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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8화 (8/31)

〈 8화 〉 튀긴 것은 대부분 맛있다

* * *

"시아."

작게 불러 보았지만 시아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완전히 무시 당했으니 기분이 나빠질 만도 한데 유빈은 오히려 작게 웃었다.

시아가 완전히 몰입해서 읽고 있는 건 그가 추천한 책이었으니까.

어떤 책을 추천했든 나중에 물어보면 재밌었다고 말하겠지만, 부르는 걸 듣지도 못하고 빠져 있는 것을 보면 괜찮은 선택이었던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계속 읽게 해주고 싶지만 민재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었다. 어차피 이곳에는 3시까지 있을 예정이고, 점심을 먹고 2, 3 층을 둘러보고 와도 문제는 없었다.

"시아야."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다시 한번 부르니 그제서야 그녀가 반응했다. 마치 잠에서 깬 듯이 고개를 퍼뜩 든 그녀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가리키는 시간은 11시 55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최대한 읽게 해주고 싶었는데 슬슬 점심 먹으러 가야하는 시간이라서. 갔다 와서 다시 읽어도 되니까 일어나자."

"응."

아쉬운 기색으로 책을 덮은 시아는 달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그럼에도 미련이 남는지 몇번이나 고개를 돌려 책을 응시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아아, 나도 초등학교 때는 저랬었지.

정말로 책이 최고의 친구였던 시절. 읽다가 끊긴 책이 있으면 끝까지 읽을 때 까지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등하굣길에서도 책을 읽곤 했다. 유빈은 어쩐지 흐뭇한 기분으로 시아의 등을 밀며 재촉했다. 안타깝지만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하는 생물이었다.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빌려가면 어떻게 해? 지금 빌려둘 수는 없어?"

"도서관은 기본적으로 대출증 없이는 못 빌려. 애초에 대출증을 그 지역 주민한테만 만들어주고."

"되게 쪼잔하네, 도서관."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해."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이 책을 빌려갔다가 돌려주지 않는 일이 자주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계속해서 걱정하는 시아의 모습에 결국 유빈이 나섰다.

"우리 학교 도서관이나 근처 도서관에도 있으니까 여기서 다 못 읽으면 거기서 빌려도 돼."

"정말?"

"야, 나 도서부장이야."

그것도 십 수 명이 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사서 교사의 신임을 받는 필두 도서위원이었다.

대출 반납부터 수서(책의 파손을 고침), 서가 정리, 구매한 책들을 등록하는 일까지 도맡아서 해결하는 그가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를 리 없었다.

"없으면 구매 목록에 추가해 줄 테니까 다음 달에는 읽을 수 있을거야. 부장 특권이지."

"우와. 그래도 되는거야?"

"이런거라도 없으면 어떻게 도서부장 해먹냐. 하는 일이 무지 많은데 좋은 점도 있어야지."

학생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의 서비스지만 아는 사람은 적었고 이용하는 사람은 더 적었다.

워낙 신청이 없어서 사서 교사도 그에게 원하는 책이 있다면 마음껏 추가해도 된다고 허락했었다. 유빈이 성실하고 도서관 운영에 지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에 허락받은 일이지만 지금까지는 굳이 이용할 일은 없었다.

주문해 준다고 했지만 원래 로알드 달의 '마틸다'는 도서관에 한권씩은 구비되어 있는 책이다. 학교 도서관에 없어도 집 주변의 도서관이라면 어디든 있을 터였다.

그렇게까지 약속하자 시아는 한결 마음을 놓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응. 재밌어."

'마틸다'는 작가 로알드 달의 특징적인 풍자와 블랙 유머가 많아 연령과 상관없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동화였다.

주인공인 마틸다와 시아가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추천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을 보니 주인공에 대한 동질감 이상으로 그냥 작품 자체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을까?

집안 사정은 자기가 더 시궁창인 주제에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유빈은 정말로 멍청한 걸지도 몰랐다.

"'마틸다'는 영화나 드라마로도 나왔어. 드라마는 몰라도 영화는 찾아보면 볼 수 있을거야."

"정말?"

"분명히 도서관에서 다음주 쯤에 상영하는게 그거였던 것 같은데."

학교 근처에 위치한 동네 도서관에서는 주말마다 고전 영화를 상영했다. 지역 주민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었는데 아직 한번도 가 본 적은 없었다. 오며가며 공지된 내용을 봐서 어떤 영화가 나오는지 알고 있을 뿐.

영화 '마틸다'의 평가가 나쁘지 않다고 어디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가물가물해서 말은 안했지만.

"너도 도서관 회원증 있지? 한번 가 보던가."

"도서관에서 영화도 보여줘?"

"상영하는게 아니어도 DVD 중에 구비된 걸 빌려서 볼 수도 있어. 가지고 집에 가진 못해서 도서관 시설을 써서 봐야 하고."

모르는 사람이나 이용해 본적 없는 사람이 많지만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자료에는 영상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DVD 플레이어도 있어서 신청만 하면 이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도서관은 생각보다 편리하구나. 영화... 한번 가 볼까. 언제 상영해?"

"이번주 토요일. 내 기억이 맞으면 오후 2시에 할텐데 혹시 모르니까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봐."

영화라. 중학교 때까지는 친구들과 자주 보러 갔었지만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별로 간 기억이 없었다.

같이 갈 친구도, 흥미가 가는 영화도 없었으니까.

이제 친구라면 한명 뿐이다. 시아의 시선이 유빈을 향했다. 같이 가자고 해볼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유빈은 바빴다. 주말에라도 쉴 수 있게 해 주는게 좋을 것 같았다.

"아, 민재 저기 있네. 혹시 점심 뭐 먹을지 생각해둔 것 있어?"

"난 뭐든 괜찮아."

"그게 제일 결정하기 힘든거 알잖아. 나도 딱히 먹고 싶은 건 없는데."

때 마침 입구에 서서 기다리던 민재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맘 편히 혼자 돌아다닌게 즐거웠는지 옅은 미소도 걸려 있었다. 시아를 상대하는 것을 맡기고 사라지더니. 유빈은 등짝을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한번 물어보자. 야, 민재! 너 뭐 먹고 싶은거 있어?"

거리가 좀 있었던 민재는 주변 사람이 다 들을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대답했다. 주위의 시선이 한순간에 쏠렸는데 신경도 쓰지 않는게 철면피의 두께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치킨!"

"그럴 줄 알았다."

물론 반대 의견은 없었다. 대부분의 음식은 튀기면 맛있고 닭은 튀기는 것으로 완벽해진다. 이것 만큼은 세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오는 길에 치킨집 봐둔게 있어. 별로 안 머니까 금방 갔다 올 수 있을거야."

"철저하네. 원래 먹을 생각이었어어?"

"당연하지!"

오늘 들어 가장 활기찬 민재의 목소리. 유빈과 시아가 반대하지 않자 신이 나서는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단지 앞설 뿐만이 아니라 들뜬 걸음에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그걸 보던 시아는 조용히 혀를 찼다. 민재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유빈에게는 똑똑히 들릴 정도의 절묘한 조절이었다.

"쯧."

유빈은 마른 웃음과 함께 어께를 축 늘어트렸다. '마틸다'를 읽으면서 기분이 좀 풀렸나 싶었는데 여전히 민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어허. 속마음 튀어 나온다. 그러지 마."

"네에."

대답은 했지만 별로 받아들인 것 같진 않았다.

"너무 민재를 밉게 보진 말어. 성격도 착한 애잖아."

"나도 좋게 생각해 보려고 했어."

가만 생각해 보면 민재가 유빈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일은 없었다. 평소에 호구라고 놀리면서도 오히려 도움을 주는 편이었다.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진우에 비하면 백 배는 나았다.

그렇지만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내는 시어머니보다 옆에서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잖아. 그런 거야."

"그런거면 내가 화 내야지, 왜 네가 그래."

"네가 화를 안 내니까 내가 대신하는 거야."

"너도 참."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적극적으로 화를 내는 시아의 모습에 유빈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비웃거나 놀리는 기색은 전혀 없는 너털웃음.

대신 화를 낸다니.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돕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전해졌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야."

도서관 입구를 지나자 본격적으로 무더워진 날씨가 두 사람을 반겼다. 햇빛에 눈이 부신지 유빈이 한쪽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날씨가 좋은 걸 기꺼워하고 있는 걸까, 그 입가는 희미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떻게 비뚤어지지 않을 수 있는걸까. 시아는 항상 피곤에 쩔어 있으면서도 어디 하나 모난 곳 없는 친구를 돌이켜 보았다.

자기 사는게 힘들면 누구나 짜증을 내기 쉬워진다. 잠이 부족하면 사람은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항상 졸음과 싸우며 하기 싫은 일을 매일 같이. 누구 하나 털어놓을 사람 없는 스트레스를 꾹꾹 참아가며 인형처럼 살아가는 그.

그가 이렇게 공부를 하게 된 것은 부모님의 의향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시아는 유빈이 왜 그렇게까지 순종적으로 부모를 따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리는 하지 마. 내가 버린 스트레스를 네가 줏어담다가 홧병나면 어떻게 해."

'버린 스트레스'라고?

시아는 묘한 표현에 위화감을 느꼈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보다는 발걸음을 재촉하기 위해 유빈의 등을 툭툭 밀었다.

"피.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해. 이러다가 쟤 놓치겠다."

"대신 화를 낸다는 것도 제법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데. 어, 뭐야. 쟤는 왜 벌써 저기까지 가 있어."

치킨을 향해서 뒤도 안돌아보고 걷고 있는 민재가 이미 자칫하면 잃어버릴 정도로 멀리 가 있었다. 서울의 번화가는 사람도 많아서 점심을 먹으러 나온 인파가 장막처럼 펼쳐져 있었다.

횡단 보도를 두개 쯤 건너, 아지렁이처럼 일렁거리는 민재의 뒤통수를 한차례 쏘아본 유빈이 굳은 얼굴로 결정을 내렸다.

"달리자."

"으엑, 더워질텐데."

"잘못해서 놓쳤다가 이 날씨에 밖을 더 헤매는 것 보다는 나아!"

시아가 질색이라는 표정으로 눈가를 찌푸렸지만 유빈도 뛰고 싶진 않았다. 더위를 잘 타는 그에게 무더운 날씨에서 뛴다는 것은 우회적인 자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시야에서 벗어난 후에 갈림길이라도 지나치면 귀찮은 문제가 된다.

처음 온 거리에서 서로를 찾아 헤매게 되면 시간도 노력도 더 들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뛰어서 땀범벅이 되는 것 따위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 근처 치킨집이 한 둘도 아니고, 빨리 따라 잡아야 해."

고개를 돌려보면 건물 하나당 하나씩은 끓는 기름에 튀겨지는 닭들이 보였다. 저렇게 많은데 전체적으로 장사가 잘 되고 있다는게 서울시 인구의 대단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긴 점심 시간이라 빨리 가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것 같긴 해."

"그걸 따지자면 이미 늦은 것 같은데. 민재가 자리를 잘 잡아두길 빌 수 밖에 없어."

오후로 접어들어가는 시각, 무더운 태양에 땀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두 사람은 곧 비장한 얼굴로 사람의 물결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눈보라를 해치고 나아가는 탐험가와 같았으나 두려움은 없었다.

상상 속 바삭한 치킨의 식감이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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