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7화 (7/31)

〈 7화 〉 책으로 만들어진 오아시스

* * *

결국 민재가 온 것은 20분이 지난 후였다.

"늦었잖아, 장말!"

"미안, 설마 버스가 평소랑은 다른 시간에 지나갈 줄은 몰랐어."

"그려, 담부터는 늦지 마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간 유빈과는 달리 시아는 불퉁한 눈빛으로 쏘아 보고서는 고개를 휙 돌렸다. '사과를 했으니 봐주기는 하겠지만 기분은 상했다.'는 의미였다.

민재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안그래도 평소부터 좋은 인식은 못 줬는데 잘못하면 미운털이 박히게 생겼다. 그래봤자 진우 만큼은 아니겠지만.

"빨리 가자. 잘못하면 늦겠어."

"그래도 시간을 일찍 잡아서 다행이었네. 선생님께 연락도 했으니까 문제는 없을거야."

지하철은 정해진 시간대로 운행하니 더 늦어질 일은 없었다. 의도치 않게 출근 시간대를 지나서 출발하게 되어서인지 지하철 안쪽은 공간이 꽤 여유로웠다.

마침 세 자리가 나란히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 민재와 시아가 사이에 한 칸을 두고 앉았다.

유빈과 눈을 마주친 시아가 은근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옆으로는 가방을 끌어안은 민재가 윙크를 날렸다.

아하, 붙어 앉기 싫다 이거구만.

유빈은 새삼스럽게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느꼈다. 건너 건너 어울리는 친구의 친구라는 인식. 자주 어울린다고 해도 어지간히 본게 아니면 결국 그런 것이다.

둘 모두와 친한 유빈이 가운데에 앉는게 가장 적절하긴 했다. 둘 사이에서 끔찍하게 어색한 공기를 느끼며 유빈은 곰곰히 다시 생각해 보았다. 하늘과 진우가 없으니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속단일지도 모른다.

민재든 시아든 적극적으로 싸우려고 하는 성격은 아니니 큰 문제가 일어날 리 없을텐데, 어쩐지 그는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속이 미식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그러든 말든 태평하게 가방에서 감자칩을 꺼낸 민재가 하나를 슬쩍 내밀었다.

"과자 먹을래?"

"늦게 오는 주제에 그런 건 또 사왔냐?"

"아니. 어제 사 뒀다가 가져온거야."

그걸 챙길 정신이 있었으면 10분만 빨리 나오지. 유빈은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내릴 역까지는 한참 남았으니 이 틈에 자 둘 생각이었다. 뭘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난 됐어. 시아는?"

"그럼 조금만 먹을게."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튼 유빈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지하철 좌석은 딱딱해서 빈말로도 자기 좋다고 할 수 없었지만 사람은 졸리면 어디서든 잘 수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졸린 사람이었다.

말 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아와 가져온 책을 읽는 민재. 둘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없었다. 그 덕분에 유빈은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간헐적으로 몸이 흔들리고 어디 제대로 기댈 수도 없는 의자 위였지만 마음은 편했다. 깨우러 오는 사람도, 잠을 잤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세 사람의 체험학습은 그렇게 고요히 시작되었다.

#

"들어가자."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국어 교사를 만나 출석 체크를 마친 세명. 말이 체험학습이지 사실상 소풍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오후 3시까지 도서관을 자유롭게 구경하는게 전부였다.

"어디부터 갈래?"

"3층까지 있다는데 1층부터 돌면 되지 않을까."

"그럼 대충 1층 자료실에서 시간 떼우다가 점심 먹고오자. 뭐 먹을지는 각자 생각 해둬."

서울의 아파트 단지 근처에 위치한 도서관이라 근처에 다양한 음식점들이 있었다. 적당한 분식점이라도 골라서 들어가면 될 것 같았다.

압장 서서 1층 열람실에 들어간 유빈이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벽을 따라 책을 읽을 수 있게 마련된 의자와 책상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공간이 넓다보니 상당히 많은 좌석이 있었는데 그보다도 중심지에 늘어선 서가가 먼저 눈길을 끌었다. 길게 좌우로 늘어선 서가는 단순히 책이 많다는 것 이상으로 웅장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어우, 되게 넓다."

"우리 동네 도서관보다 좀 더 넓은 것 같은데."

언뜻 보기에도 건물 자체가 컸다. 동네 도서관에 비해 2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이 도서관은 원래 학교였던 건물을 쓴거래. 보니까 확실히 그런 느낌이 나네."

"어쩐지 우리 학교랑 비슷한 느낌이 들더라..."

중앙 현관으로부터 정면에 보이는 좌우 폭이 넓은 계단, 양쪽으로 뻗은 복도, 복도에서 방 안을 볼 수 있는 창문까지. 지금까지 다녀본 학교들과 매우 흡사한 구조였다.

"여기는 1층에 있었을 교무실이나 교실 벽을 뚫어서 만들었겠지. 도서관에 뭐 복잡한 구조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럼 각자 적당히 읽고 싶은거 찾아서 읽다가 12시에 모이자. 그러면 되겠지?"

민재는 잽싸게 울창한 서가의 숲 속으로 사라졌다. 책을 빨리 읽고 싶었는지, 서로 불편해 하는 시아와 거리를 두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유빈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굳이 둘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 이유도 없없다. 싸우지만 않으면 됐다. 울면서 유빈을 찾지 않는게 어딘가.

그런 의미에서 뭐만 있다 하면 그를 찾는 임진우는 정말로 거추장스러웠다.

"그럼 나도 적당히 하나 골라볼까."

평일 오전이라 다른 이용객들은 별로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체험학습을 선택한 다른 학생들은 도서관에 있어야 한다는 규칙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근처 PC방은 때 아닌 호황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성실하게 지키는 건 민재나 유빈 같은 모범생 정도였고, 그 수는 정말 적었다. 시아도 같이 온게 유빈이 아니었다면 다른 친구들 따라서 이미 도서관 밖을 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주변을 순찰하는 교사와 맞닥뜨리지 않기를 빌어줄 뿐이었다.

설렁설렁 눈으로 흝어서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몇 권 고른 유빈은 그대로 자료실을 한바퀴 쭉 돌았다. 앉아서 읽을 장소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창문을 통해 뿌려지는 햇빛과 무겁지 않은 고요함이 그의 기분을 차분하게 감싸주었다. 정적 속에서 자신의 발소리만이 걸음 걸음마다 들려오는, 이 공간에 나 밖에 없다는 느낌.

유빈은 이런 도서관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했다. 그를 결코 혼자 있게 두지 않는 집, 누군가와 부대낄 수 밖에 없는 학교와는 달리 이곳은 오롯이 그 자신의 시간을 보장해 주니까.

책을 좋아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책에 빠져 있을 때 만큼은 힘든 현실도, 토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감정도 잊을 수 있었으니까. 소리를 지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으니까.

아주 어렸을 때는 축구나 태권도,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활동으로 발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후로는 공부를 해야한다는 이유로 모조리 그만 둬야 했다. 물론 어머니의 지시였다. 그의 의견은 듣지도 않았으니 정확히는 명령이라고 하는게 옳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에게 남은 도피처라곤 활자로 이루어진 책 속의 세계 뿐이었다.

멍하니 걷던 유빈은 문득 들리는 발소리가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민재는 저 어딘가로 사라졌으니 그를 따라올 사람은 시아 뿐이었다.

"왜 그래? 별로 책 읽을 생각이 안들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묻자 놀랐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서는 것이 느껴졌다. 조용히 따라오고 있어서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몸을 슬쩍 돌리자 두 손을 모으고 입을 꾹 닫고 있는 시아가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시아는 대꾸도 없이 유빈을 바라보았다. 오늘 들어 두번째로 보는 묘한 태도였다. 그렇게 잠시동안 아무 말 없이 눈을 마주치고 있던 그녀는 대뜸 물었다.

"넌 도서관을 좋아한다고 했지. 왜야?"

"집이랑은 다르게 혼자 있을 수 있으니까. 나를 신경쓰는 사람도 없고."

"그럼 내가 같이 있으면 방해가 될까?"

"아니, 상관 없어.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건 날 감시하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였고."

여기서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머니의 감시가 없다'는 의미였다. 시아가 있다고 방해가 될 일은 없었다.

시아는 그를 충분히 배려해주는 편이었으니 옆에 있다고 해서 불편하진 않았다.

"혹시 재밌는 책을 추천해 줄 수 있을까? 평소에 책은 잘 안 읽어서..."

"알았어. 몇 권 골라줄테니까 좋아하는 종류를 말해봐."

"그냥 소설이면 돼. 장르는 상관 없으니까 읽기 쉬운걸로."

유빈은 소설들이 비치된 서가로 가 고민 없이 두 권을 꺼내들었다. 고민에서 선택까지 몇 초 걸리지도 않았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작품들이었다. 동화풍의 판타지 소설로 몇번이고 다시 읽은 적이 있었다.

"되게 거침없네."

"자. 이거 두 권이면 충분할거야."

"소설이지? 어떤 내용이야?"

"반쯤은 동화인데 하나는 기관차를 타고 모험하는 내용. 다른 하나는..."

다소 두꺼운,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에 다 읽을 수 있을 리 없는 분량의 소설. 제목은 '마틸다'. 동화 작가인 로알드 달의 대표작 중 하나였다.

굳이 그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천재 소녀가 초능력을 써서 행복해지는 내용... 이라고 할 수 있어."

"초능력을 써서 행복해져?"

"궁금하면 읽어봐. 마음에 안 들면 말하고. 다른 소설을 찾아줄게."

싱글거리며 의자 하나를 당겨 앉는 유빈.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건 그에게 즐거운 일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뒤로 그의 어머니는 독서조차 제한했으니 그는 언제나 책에 굶주려 있었다.

얼마만에 맘 편히 읽는 책인가. 학교 도서관에서 일하는 틈틈히 읽곤 하지만 업무를 우선해야 하는데다가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완전히 몰입한 그를 힐끔거리던 시아는 조용히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유빈이 뽑아준 두 권의 책,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마틸다'. 둘 모두 동화라고 말한 것 치고는 두꺼운 편이었다.

유빈은 책을 읽는 속도가 워낙 빨라 이 정도면 2시간 안에 다 읽는다고 말하지만 시아에게는 무리였다. 잠시 고민하던 시아는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를 옆에 내려놓고 마틸다를 펼쳤다.

초능력을 써서 천재 소녀가 행복해지는 이야기. 유빈은 그렇게 말했다. 시아가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그녀의 어떠한 사정을 알고 있는 유빈이라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위로, 혹은 격려. 너도 행복해질 수 있을거야. 그런 의미를 담아 골랐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시아는 굳이 유빈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의도했든 아니든 변하는 것은 없으니까. 유빈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만 했고, 아니라면 단지 재미 있을만한 소설을 추천해 줬을 뿐이었다.

어린아이가 크래파스로 그린 것 같은 삽화. 동화를 읽는 것은 얼마만일까. 적어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는 오래 되었다. 겨우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뿐인데 눈에 보일 정도로 즐거워 하던 유빈. 그렇게 책이 좋은 걸까.

표지에 그려진 그림을 가볍게 쓸어내린 그녀는 천천히 겉장을 넘겼다.

평소라면 손도 대지 않았을 두께의 책이지만 괜찮았다. 아직 점심 시간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으니까.

도서관 내부의 공기는 건조하고 쾌적했다. 떠드는 사람은 없었고 들리는 것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때때로 웃는 유빈의 웃음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억누른, 바로 옆에 앉아 있어서 들을 수 있는 웃음소리.

시아는 그 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들었다. 창가에서 흘러내리는 빛을 스탠드 삼아. 눈가를 무겁게 누르는 다크써클도 이 순간에는 없는 듯이. 코 끝에 걸린 안경을 통해 글자를 따라가는 유빈.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을 뿐인데 마치 지금까지는 죽어 있었다는 듯이 청량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네."

나지막하게 흘린 한 마디. 작게 말했는데 몰입해 있으면서도 유빈이는 그걸 또 듣고 대답했다.

"이 책, 재밌어."

고개를 한번 흔든 시아는 다시 소설에 눈길을 돌렸다.

"나도 집중해야지."

기껏 골라준 책이다. 아직 첫 장을 조금 읽었을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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