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배려가 없으면 명치를 맞는다
* * *
김하늘은 임진우와는 여러 의미에서 달랐다.
일단 성별과 외모가 정 반대였다. 임진우는 남성적이지만 평균에 가까운 얼굴에 단단한 체격을 가지고 있어 전형적인 스포츠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힘도 쎄서 별 것 아닌 듯이 툭툭 치는데 맞는 사람은 무지 아팠다.
그런 반면 김하늘은 교내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예뻤다. 키는 작은 편이었고 팔과 다리도 가늘었다. 몸이 약해서 자주 무릎이나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곤 했는데 이것이 주위의 보호욕을 자극했다.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유빈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것은 유빈에게 있어서 정말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유빈, 수학 문제 좀 가르쳐 줄래요?"
익숙한 목소리에 팔짱을 끼고 졸고 있던 유빈이 고개를 휙 들었다. 여전히 진한 다크써클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아, 졸았네."
졸음을 참고 숙제를 하려던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을 놓고 잠들어 있었다.
졸고 있는 줄 모르고 말을 건 하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엄청 졸려보이는데. 나중에 물어 볼테니까 그냥 좀 잘래요?"
"아뇨. 그냥 주세요. 빨리 알려주고 자게."
하늘은 공부를 잘 하는 편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부 과목 이외에는 못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녀가 물어보는 문제는 유빈에게 있어서 몇분 걸리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거요."
아니나 다를까. 수학 교과서에 있는 연습문제로 암산으로도 해결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것과 아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별개의 영역. 유빈은 하품을 하며 펜을 꺼내들었다.
세 단계로 정리해서 식을 써 내려가자 지켜보던 하늘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해 못했으면 말로 설명해야 했으니 간단하게 끝나서 다행이었다.
"고마워요!"
"예."
서로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서먹한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친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인간관계의 고민이나 진로 문제에 대한 상담을 주고 받을 수 있을 정도이니 분명히 사이가 좋았다.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전 두 사람의 대화는 주로 문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유빈은 인터넷 상에서 채팅을 치는 것 처럼 존댓말로 문자를 했고, 거기에 익숙해진 나머지 실제로 만나서도 존댓말을 썼다.
하늘이도 그에 맞춰서 존댓말을 썼고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결국 서로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으로 자리잡았다.
"어쩐 일로 수학을 하고 있어요?"
하늘이도 진우처럼 공부와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다.
"저번 시간에 선생님이 숙제로 내주신 거잖아요? 오후에 이거 검사 한다던데 모르고 있었어요?"
"아. 교과서 문제는 저번 주에 다 풀어둬서 신경을 안 썼더니 잊고 있었네요."
"역시 유빈. 그걸 다 해버리네."
수학이라는 과목에서 교과서에 있는 문제는 기본 중의 기본에 속한다. 그러니 저렇게 반응해도 유빈으로서는 뭐라고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과 계열 진학을 지망하고 있지만 수학 자체는 자신있는 과목이었다. 국어, 영어, 수학 중에서는 압도적으로 수학에 투자한 비율이 더 컸다.
"아무튼 고마워요. 방해해서 미안해요."
"아뇨. 도움이 됐으면 됐습니다."
샤프를 내려놓고 길게 하품.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 있다보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물어볼 건 그 문제 하나였으니까 이제 자도 되요."
"아뇨. 문제 풀다보니 잠도 좀 깼고."
유빈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를 향했다. 다음 수업까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까 진우가 점심에 배드민턴을 하자고 불렀으니 점심 시간에는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조금이라도 해두어야 했다.
"그냥 노트나 정리하려고요."
"네에."
피곤에 쩔어서 앉은채로 졸던 유빈이 그렇게 말하자 김하늘은 무언가 탐탁치 않다는 듯 눈쌀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졸린 것 같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걱정해서 몇번 더 살펴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노트를 펼치는 유빈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보온병에 담아서 가져온 커피는 좋은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카페인과 졸음.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그의 연필은 멈추지 않았다.
억지로 잠을 몰아내는 유빈을 보던 하늘은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은 언제나 괜찮다고 그러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당장 양호실 침대에라도 눕혀버리고 싶었다.
한 자리를 건너 풍겨오는 진한 커피향은 향긋했다. 풍성한 향기는 유빈이 억지로 치운 수면이 원래 그렇게 기분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저렇게 진한 다크서클은 얼마나 잠을 줄여야 생기는 것일까.
어쩐지 서글픈 심정에 가만히 있기를 잠시. 뒤에서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학 문제 물어봤냐?"
"...응."
대답하기 전의 공백은 속에서 치솟은 화를 참기 위한 것이었다. 아까 유빈에게 대놓고 면박을 준 진우는 세상 즐겁다는 듯 킬킬거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수학을 다 하고, 별일이네."
아까 유빈도 물어본 질문인데 어쩐지 진우가 물어보니까 짜증이 솟았다. 말 좀 예쁘게 못하냐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참기로 했다.
여기도 또 싸웠다간 유빈의 공부를 방해하게 될 터였다.
"숙제잖아. 넌 했어?"
"나? 숙제 나왔을 때 했지. 어디 봐."
거친 손이 하늘의 손에서 교과서를 빼았아갔다.
"아!"
뭐라고 할 틈도 없었다. 힘의 차이는 분명했고,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을 가져가는 태도에 하늘은 화가 나기보다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주르륵 교과서를 넘겨보단 진우의 시선이 별표시가 붙은 문제로 향했다. 방금 전에 유빈에게 물어본 문제였다.
"뭐야, 이렇게 쉬운 걸 물어본거야?"
"내놔."
휙. 교과서를 돌려받으려던 하늘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체격이 큰 편인 진우가 교과서를 높이 들었더니 하늘의 손은 아무리 뻗어도 닿지 않았다.
"내놔!"
"헤헤. 못 잡지? 못 가져가지?"
이 새끼는 왜 갑자기 행패야.
하늘의 분노가 순식간에 한계선 넘어까지 치솟았다. 안 그래도 아까 유빈을 괴롭히는 것을 봐서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분 나쁜 장난을 치다니.
한대 패주겠다고 결심하니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진우는 책을 잡은 손을 높이 올린 상태라 명치가 훤히 비어 있었다.
있는 힘껏 한 대.
"억!"
숨이 턱 막히는 고통에 책을 떨어트리고 명치를 부여잡은 진우가 주저앉았다.
아무리 힘이 약하다고 해도 고등학생이다. 전력으로 명치를 후려치면 당연히 아플 수 밖에 없었다.
"작작 좀 해!"
"그렇다고 명치를 치냐! 인성 쓰레기네 진짜."
네 인성부터 생각하고 말해라.
굳이 한마디를 더 하지는 않았다.
진우는 계속 컥컥거렸지만 하늘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맞을 짓을 해서 때렸다. 그녀는 떳떳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가까운 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유빈에게 생각이 미쳤다.
방해가 됐을까 싶어 유빈을 살펴보니 여전히 노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 귀에는 뒤에서 이어진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이어폰과 연결된 핸드폰의 볼륨을 슬며시 올리면서, 뒷자리에서 시아가 하늘에게 브이를 그렸다.
하늘과 진우의 상황을 보고 시끄러워질 것을 예상한 그녀가 미리 선수를 쳤던 것이다. 이 노래 어때? 라는 느낌으로 건넨 이어폰을 유빈은 거절하지 않았다.
"후우..."
친구라고 하면서 배려가 결여된 한심한 남정네가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보니 화가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안그래도 평소부터 유빈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녁 즈음에 문자를 시작했다가 무심코 열이 올라서 정신차려보면 새벽까지 붙잡고 있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저 다크서클의 1할 이상이 그녀에게 지분이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못할 짓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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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학생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간 교실에서 유빈이 천천히 일어났다. 오전부터 커피를 마시느라 입안이 텁텁했기에 몇번 입을 다셨다. 점심을 먹기 전에 물부터 마시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종소리에 집중이 풀려 멍한 정신으로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있었더니 등을 쿡 쿡 찌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응?"
천천히 돌아보니 시아가 웃는 얼굴로 서있었다.
"아까 노래 어땠어?"
"가사는 내 취향이던데? 멜로디가 반복되는게 좀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그렇구나."
하늘과 진우가 가볍게 싸운 것을 유빈은 모른다. 그것을 확인한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다시 한번 씨익 웃었다.
"어, 시아야?"
유빈은 불길함을 느꼈다.
윤시아라는 여학생은 자신이 귀엽게 생겼다는 것을 잘 알고있고, 잘 이용한다.
평소에 그녀가 입에 달고 사는 미소는 귀여운 이미지를 남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귀여움보다는 장난기와 화사함이 드러나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어울리는 친구들 중에는 유빈만이 알고 있는 그 미소를.
"유빈아. 너 아까 울었지?"
"......"
"못 들은척 하기는."
"그걸 봤냐."
진우가 큰 소리로 자신을 욕했을 때, 유빈은 참다못해 고개를 숙이고 찔끔 흐른 눈물을 닦았다. 그게 다 보이고 있었단 말인가.
"난 말 했다? 분명히 후회할 거라고. 분명히 진우는 널 괴롭힐거라구. 말 안 들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잘 참았던데, 자리를 옮기면서 서러워졌구나?"
짖궂은 웃음과 함께 울고 있는걸 다 보고 있었노라고 말하는 시아. 유빈은 부끄러움에 몸부림쳤다.
그래. 현재 유빈만이 알고 있는 사실.
밝고 귀여운 면만을 알고 있는 대다수의 친구들, 선을 긋고 거리를 좁히지 않는 사실을 아는 일부의 친구들. 그러나 그것들은 윤시아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들은 모르는 사실, 그건 시아가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소악마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계산적인 면모의 뒤에는 놀리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의 본래 성격이 있었다.
"아, 어떻게 해 그럼. 잠도 부족한테 그런 소릴 들어서 눈물샘이 터졌단 말이야."
"정말이지 사서 손해를 본다니까."
쿡쿡 웃으며 발랄하게 교실 문을 나서는 시아. 유빈은 기분이 좋아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우는걸 보였다고 해도 그다지 부끄럽진 않았다. 하지만 기껏 놀릴 거리를 잡았다며 들뜬 그녀의 기분에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고보면 아까 그거 때문에 임진우가 여자애들 사이에서 엄청 까였어. 잘생기지도 않은게 입만 험하다고.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뭐? 정말? 여자애들 무섭네."
"걔는 그럴만 해."
오히려 너는 왜 욕 안하냐는 시아의 눈빛에 유빈이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좀..."
"아까 너 공부할 때 하늘이 괴롭히던데. 오늘 밤에도 문자가 날아가지 않을까?"
"임진우 망할 새끼야!"
망설임 없이 터져나온 욕에 시아가 깔깔 웃었다. 아까 느꼈던 화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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