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6화 (6/31)
  • 〈 6화 〉 내 편은 너 뿐인데

    * * *

    "유빈아."

    평화로운 오전의 쉬는 시간. 어느새 다가온 진우가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유빈을 불렀다. 답지 않은 태도에 답지 않은 목소리라 의문이 앞섰다.

    "왜?"

    "너 하늘이 좋아하냐?"

    "미쳤냐?"

    무심코 튀어나온 대꾸가 그의 심정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분명하게 말해서 유빈은 김하늘에게 어떠한 이성적 관심도 없었다. 핑크빛 감정에 두근거리기에는 그 자신부터가 여유가 없는 까닭이었다.

    하야할 숙제가 몇이며 가야하는 학원이 몇인데 그 와중에 연애에 관심을 쏟을 수 있을 리가.

    "아니, 너 하늘이 잘 도와주잖아. 공부도 가르쳐주고."

    "누가 공부 물어보는데 내가 안 가르쳐 준 적 있어? 재작년에 너한테 삼각비 가르쳐준건 다 까먹었냐?"

    "그건 그런데..."

    어쩐지 떨떠름한 반응. 유빈은 골치아픈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느꼈다. 그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내가 우리 반에서 문제 풀이 도와준 애들이 열명은 넘는데 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좋아하는거 아니야. "

    "자주 걱정하고 보살펴주려고 하잖아. 저번에 컨티션 안 좋다고 하니까 계속 신경 쓰지 않았어?"

    "몸 아프다는데 걱정 안하냐? 친구인데?"

    "그건... 그렇지."

    수긍하면서도 여전히 찝찝해하는 모습에 유빈의 마음속에서 짜증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아니라고 하면 아닌거지 왜 이렇게 끈덕진지.

    "너 왜 그래? 내가 하늘이를 좋아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어?"

    "아니, 난 그냥 혹시나 해서. 역시 아니지? 그런 모지리를 좋아할 리가 없지."

    일부러 짜증을 꾸민 목소리로 물었더니 그제서야 납득하는 자칭 절친. 진우는 혼자 몇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신나서 김하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가만히 있었는데, 듣다보니 귀가 썩을 것 같았다.

    '그런 모지리'? 퍽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새로운 파리가 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캐물었겠지.

    유빈은 역겹다고 느꼈지만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미 희망도 없어보이는 짝사랑에 질척질척하게 빠져있는 친구를 굳이 건져 낼 생각도, 그런 의리도 없었다.

    애초에 남의 말은 더럽게 안 듣는게 임진우라는 인물이다. 자기 생각을 의심하지 않는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자신은 없었다. 차였음에도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힐끔거리면서 유빈을 살피는 것을 보니 아직 의심을 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피곤한 꼴이었다. 유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약속 시간은 오전 8시. 세 명 모두 지하철 역에 모이기로 했다.

    언제나 일어나는 시간, 6시 반에 기상한 유빈은 졸린 얼굴을 비볐다. 사실 조금 더 자도 괜찮았겠지만 기상시간이 바뀌면 나중에 고생할 것이 뻔히 보였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생각으로 그냥 평소대로 일어났다.

    "오늘 체험학습 간다고?"

    "네."

    "그래, 차 조심하고. 너무 오래 놀지 마라. 저녁 먹고 들어오니?"

    "아니요. 저녁 먹을 돈 없어요."

    유빈의 어머니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밖에 나가서는 돈 없다는 말 하지 마. 없어 보이잖아."

    진짜 없는데 어쩌라는 거죠 어머니.

    유빈의 한 달 용돈은 만원. 고등학생의 용돈이라고 봤을 때 풍족하게 쓸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점심 식사를 위한 돈은 따로 받았지만 저녁까지 먹을 금액은 아니었다. 이번 달 초에 두어 번 음료수를 마셨으니 용돈을 썼다간 정말로 빈털털이가 될 것이다.

    "알겠니? 사람은 겉보기가 중요한거야. 항상 돈 없다고 하면 빈털털이 같잖아."

    빈털털이라는 건 사실인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항상 저렇게 말하면서 정작 돈을 더 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알바를 하겠다고 하면 지금은 공부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허락해주지 않았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올바를 뿐이어서 불만이 쌓이는게 문제였지.

    "아, 예."

    그리고 이미 늦었다. 유빈의 친구들은 대부분 유빈이 돈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유빈이 자주 친구들과 놀지 못하는 이유는 반이 돈 때문이었으니까. 유빈으로서는 이런 사정을 친구들이 알고 있는 편이 따로 핑계를 댈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적당히 다른 핑계를 대기는 싫었다. 거짓말을 하는게 좋지 않다고 가르쳐 준 것도 어머니가 아니었는가. 거기에 돈이 없다고 거절하면 대부분 쉽게 납득해 주었다. 드물게 사주겠다고 나서는 친구가 있다면 기쁘게 합류했지만 피차 부유하지 못한 학생 신분에 그런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양심적으로 항상 얻어 먹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다.

    "다녀올게요."

    계속 있다간 끝이 없다. 이런 부분에 관해서는 어머니와 그의 생각이 명확하게 달랐고 이미 숨길 의미가 없다는 것도 말할 필요 없었다. 괜히 아침부터 언성을 높이고 싶진 않았다.

    집 밖에 처음 나선 그가 느낀 것은 눈을 사정없이 찌르는 태양의 빛이었다. 덥겠다고 툴툴거리면서도 버스를 탈 돈조차 아까운 그는 약속 장소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빈약한 소지금은 주기적으로 저축하는 양을 생각하면 절대 함부로 쓸 수 없었다. 걸어서 30분 걸린다면 30분 일찍 나오면 될 일이다. 그는 항상 그렇게 행동했다.

    맑은 날씨에 선선한 아침 공기를 만끽하니 좀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어지러운 머리와 짙은 졸음이 컨티션을 붙잡고 늘어졌다.

    "마음대로 만끽하지도 못하나 진짜."

    30분 정도 걷다보면 졸음도 가시는 법. 나름대로 멀쩡한 정신을 회복한 그는 예정대로 7시 반에 도착했다. 물론, 와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니 역 입구가 보이는 위치에 벤치가 하나 있었다. 터벅터벅 가 앉은 유빈은 축 늘어져서 맞은편의 자판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평소에 그가 즐겨 마시는 이온음료가 있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머릿속에서는 적당한 음료라도 하나 마시고 싶다는 욕구와 가진 돈이 얼마 없다는 현실이 격렬하게 맞서 싸우고 있었다. 점심에 쓸 돈을 제외하면 가지고 있는 돈은 8000원 언저리. 다음 용돈을 받는 날까지 20일 정도 남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결코 낭비할 수 없었다.

    고민할 뿐 꼼짝않고 앉아 있기를 잠시. 친구들이 들어오는지 보려고 앉은 벤치지만 음료수에 정신이 팔린 그는 작은 체구의 소녀가 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유빈?"

    약속시간 10분 전에 도착한 시아가 그를 발견하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유빈이 약속을 하면 30분 정도 일찍 나온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점심이나 저녁도 아니고 아침에 더 잘 수 있는 기회도 마다하고 미리 나와있을 줄이야. 성실도 이쯤 되면 병이었다. 조용히 다가간 그녀가 유빈을 불렀다.

    "유빈."

    익숙한 목소리가 쓸데없는 고민에 사로잡힌 그를 깨웠다. 다른 사람이 왔으니 그냥 먹지 말자. 결국 마시지도 않을 것을 오래도 고민했다.

    "안녕."

    "안녕. 빨리 와 있었네?"

    "평소대로 일어나서 시간이 여유롭긴 했는데..."

    유빈은 말 끝을 흐렸다. 저절로 떠오르는 아침의 풍경. 한 걸음 잘못 딛으면 와르르 무너지는 살얼음판 같은 대화.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집에 있긴 싫었거든."

    자기 방에서 쉬어도 어머니가 언제 오실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우는게 기본이었다. 그에게 집에서 진정으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건 잠을 잘 때 뿐이었다.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시아에게 가족들이 생각하는 '귀여운 딸'로서 행동하는 것은 아무리 익숙해져도 피곤한 일이었다. 때로는 집에 있기 싫을 때도 있었다. 좀 더 직접적으로 억압받는 유빈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일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민재는?"

    "몰라. 오고 있겠지."

    민재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시아는 터덜터덜 다가가서 유빈의 옆에 앉았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그녀는 스타킹을 받쳐 입은 핫팬츠와 헐렁한 긴팔 상의를 입고 있었다. 자신의 작은 체구를 살리려고 한 것이 느껴지는 복장. 언제나처럼 '귀여움'을 꾸며내고 있었다.

    잘 어울린다고 할 필요는 없겠지. 귀엽지만.

    시아 본인이 자신의 외모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다가 친구끼리 모여서 가는 자리에서 대뜸 그런 말부터 꺼내도 이상할 뿐이었다. 말을 삼킨 유빈은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 7시 50분.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다.

    "그래도 민재는 시간 약속을 나름 잘 지키는 편이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오지 않을까? 버스 놓치면 30분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지만."

    "뭐?"

    "민재네 동네에서 여기까지 오는 버스가 대충 30분 간격이거든. 그리고..."

    유빈은 말꼬리를 흐리면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과 함께 미미하게 흔들린 그의 눈빛. 시아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민재는 자주 버스를 놓쳐. 그래서 시간을 좀 여유롭게 잡은 거야."

    그가 보여준 화면에는 [미안, 버스 놓쳤어.]라는 문자 한통이.

    "맙소사."

    "이 정도면 진짜 좀 더 자다가 올걸 그랬나봐."

    이제와서 후회해도 한참 늦었다. 졸린 눈매를 쓰다듬은 유빈은 결국 벤치 등받이에 기대 고개를 떨궜다. 그 사이 좀 앉아 있었다고 다시 수면욕구가 솟구쳤다.

    "졸려."

    "좀 자, 그럼. 눕게 비켜줄까?"

    "아니. 됐어. 어차피 푹 자지도 못할테고 공공시설을 그렇게 써먹는 것도 좀 그래. 지하철 역 벤치에 누워서 자는 꼴이 보기 좋진 않을거 같아."

    몸에 힘을 뺀 그의 고개가 꾸벅 꾸벅 흔들렸다. 학교에서도 자주 보는 조는 모습. 보고 있자면 짠한 기분과 함께 뭔가 해줄 것이 없나 찾게된다. 살짝 무릎을 두드린 시아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무릎이라도 빌려줘?"

    "은혜로운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누님."

    물론 농담이었지만 농담기 다분한 말투로 거절하는 걸 보니 졸면서도 제정신은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냅다 그러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 고민했던 자신이 어쩐지 진 것 같은 기분. 하긴, 저렇게 졸면서도 수업 노트는 언제나 완벽하게 필기하는 것이 그가 아닌가. 말하기를 졸면서 필기하는 요령이 있다나.

    그렇게 졸음에 몸을 맡기던 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

    "왜 그래?"

    "선생님께 연락 해둬야지. 늦을지도 모른다고."

    시간을 여유롭게 잡기는 했지만 30분 후 출발이라고 가정하면 꽤 아슬아슬했다. 자연스럽게 시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어쩔 수 없지. 느긋하게 기다리자."

    "약속에 그렇게 늦는다는데 화도 안나?"

    "말도 없이 늦는 망할 놈들보다는 낫지. 늦잠을 잤다는 것도 아니고 버스가 30분 간격인거면 뭐..."

    지금까지 사귄 친구 중에서도 툭하면 지각하는 녀석들은 많았다. 1시간이나 연락도 안 받다가 잠긴 목소리로 '지금 일어났어.'라고 말하는 그 꼬라지가 얼마나 열받는지.

    그에 비하면 이해해 줄 수 있는 이유이고 미리 늦는다고 연락도 했으니 이 정도면 양반이었다.

    담임에게 문자를 보낸 그가 휴대전화의 화면을 끄고 툭 중얼거렸다.

    "잠 다 깼네.

    짙은 다크써클과 반쯤 감겨있는 눈꺼풀, 구부정한 등에 낮은 목소리까지. 누가 봐도 졸려 죽겠는 외견인데 본인은 잠이 깼단다. 그렇다고 거짓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유빈은 평소에도 그런 모습이니까.

    시아가 좀비 같은 그 모습에 대고 물었다.

    "요즘은 살만 해?"

    "그럭저럭. 최근에는 누가 크게 싸우는 일도 없었고 연애 관련 문제도 안 터졌잖아. 그냥 내가 사는게 힘든 것 뿐이지."

    김하늘은 예뻤다. 그런 외모에 보호욕을 불러 일으키는 가녀린 체형, 털털한 성격으로 성별 안 가리고 두루 잘 어울리며 취미가 게임이기까지 하다. 수 많은 남학생들이 포로가 되어 주위 인간관계가 자주 파탄났다. 연애 관련 문제라 함은 대부분 하늘이와 관련된 사건을 말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 필두에는 임진우가 있었다. 진우가 하늘을 좋아한다는 것은 민재에게 듣고 처음 알았지만 돌이켜보면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 둘이 아니긴 했다.

    눈치 못 챈 내가 멍청이지. 유빈은 낮게 뇌까렸다. 누가 하늘이를 좋아하는 기미가 보이면 먹이를 빼앗긴 맹수처럼 이를 세우고 난리를 치니 문제가 안 생길 수 있나.

    "근데 다른 문제가 생기긴 했어."

    유빈이 고개를 푹 숙였다. 밉살맞은 친구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뭔데?"

    "진우가 나보고 하늘이 좋아하냐고 물어보는거야."

    "아니라고 하면 되잖아."

    "물론 아니라고 했지. 그런데 안 맏고 계속 물어보잖아."

    시아는 할 말을 잊고 입을 벌렸다.

    "...걔는 왜 그런데?"

    그게 그녀가 느낀 감상의 전부였다.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막장이라는 그녀의 감상이 그대로 전해지는 기분.

    "나도 좀 알고 싶어. 어떻게 해야 그 지긋지긋한 놈이 납득할까."

    시아는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는 진우를 떠올렸다. 친구 좋아하시네. 안 그래도 힘들게 하루를 버티는 유빈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주다니.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빈은 스트레스성 두통으로 머리를 문지르고 있었고 시아는 자신이 어떻게 그를 도와 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럼."

    먼저 입을 연 것은 시아였다. 단정한 갈색 머리카락을 어쩐지 불안하게 쓸어내리는 그녀.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던 시아는 제 발 끝만 응시했다.

    "날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어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그렇게 말하면 어느 정도 의심을 가실 것이었다. 하지만 유빈은 그 말에서 어쩐지 다른 의미가 있음을 느꼈다.

    단순히 방법을 제안하는 것 뿐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바램이 섞이 있는 것 같은 말. 굳이 시아를 좋아한다고 말 할 필요는 없는데도 그녀는 자신을 지칭했다.

    착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어딘가의 소설에서나 볼 법한 고백과는 거리가 멀었다.

    달콤쌉싸르한 감정과는 달리 처연하고 쓸쓸해 이뤄지지 않을 것을 아는 그런 바램.

    "그래. 그렇게 하면 효과는 있겠네."

    유빈은 굳이 어떤 의미였는지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유빈의 배려를 시아는 알고 있었다. 그냥 넘어가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말한 것이었다.

    "그래도 괜찮겠어? 소문이 날지도 몰라."

    "괜찮아. 어차피 소문은 소문이고."

    "음... 일단 진우에게는 비밀이라고 말해둘게. 그러면 적어도 이리저리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겠지."

    임진우는 의리를 강조하는 녀석이지만 입이 무겁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언젠가는 퍼지고 말 것이다.

    "난 잠깐 화장실 좀 갔다올게."

    "응, 다녀와."

    유빈이 벤치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는 힐끗 시선을 돌려 보았지만 시아는 그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바램. 그래, 바램이었다.

    정말로 유빈이 자신을 좋아해줬으면 한다는 바램.

    자신이 유빈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을 좋아해 준다면 유일한 친구를, 유일한 이해자를 자신의 곁에 묶어둘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움직였다.

    "정말 싫다, 나."

    소문이 퍼져? 상관 없었다. 오히려 퍼지는 편이 그녀에게는 좋았다.

    그와 그녀가 엮이면 엮일수록 함께 있는 것이 자연스러울테니까. 그게 유빈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가 될지는 모르나 시아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었다.

    "하..."

    검고 검은 감정이 가슴 속에서 움트는 것이 느껴졌다.

    그 감정은 사랑이라기에는 따뜻하지 않고 진득했으며 우정이라기에는 풋풋하지 않고 더러웠다.

    정말로 더럽다고 생각했다. 스스로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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