 잘 알고 있었지만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진우는 그런 그를 신경도 쓰지 않고 묵살했다. 그의 기준에서 국밥은 있을 수 없는 선택지였다. 그가 고려해야 하는 상대는 여기서 한명 뿐이었다.
"치킨 어때?"
"점심에 먹었어."
"그럼 적당히 분식집이나 가. 하늘이 너는? 분식집 괜찮아?"
"응. 상관 없어. 어차피 많이 안 먹으니까."
진우는 계속해서 하늘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그랬다. 민재가 대화에 끼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두 사람의 대화가 기본적으로 진우가 묻고 하늘이가 답하는 형태인 까닭이었다.
어떻게든 더 친해지려고. 어떻게든 더 마음을 사려고. 날 봐달라고. 그런 마음이 뻔히 보였다.
비유하자면 텅 빈 무대 위에서 탭댄스를 추면서 두 팔을 흔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워낙 적나라하게 보여서 하늘이가 선을 그으려고 하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고백을 거절하면서 친구로 지내자고 한건 네가 아니었냐고. 진우는 그 말을 자신이 들이대도 괜찮은 허가라도 되는 양 내세우곤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런 모습을 자신보다 잘 알고 있었을 유빈은 정작 아니라는 진우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진우와 친한 유빈만이 진우의 진심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민재를 통해 알게 되긴 했지만 그게 또 잘 된 일은 아니었다. 유빈은 배신감에 이를 갈아야 했으니까.
"넌 좀 먹어라. 이거 봐, 삐쩍 말라가지고."
툭 툭. 팔을 치는데 가볍지 않고 날카로워서 되게 아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파!"
"이정도 가지고 엄살은."
진우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스킨쉽은 그에게 남모를 유쾌함을 가져다 주었다. 스킨쉽보다 폭력에 가까웠지만 그걸 지적할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사랑을 하는 이 나이대 남학생이란 대체로 징그러운 부분이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진우의 사랑은 개중에서도 끈적끈적하고 거무스름한 편이었다.
"이씨!"
"어쭈!"
자기 딴에는 복수랍시고 휘두르는 주먹이었지만 진우 입장에서는 별로 맞은 느낌도 들지 않았다. 가볍게 주먹을 잡아 채니까 팔을 이리저리 당기지만, 어림도 없었다. 짓궂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하늘이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 새끼가 또?
무슨 일만 있으면 자신을 놀리는 놈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자자, 더 힘 줘봐. 그렇지!"
"아, 짜증나!"
민재가 주변을 스윽 살폈다. 점원은 이쪽을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옆 테이블의 아주머니들이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아 쪽팔려.
일단 그는 말리려는 시도라도 해 보기로 했다.
"저기요. 두 분. 들리십니까?"
"아! 야, 아프잖아. 난 두대 밖에 안 쳤는데 지금 몇번을 때리는거야?"
"졸라 아팠단 말이야! 넌 힘 좀 빼고 살아 새끼야!"
진우는 사이좋게 투닥거리는 커플을 생각하고 있었고, 하늘은 서로 치고 받는 살떨리는 전투를 생각하고 있었다. 민재가 작게 불러 보았지만 망상과 분노에 점칠된 두 사람에게는 닿지 않았다.
할 수 없지.
그는 조용히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다. 이곳에서 버티고 있기에는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두 사람 사이에 끼기도 싫었다.
이게 그와 유빈의 차이점이었다. 말리느냐, 말리지 않느냐의 차이. 과격한 진우와 히스테릭한 부분이 있는 하늘을 상대로 그렇게 나설 수 있는 건 둘 모두와 친한 유빈이 뿐이었다.
혹은 그렇게 나설 수 있기 때문에 두루 친해진 것일지도. 민재는 화장실로 가는 통로 벽에 기대고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치즈."
각도를 조절해 사진 한장. 브이자를 그리고 있는 그의 뒤 쪽으로 진우의 멱살을 잡은 하늘이의 모습이 깔끔하게 찍혔다.
올리는 곳은 시아, 민재, 유빈이가 모인 단체 대화방. 민재는 긴말 없이 사진과 함께 한마디 했다.
[팝콘^^]
반응은 불보듯 뻔했다. 한 명은 한탄할 것이고 다른 한 명은 조소하겠지. 아무튼 이 상황을 공유하는 것이 두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대화방은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정확히는 유빈을 돕기 위해서.
보고를 마친 민재가 자리로 돌아가자 상황은 정리되어 있었다. 싸움은 멈췄지만 여전히 씩씩거리는 하늘이와 어쩐지 기분 좋아보이는 진우의 대비가 극명했다.
"화장실 갔었냐?"
"어."
오늘도 하나의 추억을 쌓았다, 조금 더 친해졌다. 하늘이에게 자신의 기억을 하나 더 남겼다.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것이 연애적인 호감으로 발전할 일은 없는 종류의 감정이라는 걸 모르는 채로.
민재는 그런 진우가 참으로 안쓰러웠다. 삽질도 정도껏 해야 웃어넘기지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으면 불쌍할 지경이다.
그리고 그런 삽질에 피와 살이 파이는 하늘이에 대해서는 그냥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녀는 가로막는 걸 모조리 무시하고 다가오는 진우에게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거절하고 거리를 두려고 해도 상대는 그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불쾌나 혐오보다 공포를 느끼고 있는 시점에서 한 발짝 잘못 디디면 범죄였다.
사실 가장 근본적인 마찰의 원인은 그 부분이었다. 서로가 원하는 거리감이 다르다는 것. 진우는 허물없고 보다 친근한 사이가 되길 원했지만 하늘이는 그런 것을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애초에 접근법 부터가 글러먹었다. 고백을 하고 친해지는게 아니라 충분히 친해지고, 호감을 쌓은 다음에 고백을 했어야지.
고백이란 관계의 확인 작업이다. 그게 민재가 내리는 고백의 정의였다.
고백부터 시작되는 연애는 픽션 속의 이야기들 뿐이다. 민재가 보기에 진우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이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니 잘 될리가 있나.
"그게 재밌는거지!"
"응? 뭐?"
"아무것도 아니야."
무심코 내뱉어 버렸지만 싱긋 미소로 무마했다. 진우는 하늘이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넘어갔다.
당사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이 관계가 어떻게 파국으로 치달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민재도, 시아도, 유빈 마저도. 제 3자 입장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파국 이외의 결말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단지 언제 이 위태로운 관계가 끝날지는 알 수 없었다. 계기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 아닌가.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계기는 운석과 같이 찾아올 것이라는 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