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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1화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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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화 〉 호구와 스포츠맨과 미소녀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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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를 넘은 심야. 학원이 끝나 집으로 가는 길.

    다크써클이 특징적인 모범생계 호구 홍유빈. 그는 우연찮게 마주친 친구에게 가방끈을 붙잡힌 채로 편의점에 끌려가고 있었다.

    몇번 탈출을 시도했지만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렇다고 가방을 버리고 갈 수도 없었다.

    "야, 나 돌아가서 숙제랑 공부해야하는데."

    "잠깐이면 되니까."

    낮부터 지금까지 학원에 있던 그는 당장이라도 집에 가고 싶었다. 안 그래도 해야할 일이 많아서 12시 전에 잘 수 있을지 불안하던 차였다.

    제때 자기는 글렀네. 유빈은 작게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음료수 사줄게."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좀 풀어진 마음으로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은 유빈이 상대를 재촉했다. 뭐든지 댓가가 있다면 무보수 노동보다는 나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낮에 좀... 싸웠거든."

    "또냐."

    유빈은 익숙한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불평을 중얼거리면서도 그는 이어지는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주었다. 미우나 고우나 친구 아닌가, 일단은.

    문제는 그 이야기가 2시간 가까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고, 집에 가서는 연락도 없이 늦었다고 어머니에게 한번 더 갈려 나갔다.

    "인생 썩을."

    #

    이게 바로 지옥이다.

    학교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유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지금 꽤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근육이 일을 하고 있을텐데 졸음이 가시기는 커녕 이대로 잠들 것 같았다.

    "자면서 걸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흐느적 흐느적. 좌로 우로 번갈아 움직여 어떻게든 오르막길을 덜 힘들게 오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초,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달려서 올라가곤 했던 것 같은데 피곤에 절은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인가."

    "말이 되는 소릴 해라."

    퍽.

    "아!"

    "엄살은. 그리 심하게 안 때렸다?"

    엄살이고 뭐고 한 순간 잠이 달아날 정도로 아팠다. 양아치 같은 녀석. 유빈은 속으로만 한마디 해주었다.

    어제 밤에 만났던 바로 그 상대가 눈 앞에 있었다.

    "안녕."

    "안녕. 오늘도 좀비 같은 면상이네."

    "넌 아침부터 기운차서 좋겠다."

    임진우. 원수같은 친구.

    누구 때문에 이렇게 졸린건지 정말로 모르는 듯한 얼굴이었다. 유빈으로서는 충분한 수면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좀비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너무 늦게까지 공부한 거 아니야? 쉬어가면서 해라. 암기같은건 오래 안 걸리잖아?"

    "아, 그려."

    너 때문에 못 쉬었어 망할 놈아. 목구멍까지 솓구친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말 해봤자 제대로 듣지도 않을 것이 뻔했다.

    임진우는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였다. 운동을 좋아하고 체육 실기로 대학을 가기 위해 준비중인 스포츠맨이었다.

    공부는 안하지만 수업만 듣고도 평균점 이상을 유지하는 우월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공평했다.

    유빈은 암기를 잘 못했다. 교과서 전체를 배껴 적다시피하며 암기에 열을 쏟는 유빈은 그 좋은 머리가 왜 공부를 안하는 녀석에게 가 있는 것인지 한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제 야간 자율학습은 없어져서 좀 낫다. 집에서 공부하다가 그냥 바로 드러누워서 잘 수 있으니까."

    "아 맞아. 야자 없어졌지?"

    "그래봤자 학원에 가던가 집에서 자습하니까 그렇게 큰 차이는 없지만. 그게 어디야."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교실. 집이 학교와 가깝기 때문에 적당한 시간에 나와도 도착은 빨랐다.

    유빈은 가방을 걸자마자 바로 몸을 늘어뜨렸다. 제자리를 찾아간 것 같은 안착감. 눈꺼풀에 힘을 빼니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다.

    "난 조례 시간까지 농구할건데, 너도 할래?"

    "싫어. 잘거야."

    교실 사물함에 두고다니는 농구공을 꺼내는 진우를 보지도 않고 엎드린 유빈은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고 싶었다.

    "넌 왜 그러고 사냐 진짜. 졸라 힘들어 보이네."

    "하라고 시키니까."

    "거 참 불쌍하다."

    정말로 불쌍하다고 생각했다면 학원 끝나도 돌아가는 자신을 붙잡고 2시간을 보내진 않았겠지. 유빈은 코웃음을 쳤다.

    유빈이 엎드린채 대답도 않고 있으니 진우는 아무 말 없이 공을 튕기며 밖으로 나갔다. 잔다고 했는데 농구공을 튕기며 요란스럽게 사라지는 것이 참으로 밉살맞았다. 뇌가 없는 건가?

    잠깐은 짜증이 솟구쳤지만 졸음은 모든 감정을 평등하게 지워버렸다. 화를 내는 것 보다 한시라도 빨리 자는게 중요했다. 지금이라도 조금 자두지 않으면 정말로 후회하게 될테니까.

    그가 다음에 눈을 뜬 것은 1교시 시작종이 울린 뒤였다.

    #

    오전의 1~4교시는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지옥 그 자체였다.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유빈은 졸음에 매우 약해서 졸음을 느낀다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 잠든다는 것과 같았다.

    수업은 들어야 한다. 그러나 눈을 뜨기위해 힘을 줘도, 손가락을 깨물어도, 허벅지를 꼬집어도 어느새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다.

    차라리 그대로 푹 잤으면 컨티션이라도 나아졌을 것이다. 자면 안된다는 생각에 정신을 붙잡으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자지도 깨지도 못하는 고통을 선사했다.

    어떻게든 정상으로 돌아오려고 쉬는 시간을 모조리 수면에 투자했지만 수업 사이사이의 10분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4교시 수업은 다행히 빨리 끝나서 15분 정도를 푹 잘 수 있었다. 종이 치자 삼삼오오 모여서 급식실로 향하는 학생들. 그 와중에 유빈은 종소리도 듣지 못하고 책상 위에 죽어있었다.

    뒷자리에서 그를 지켜보던 여학생이 한숨을 내쉬더니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아야, 점심 먹으러 가자."

    "미안. 오늘은 다른 애랑 먹기로 해서..."

    "그래? 알았어. 이따보자!"

    지나치는 학생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그녀는 인기척이 없어지는 것을 기다렸다.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가 둘만 남은 교실. 유빈에게 다가간 그녀가 등을 두드렸다.

    "홍유빈."

    종소리는 못 들어도 이름은 들리는지 깊게 잠들어있던 유빈이 반응했다.

    졸려 죽겠는 표정으로 얼굴을 거칠게 비빈 그가 음울한 목소리로 신음을 흘렸다.

    "벌써 점심 시간이라니. 이게 꿈이면 좋을텐데."

    "점심 먹고 다시 자."

    "안돼."

    단호한 대답과 함께 자리게서 일어난 그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가방을 흘겨 보았다. 반쯤 열린 지퍼 사이로 참고서가 보였다.

    "숙제 안 끝났어."

    평소라면 쉬는 시간에 끝내두고 점심시간은 배드민턴을 쳤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양이 나름대로 있기 때문에 점심시간은 전부 투자해야 해결할 수 있었다.

    "깨워줘서 고마워. 그 망할 녀석들은 깨우지도 않고 그냥 갔네."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정신없던데? 민재는 끌려가느라 너까지 생각할 틈이 없었을거야."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긴 하지."

    등받이에 걸쳐 둔 마이를 집어든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공기가 차게 느껴졌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가자."

    "응."

    윤시아. 여기에 없는 전민재와 더불어 유빈이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두명의 친구들 중 한명이었다.

    그녀와는 1학년 때 있었던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가까워졌다. 나름대로 친한 사이라 유빈이 왜 이렇게 졸음에 찌들어 사는지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교실을 나서니 쌀쌀한 초봄의 공기가 마이를 입게 만들었다. 난방이 돌아가는 교실과 달리 복도는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터벅터벅. 체구가 작은 그녀의 보폭에 맞추려다보니 천천히 걷게 되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빨리 갔다가 원수 같은 친구와 함께 밥을 먹어야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늦게 가는편이 나았다.

    "어제는 또 무슨 일이었어?"

    "임진우랑 김하늘이 같이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하늘이가 좋아한다고 말한 프로게이머 이야기가 나왔나봐. 진우가 그 선수를 퇴물이라고 했다는데."

    "제정신이야, 걔는?"

    "안타깝게도 원래 제정신이 아니야."

    누구든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를 욕하면 기분이 상한다. 그런 당연한 것도 모른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고, 알고 있는데도 말한 것이라면 그것도 문제가 있었다.

    "진우는 자기 딴에 맞는 말만 했는데 욕먹었다고 화내고, 하늘이는 하늘이대로 기분이 상해서 화내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진우가 잘못한 것이 맞았다. 하지만 이 경우 문제는 진우가 자신의 잘못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었다.

    '그 선수가 퇴물인건 사실이잖아? 그런데 왜 화를 내?'라는 그 사고에 '사실이긴 해도 기분은 나쁠 수 있다'라는 상식을 때려 넣기까지 얼마나 걸렸던가.

    게다가 결론적으로는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가 화냈으니 일단 사과는 해야겠다'라는 결론이었다.

    그 후에 만났을 때 둘이 웃으며 떠들고 있었으니 유빈이 자는 사이에 문자나 통화로 화해를 한 것이리라.

    "걔네들도 참. 계속 싸울거면 같이 안 놀면 될텐데."

    "싸워도 다시 친해지니까 친구인거 아니야? 저렇게 지내면서 절교는 안하고 있잖아."

    급식실 앞에 일렬로 선 줄. 두 사람은 가서 나란히 섰다.

    한 남학생이 후다닥 달려서 급식실 입구로 향했다. 명백한 새치기였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새치기를 해 봤자 2, 3분 빨리 먹을 뿐이지만 그래도 빨리 먹기위해 양심을 버리는 사람들은 매우 많았다.

    무감각한 눈으로 그걸 바라보던 시아가 툭 내뱉었다.

    "이해 할 수가 없어."

    시아가 발 끝으로 바닥을 툭툭 쳤다. 귀여운 디자인의 캔버스화가 타일에 부딪혀 찌그러졌다.

    유빈은 굳이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싸울 일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일도 없도록. 너는 그렇게 지내고 있으니까."

    시아는 유빈, 하늘, 진우, 더불어서 민재와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관계이지만 그렇다고 유빈과 하늘, 유빈과 진우, 그리고 민재와 유빈의 관계처럼 가깝지 않았다.

    그녀의 본래 성격을 아는 것은 그 중 유빈과 민재 뿐이었다.

    나름대로 예쁜 외모와 작은 체구를 통해 보호욕을 자극하면 호감을 사는 건 쉬웠다.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긴 후에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 거리를 유지한다. 그게 그녀의 교우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빈처럼 상담 상대가 될 일은 물론, 서로 싸우거나 원망을 살 일도 없었다.

    "너도 그러면 되잖아."

    "안돼."

    씁쓸한 기분으로 벽에 등을 기댄 유빈이 급식실 안쪽의 친구들을 바라봤다. 그가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세 사람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난 걱정해버리거든."

    "호구 같으니."

    "호구가 맞긴 해.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러다가 후회할거야. 하늘이는 몰라도 진우는 일단 분명하게 널 더 괴롭힐걸?"

    "내가 그걸 모르겠니. 그래도 나름 좋은 점도 있는 녀석이잖아. 되는 데까진 도와주고 싶어."

    "손해만 보는 성격이네."

    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귀엽고 얌전한 성격으로 보이도록 행동하기 때문에 좀처럼 본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시아가 유빈과 터놓고 지낼 수 있는 것은 유빈의 이런 미련한 면 덕이긴 했지만 보면 볼수록 동정만 느껴졌다.

    "도와는 줄게.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마."

    "괜찮겠어? 진우나 하늘이랑 더 깊게 엮일지도 몰라. 너 쟤네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나서는 질색을 했잖아."

    "너만 하겠어? 어차피 별 대단한 건 못해주니까 날 걱정하기보단 자기 부담 줄일 생각부터 해. 민재도 좀 대신 굴려먹고."

    아무것도 모르고 콩자반을 씹고 있는 민재를 가리키는 그녀의 모습에 유빈이 쓰게 웃었다.

    "쟤는 맨날 나몰라라 하는데."

    "민재는 지금도 충분히 도와주고 있으니까 괜찮아."

    민재는 학원이나 공부로 자주 어울리지 못하는 유빈과는 다르게 두 사람의 싸움에 직접적으로 휘말리곤 했다. 어제 있었던 싸움의 전말을 가르쳐 준 것도 민재였다.

    현장에 없다보니 하늘이와 진우의 말로만 상황을 판단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 두 사람이 알려준 상황이 서로 묘하게 달랐기 때문에 제 3자로서 상황을 바라보는 민재는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하여간..."

    전민재. 지금도 진우와 하늘이 사이에 끼어서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친구.

    유순한 성격으로 누구와도 싸우는 일 없이 지낸다는게 특징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면 중재 역할을 맡곤 했다.

    "그래도 어제 한번 그 난리를 피웠으니까 오늘 정도는 괜찮겠지."

    "......"

    "아, 오리 땅콩소스 볶음이네. 이 학교는 왜 오리를 땅콩에 절지 못해서 안달인 걸까."

    "......"

    "식판 안 들어?"

    "......"

    이제 식기를 집어들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시아는 돌처럼 굳어 있었다.

    대답도 없는 그녀를 의아하게 생각한 유빈이 시아가 보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썅, 너 지금 말 다했어?"

    "그럼 아닌 것 같아?"

    길다란 식탁을 두고 마주앉은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웅성웅성. 주변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와, 씨. 돌겠네. 너 또라이냐? 그건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서 삿대질하는 임진우. 그걸 마주 노려보는 김하늘. 일촉측발의 상황에서 안절부절 못하고있는 전민재.

    시아의 판단과 행동은 신속했다.

    "힘내."

    "어? 아니, 잠깐."

    엮기기 싫은 그녀는 응원 한마디만 던지고 신속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절묘한 타이밍에 두 사람이 유빈을 발견했다.

    "유빈! 들어봐!"

    "유빈! 이리로 와봐!"

    망했다.

    유빈은 울고 싶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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