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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5화 (5/31)
  • 〈 5화 〉 도망칠 수 없기에 목줄이라 하는 것

    * * *

    왜 멀쩡한 놈이 없지.

    유빈은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멀쩡하지 못하다는 건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무언가 아주 유감스러운 경험을 통해 심적으로 상처를 입었다는 뜻이었다. 아니, 이것도 결국 문제가 있다는 뜻인가?

    한번 난 상처가 낫기는 커녕 곪아 터져가고 있으니 어떻게 멀쩡하다고 하겠는가. 박터지게 싸우고 화해하기를 무한반복하는 남녀 한쌍, 1학년 때 있던 사건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친구 한명, 이 모든 것을 낄낄거리며 관람하는 팝콘러.

    무엇보다 그 모든 녀석들 사이에서 불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한심했다. 민재처럼 요령 좋게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가능할텐데 이놈의 성격은 그렇게 힘들어도 바뀔 생각을 안했다.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 상대가 있으면 가슴께가 쿡쿡 쑤시는데,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도 병이 아닐까. 호구병.

    이렇게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 자신도 멀쩡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유빈아, 뭐해?"

    "공부하고 있었어요."

    오늘도 불시에 열리는 문. 노크는 없었다. 쑥 고개를 내미는 건 주기적으로, 그리고 가끔은 불시에 그를 확인하는 어머니였다.

    "정말? 그 옆에 핸드폰은 뭐야? 공부할 때는 멀리 떨어트려 놓으라고 말했잖아. 알게 모르게 집중을 방해한다구, 신경쓰게 된다니까?"

    아 예, 어머니.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빈은 무심코 그렇게 대꾸하려다가 꾸욱 참고 입을 다물었다. 말투, 말투를 항상 조심해야했다. 끓는 점이 낮은 어머니는 말투 하나, 대꾸 하나, 혹은 단어 하나에도 순식간에 열을 받는 능력자였다. 좋게 말하면 꼼꼼하고, 좀 덜 좋게 말하면 깐깐하며 솔직하게 말하면 답답했다. 그리고 더럽게 치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굳이 불구덩이에 기름을 붓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과거 몇번의 대폭발을 겪은 후로 유빈은 마음 속과는 다른 말을 꺼내는 방법을 익혔다.

    솔직함은 미덕이지만 부주의한 말은 재앙을 부르는 법이었다.

    "노래라도 들을까 생각해서 꺼낸거에요. 딴 짓 안했어요."

    "노래를 들으면서 공부가 돼? 엄마는 이해가 안가더라."

    그러면서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휴대전화를 노려보는게 건수 하나만 잡히면 신나서 내다버릴게 분명했다. 이전 카페에 가서 공부한다고 했을 때도 거의 같은 반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서는 다분히 적대적인 경향이 있었다.

    "잠깐 화면 켜봐. 확인 좀 하자."

    "......"

    말 없이 켜서 보여주니 별 것 없는 배경화면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닫아 놓은 문도 걷어차서 여는 그녀다. '내 집에서 내가 몰라야 할 일이 도대체 뭐냐'라고 말하는 사람이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언제나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였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서는 올바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생각을 가족관계에서도 강요하는게 문제였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이유로 배려하진 않는다. 자신이 무언가를 배려했다면 상대도 그만큼 무언가를 해 줘야 했다. 상대가 아들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유빈은 항상 그녀의 태도에서 메말랐다는 감상을 느끼곤 했다. 말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문 닫아두지 마. 여기 공기가 답답하잖아."

    "예에."

    문을 잠그면 열 때까지 두드리면서 뭔 수상한 짓을 하냐고 캐묻는 그녀다. 거부했다간 이야기가 길어질 뿐이었다. 이건 감시가 아닌가? 수백번도 더 떠올렸던 의문은 조용히 잊기로 했다. 유빈의 어머니는 '단지 확인하려고 했을 뿐이다', '뭘 하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말하며 감시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테니까.

    그녀는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영락없이 감시라는 사실을. 자신이 아들을 걱정한다는 감정에만 매몰되어 그 밖의 많은 것들을 무시하는 까닭이다. 유빈이 사생활을 존중해달라고 하면 그녀는 말한다. '서운하다' 라고. 어머니한테 비밀로 할 것이 뭐가 있냐고. 어머니가 해준게 얼만데 그럴 수 있냐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그녀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정말 전형적으로 위엄 넘치는 어머니 상이 아닐 수 없었다. 말만 이성적이며 논리적이지 결국 유빈을 자기 마음대로 반죽하고 있으니까. 이런게 가스라이팅 아니었나? 이번에도 떠오르는 생각을 깊게 묻었다. 그는 착한 아이어야 한다. 착한 아들이어야 했다. 그러니 지금까지도 그는 어머니의 말을 순종적으로 따랐다.

    "아, 있다가 음식 쓰레기 좀 버려줄래? 저녁 준비 전에 한번 비워야 할 것 같더라."

    "이거부터 좀 끝내고요."

    딴에는 무난한 대답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이맛살에 주름이 생기고 목소리 톤이 반 정도 올라갔다.

    유빈은 애써 평정을 꾸미면서도 순식간에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음. 엄마가 언제 지금 당장 가라고 했니? 그 말은 '저 지금 공부하고 있는거 안보여요?'라고 들리는데. 넌 말을 좀 조심해야 한다니까. 내 생각에 너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들려."

    "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서 착각하신게 아닐까요?"

    정확하십니다 어머니. 전 지금 어머니를 비웃고 있는 거에요.

    언제나 머릿속에서는 신랄한 말을 툭 툭 내뱉고 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나는 왜 착해야 하는걸까? 세 번째로 떠오른 의문도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답이 뭐든 지금 그의 현실은 바뀌지 않으니까.

    이 대답도 마음에 안 드는지 목소리가 커졌다. 허리에 손을 올린 것을 보면 새로운 명령을 내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엄마를 네 말하는 방식에 맞추려고 하지 마. 솔직히 굉장히 건방져."

    "예. 조심하겠습니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순종 이외의 대답을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저런 말 하나 하나가 자신의 방식에 맞추려고 하는 것이니 일종의 내로남불이지만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결국 돈 내주고 밥 차려주고 키워 주는건 어머니다. 우리 역사가 보여주듯 언제나 권력자의 말은 옳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주고 받는 가정이 있는가하면 가족이라는 이유로 기대를 강요하는 일도 있는 것이다. 유빈은 어머니에게 들리지 않게 심호흡을 반복했다. 심호흡 소리가 들리면 이번에는 한숨을 쉬었다고 몰매를 맞을테니까.

    찡그린 표정으로 유빈의 어머니는 방을 나갔다. 계속 있으면 공부를 방해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분명하게 말해서 처음 들어온 시점에 이미 방해였다.

    그런 말을 하면 그녀는 매정하고 서운하다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

    소리지르고 싶었다. 무슨 말이라도 상관 없이 아무튼 발산하고 싶다는 충동이 치솟았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오른손에 눌린 샤프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떨어지는 일 없는 감시에 목이 조이는 기분. 차라리 울고 싶었다. 펑펑 울 수 있으면 조금 나아질까.

    안타깝지만 그에게는 울 권리도 없었다. 해야 할 일들은 많았고 언제 어머니가 돌아올지 모르니까.

    #

    그날 밤은 비참한 기분으로 잠들었지만 사실 드문 일도 아니었다. 대충 한 달의 절반 정도의 빈도로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그 대부분은 어머니와의 마찰이거나 친구들 사이의 사건사고였다.

    "체험학습 어디 갈거야?"

    "국어 과목. 도서관."

    체험학습 안내를 듣기위해 지정된 교실로 향하던 유빈은 대답과 함께 길게 하품을 했다. 이번 체험학습은 선택한 과목별로 가는 곳이 달라졌다. 평소 국어선생님과 사이가 좋고 문과계열 진학을 노리는 유빈에게 다른 과목을 고를 이유는 없었다.

    진우는 입맛을 다셨다. 진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그럼 같이 못 가겠네."

    "넌 체육이지?"

    진우는 체육계열 진학을 지망하고 있으니 마찬가지로 선택지는 하나였다. 같이 가지 못한다고 꿍얼거리는 진우 몰래 유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물론 하늘도 진우와 다른 과목을 선택했으니 만날 일은 없었다. 같이 갔다면 높은 확률로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미래였다. 안그래도 죽는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정신상태다. 그것이 비 맞은 종이마냥 갈라지는 꼴은 보지 않아도 될 모양이었다.

    선택한 과목에 따라서 모이도록 정해진 반이 달랐다. 교실 앞에서 진우와 헤어진 유빈은 문 앞에서 익숙한 친구들을 발견했다.

    "역시 유빈은 도서관이구나."

    "어, 너도 도서관이야?"

    "응."

    "나도. 다들 국어 선택했구나."

    민재, 시아 두 명이 모두 국어과목을 선택했다. 평소 잘 어울리는 5명 중에서 진우와 하늘이 빠진 상황이었다. 문예창작과 지망인 민재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시아는 달랐다. 민재는 그녀의 장래희망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아는 왜 국어 선택했어?"

    민재의 물음에 대한 답은 유빈에게서 나왔다.

    "문과인데 진로를 제대로 정한 건 아니니까 국어 선택해두면 나중에 문제는 없을 것 같았겠지."

    "어떻게 알았어?"

    "뻔하잖아. 하긴 이런 체험학습이 입시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겠냐. 편하게 가고 싶은데로 가는게 정답일지도 모르긴 해."

    눈을 동그랗게 뜬 민재와 시아는 마주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유빈은 언제나 자기 머리가 안 좋은 편이라고 하지만 이럴 때 보면 자신들보다 잘만 돌아갔다.

    "현지 집합인데 어쩔래? 같이 가?"

    "그러자. 폭탄 두명이 없으니 편하게 가겠네."

    유빈의 눈썹이 꿈틀했다. 항상 구경만 하던 녀석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얄미울 뿐이었다.

    "넌 언제는 안 편했냐? 폭탄인 줄 알면 좀 돕던가. 그 폭탄 둘이 있어봤자 지켜보기만 했을 거면서 말은."

    "풉. 그러게 왜 싸움 말리겠다고 그 사이에 들어가."

    "젠장."

    결국 끼어든건 자기 선택이었다. 불만을 말해봤자 스스로에게 돌아올 뿐. 짜증이 오르지만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잠자코 듣고있던 시아가 나지막하게 끼어들었다.

    "그 정도만 해. 안그래도 다 알면서 치여 사는건데."

    "흠?"

    민재는 시아가 나서서 말렸다는 사실이 의외스러워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그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더 놀릴 생각도 없었다.

    둘만 있을 때는 실컷 놀리더니 이럴 때에는 도와주다니. 얄밉게 웃으며 독과 약을 함께 건네는 이미지가 머리를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시아는 바로 유빈에게도 한 마디 쏘아주었다.

    "넌 좀 사리고. 어떻게 된게 싸움 날 때마다 휘말려?"

    "네에..."

    유빈은 대꾸하면서 책상위에 푹 업드렸다. 시아는 자연스럽게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자게?"

    "어. 선생님 와도 깨울 필요 없어. 목소리 들으면 알아서 일어날거니까."

    "어련하시겠어."

    무슨 이유가 있든 다른 사람이 깨우면 화를 낸다는 것을 시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대로 고개를 책상에 처박는 유빈과 필기구를 준비하는 시아를 번갈아 보던 민재는 조용히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과연. 절친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진우가 그 자리를 빼앗길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어쩐지 편안한 공기. 민재가 생각하기에 이 둘은 함께 있는 것이 그나마 서로에게 다행이었다.

    유빈은 누구에게나 그렇든 솔직하게 시아를 대했고, 그 덕분에 시아는 유빈을 상대로는 말과 행동을 의심하지 않았다.

    시아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유빈을 특별하게 대했고, 그 덕분에 유빈은 시아에게 정신적인 위안을 얻었다.

    시아야 마음 속으로 부정하겠지만 민재에게 있어서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였고, 나름 잘 지내길 바라고도 있었다. 단지 구경이 재밌는 건 별개의 이야기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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