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네가 혼자가 아닌게 기뻐
* * *
"미안 미안, 빨리 안가면 자리가 없을 것 같아서 조급했었어."
"그렇다고 그냥 두고 쌩 가버리냐."
"대신 이렇게 자리도 잡았잖아! 그러니까, 응?"
"그래. 그거 하나는 다행이다."
테이블마다 사람이 가득한 점심시간의 치킨집. 재빠르게 모 프랜차이즈 치킨집에 직행한 민재는 적당한 4인좌석 하나를 잡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치는 가게마다 자리가 없었던 걸 생각해 보면 먼저 자리를 잡은 건 잘된 일이었다.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뛰쳐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뛰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뭐 먹을래?"
"너랑 나는 한마리 씩 먹는다 치고. 시아는?"
"난 별로 안 먹으니까 적당히 시킬게. 한 두 조각만 줘."
"그래. 난 양념으로 할게."
"여기, 주문이요!"
다행히 가격은 그렇게 비싸지 않았다. 비싸지는 않았지만 유빈에게 있어서는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속으로 잔액을 헤아리던 유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잘 가라, 내 여윳돈. 이제와서 다른 걸 먹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 맞아. 주말에 무슨 약속 있어?"
"나? 토요일에 진우가 농구하자고 해서 나가기로 했는데. 왜?"
"아, 진짜?"
저번 주부터 끈덕지게 놀자고 보채길래 한번 같이 농구를 하기로 약속했었다.
"농구를 좋아하기는 하니까. 재미있고, 운동도 할 겸. 너도 할래?"
평소에는 지치니까 잘 하려고 하지 않지만 될 때까지 물어보겠다며 옆에서 꿍얼거리는 진우는 지치는 것 이상으로 짜증났다.
"농구 할 생각 없어. 그럼 토요일은 안되겠네."
"뭔데."
"그냥 카페나 피씨방이라도 가겠냐고 물어보려 했지."
"카페는 모르겠지만 피씨방은 농구하고 가도 되잖아."
"괜찮아? 또 어머니한테 한소리 듣는거 아니야?"
"농구하러 나간다고만 말하면 되지. "
어차피 이런 때 아니면 게임할 기회도 없었다. 돈은 또 부족해 지겠지만 당장 놀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평일은 집, 학교, 학원을 계속해서 순회할 뿐이고 주말은 주말대로 학원 숙제와 시험 공부로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 쉬는 날을 만든다고 해도 주말 중 하루 뿐이고 그 하루 마저도 집에서는 게임을 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고등학생인 그는 놀 기회를 그냥 날릴 생각이 없었다.
"오전에 농구하고 점심은 대충 때운 다음에 피씨방 가서 놀다가 해산. 그러면 되겠지. 진우도 피씨방 갈지 물어볼까?"
그리고 그 후, 한달 동안은 놀 수 없다. 돈이 없으니까. 어차피 그 때는 본격적인 시험 기간이라 돈이 있어도 놀 수는 없을 것이다.
"토요일..."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있던 시아가 무심코 한마디를 흘렸다. 토요일. 그녀가 영화 '마틸다'를 보러 가기로 한 날과 같은 날이었다.
"응?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도서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고 들었을 때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말 정도는 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물어보진 않았다.
설마 선약이 있었을 줄이야. 들이대고 보는 진우가 먼저 약속을 받아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쩐지 속이 쓰렸다. 진우 따위는 내버려 두고 자신과 같이 가자고 해도 유빈이라면 고개를 저을 것이 분명했다.
약속은 약속이라고. 그 상대가 아무리 무심하고 야속한 '절친'이라고 해도 그는 그것을 이유로 약속을 어기거나 취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걔보단 내가 더 낫잖아!
도대체 무엇에 대한 질투인지도 모르겠는 채 시아는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높았던 진우에 대한 적대심이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태평하게 떠드는 유빈과 민재.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치킨과 감자튀김이 나왔다.
"주문하신 후라이드 하나, 양념 하나, 감자튀김 중(中)자 하나입니다."
감자튀김은 시아가 시켰지만 3명이 나눠 먹을 생각으로 중간 크기를 시켰다. 원래 여럿이서 먹으라고 만드는 메뉴라 충분한 양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튀김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진하게 풍기면서 시선을 끌어 모았다.
"프렌차이즈 치고는 양이 양심적인데?"
"이정도면 훌륭한 가성비지. 기억해 뒀다가 이 근처 올 일 있으면 또 와야겠다."
"과연 우리가 그럴 일이 있을까?"
"괜찮은 음식점을 기억해 뒀다고 손해 볼 건 없잖아."
그런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타는 속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던 그녀는 결국 유빈과 민재의 접시에 시선을 향했다. 아직 손도 안 댄 따끈따끈한 치킨 중에서 거칠게 한 조각씩을 채갔다. 워낙 자연스러우면서도 순식간이어서 막거나 말릴 겨를도 없었다.
물론 한 조각 정도도 못 줄 정도로 두 사람이 매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시아는 악독하게도 가장 중요한 부위를 골랐다.
덥썩.
"어, 잠깐만!"
"아!"
두 사람에게는 안타깝게도 그 두 조각은 모두 다리였고, 시아는 두 남학생의 허망한 신음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닭다리를 뜯었다. 호쾌하게 씹은 살코기가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자 눈을 확 치켜뜬 그녀가 언제나 신경 쓰던 '귀여움'이라는 필터도 집어 던지고 차갑게 웃었다.
"왜. 너네도 감자튀김 먹고 싶은 만큼 먹어. 아니면 불만이라도 있어?"
"아니요..."
퉁명스럽게 그런 말을 내뱉는게 어쩐지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아 보여서 항의하기도 무서웠다. 우물거리는 작은 입 속으로 사라져가는 닭다리를 보며 두 남자는 눈물을 머금을 뿐이었다.
아까 까지만 해도 기분 좋아 보였는데 어째서.
착각한거 아니야? 되게 날카로워 보이잖아.
그럴지도 몰라.
가련하게 서로를 붙잡고 떠는 남학생들. 그들로서는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바들바들 공포에 질려있는 그들을 한번 흘겨보고, 시아는 눈꼬리를 씰룩였다. 남의 속도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니까 더 기분이 나빴다. 평소에는 쓸데없을 정도로 눈치가 빠르면서 이런 건 또 알아채지 못한다.
물론 유빈으로서는 알 수 있는 단서가 아무것도 없었으니 단순한 트집을 잡는 것에 불과했다.
"뭐해. 안먹어?"
"아, 예."
그제서야 그들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금슬금 치킨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야 한 구석에 밀어 넣으면서 시아는 복잡한 기분을 원동력 삼아 생각을 정리했다.
토요일, 약속, 임진우, 전민재, 그리고 자신.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의 친구는 역시 유빈 뿐이고 그녀가 진우를 배려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그랬다. 민재야 둘째 쳐도 그 썩을 스포츠맨이 상대라면 그런 약속 때문에 자신이 물러설 필요는 없었다.
유빈은 어지간하면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약속을 지키기만 한다면 크게 유빈의 반감을 살 일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시아는 표정을 좀 누그러트리고 물었다. 질투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상당히 가라앉은 덕에 평정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빈아. 약속이 토요일 언제인데?"
유빈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숨길 이유도 없었다.
"10시 쯤에 학교 운동장에서 보기로 했어. 농구하다가 점심 먹고 1시면 피씨방으로 가지 않을까?"
"흐응."
"왜?"
"그냥 궁금해서. 그렇구나, 1시라고."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토요일 1시'를 기억해 두기로 했다. 그러는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보고있던 민재는 차마 보이진 못하고 마음 속으로만 혀를 내둘렀다. 토요일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벌써부터 알 것 같은 기분이 든 탓이었다.
그래도 그 이후로는 다시 시아의 기분이 풀려서 평화로운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넌 재밌는 책 찾았어? 책 고르러 돌아다닐 때 한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처음 시아에게 추천할 책을 가지러 서가를 한바퀴 돌았을 때 민재를 마주친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지간히 빠르게 책을 골라서 읽고 있었거나 서가를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거나, 자료실 밖으로 나갔거나, 이 셋 중 하나였다.
민재는 잘 물어봤다는 듯이 씩 웃었다. 입가에는 양념이 묻어 있었다.
"나야 소설책 하나 골라서 일찌감치 앉아있었지. 전부터 읽으려고 했었던게 있더라고."
"어떤 소설인데?"
시아가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그런 그녀가 의외라는 듯이 점짓 놀란 표정을 지은 민재는 곧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꺼냈다.
원래 소설에 대한 관심이 많은 민재로서는 이런 물음이 기꺼울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알아듣기 쉽게 자신이 고른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와 중요한 점을 설명해 나갔다.
유빈이 사이 사이에 짧은 설명을 더하고 시아는 다 알아듣지 못해도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귀를 기울였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세 명은 곧 다소 험악했던 분위기를 잊어버리고 편하게 떠들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각자 접시를 반 정도 비웠을 무렵 민재가 새삼스러운 의문을 떠올렸다.
"응?"
"왜 안 숨기고 있는거야? 그..."
그는 내숭이라고 말하려 했으니 어쩐지 좋은 단어는 아닌 것 같아 말을 흐렸다.
말을 이은 것은 유빈이었다.
"본성?"
그것도 좋은 단어는 아닌 것 같았지만 민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민재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본성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묘하게 들렸다.
"아무튼 평소에는 귀엽게 보이려고 한다고 할까... 되게 꾸며내고 있지 않았어?"
그는 최대한 포장해서 질문했다. 그러면서도 기분을 상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계속해서 시아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혹시나 지뢰를 밟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것이 뻔히 보였다.
민재의 입장에서 평소 교실에서 보는 시아의 모습과 이번 체험학습에서 겪은 시아의 모습은 그 차이가 매우 컸다. 성격을 숨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 이런 모습이 놀랍지는 않지만, 자신한테 여과 없이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유가 궁금했다.
질문을 받은 당사자는 어쩐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씹던 감자튀김을 삼키고 음료를 들이켰다. 어딘가 해탈한 듯한, 무엇인가 많은 것을 내려 놓은 듯한 태도였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거."
척, 시아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낮고 진지한 목소리 밑바닥에는 쌓인 불만과 스트레스가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되게 지치거든? 항상 귀여운 척 하고 있는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네가 내 본래 성격을 대충 알고 있다는 건 유빈이한테 들었고, 유빈이랑 친하니까 쓸데없이 소문 내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굳이 내숭 떨고 있지 않은거야."
이녀석, 내숭이라고 스스로 말해 버렸잖아.
민재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심하자 옆에서 유빈이 작게 웃었다. 점짓 유쾌해 보이는 웃음에 다른 두 사람의 시선이 이끌렸다.
"왜 웃어?"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 간단히 말해서, 너랑 시아가 나름 친해졌다는 뜻이니까."
"뭐?"
시아가 가당찮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이를 드러냈지만 유빈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하게 웃으면서 두 손을 마주댔다.
"적어도 민재가 소문을 내진 않을 거라고 믿는단 뜻이잖아. 안 그래?"
"너... 어휴."
뭐라고 반박하려던 시아는 이내 포기하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민재가 굳이 다른 사람의 뒷담을 하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분명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밝혀야 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응."
"난 쟤 싫어."
"엑! 왜?"
시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민재는 너무한다며 우는 시늉을 했지만 유빈은 알고 있었다. 저 '싫어'는 진우를 향하는 것에 비하면 애교라고 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을.
"슬슬 돌아갈 시간이네. 빨리 먹고 돌아가자. 2, 3층 봐야지."
"네에."
어쩐지 온화하게 바라보는 유빈의 시선이 뜨뜻미지근하게 느껴진 시아는 원인모를 부끄러움에 재빨리 감자튀김을 쓸어 삼키고 일어났다.
항상 놀리고 장난을 치는 건 자신이지만 이럴 때는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두고 봐.
그녀는 괜히 입술을 비죽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