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결정
서울 청담동에 자리한 레스토랑.
띠리리 띠라라─
피아노 소리가 홀 안에 잔잔히 퍼진다.
저벅저벅.
피아노의 선율에 맞춰 발을 옮겼다.
“음─”
콧노래가 공기를 타며 피아노 소리와 어우러져 화음을 이뤘다.
“오셨습니까.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어디선가 본듯한 낯익은 얼굴이 다가와 허리를 낮춘다.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 오다가다 본 사람으로 짐작됐다.
“안내 부탁드리죠.”
그의 안내를 받아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홀은 상당히 넓었다. 가운데 분수대도 있었고, 그걸 중심으로 예술작품이라 생각이 드는 조각들이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었다.
저벅저벅.
어느 정도 걷자, 라운지와 가까워갔다. 룸으로 안내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뻥 뚫린 쉼터로 느껴지는 공간에 도착했다.
그곳에 하얀 머리의 중년인이 자리에 앉아, 창 너머의 야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권혁수 회장.’
범상치 않은 힘이 느껴지는 중년인은 딱 봐도 권혁수 엔지그룹 회장이었다.
“회장님, 모셔왔습니다.”
남자가 다가가 또 허리를 숙여 왔음을 알렸다.
그제야 권 회장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허허.”
“늦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허허, 아닙니다. 안산에서 여까지 오는데 당연히 늦지요. 괘념치 마시고 여기 앉으시죠.”
험악할 거라 예상했던 분위기와 달리 그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어떤 희망의 빛을 보고 있는 것인가?
그건 욕심일 건데, 많은 걸 바라지 않길 바라며 자리에 앉았다.
권 회장의 인상은 대체로 고집불통 할아버지 냄새가 진하게 났다. 특히 뱀과 닮은 날카로운 눈은 기회가 되면 물어버릴 기세로 일반인이 상대하기에 굉장히 부담스럽게 생긴 얼굴이었다.
“권 회장님께서 저를 무슨 일로 보자 하셨을까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뻔히 아는 부른 목적에 대해 물었다.
두 눈은 그의 얼굴을 살피며.
“젊은 분이 참 구렁이를 많이 키우십니다. 잘 아실 분이 그리 말씀하시니, 제가 다 무안합니다. 허허.”
“제가 눈치가 좀 없습니다. 찾은 이유를 말씀해 주시면 성심성의껏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허허. 이거 참. 이런 경우는 또 처음입니다. 뭐 좋습니다. 말씀드리죠. 엔지카드, 인수하시겠다 들었습니다. 철회해 주시지요.”
눈가 주변이 어둡다. 수틀리면 막 나올 분위기를 풍겼지만, 가까스로 참는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눌렀다.
“그 문제였군요. 그 부분은 이야기가 끝난 걸로 압니다.”
“이야기가 끝났다니요? 그 무슨 말입니까?”
“제 마음은 이미 산업은행을 통해 알렸습니다. 언론에서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겁니다.”
“제가 가만히 있을 거라 보십니까?”
“방법이 있다면 자유로이 움직이셔도 됩니다. 굳이 저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인내심은 어떨까?
“말장난은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쯤 하자.
“말장난을 한 적은 없습니다. 제 말을 회장님께서 받아들이지 못한 것뿐입니다.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해두지만, 전 엔지카드를 원합니다. 기업의 자본을 관리하지 못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기업을 운영하기보다, 보다 나은 환경에서 제대로 굴러가게 해야 맞는 거 아닐까요? 지금 엔지그룹에서 관리하는 카드사의 부채도 제대로 갚지 못하는 상황인데, 그걸 붙잡고 놓지 않겠다는 의미는 그룹 자체를 날려버리겠단 소리와 같습니다. 쌍마처럼 말이죠.”
자동차사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실적도 따라와 주지 않는 상황에 욕심 때문에 끝까지 부여잡고 있던 쌍마기업은 자동차로 인해 막대한 부채를 지고 역사 뒤로 밀렸다.
‘뭐, 엔지는 그럴 일은 없지만.’
“이거 너무 선비처럼 구십니다? 전부 터놓고 이야기하시지, 그리 둘러 이야기하면 제가 좋게 보리라 보셨습니까?”
“제가 너무 착하게 말했나요? 그런 기억은 없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엔지카드 제가 가져갑니다. 부도 처리하는 것보다는 이게 좋을 거라 보는데, 아닙니까?”
“......원하는 걸 말 하시오.”
“엔지카드.”
“정말 이러실 겁니까?”
“말하라 해서 말씀드렸는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군요. 전 정말로 엔지카드를 원합니다. 엔지카드 말고는 엔지그룹에서 더는 얻을 게 없다는 걸 회장님께서도 잘 아실 텐데요?”
KJ그룹이 부족한 건 카드사.
기술적인 면은 대부분이 KJ가 앞서가는 상황이기에 아쉬운 부분은 없었다.
“......”
주기 정말 싫은가 보다. 얼굴에 싫은 기색을 고스란히 내비친다.
“좋습니다. 그럼 이건 어떠십니까? 현실적으로 엔지그룹은 무척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상황입니다. 카드를 들고 있어 봐야 적자만 발생하고, 이래서야 운영조차 힘들 겁니다. 그래서 제안을 드리죠. 카드 저한테 주시고, 대신 엔지그룹에 한하여 기기 할인 혜택과 포인트 점수를 올리는 한편 대대적으로 엔지그룹의 물건을 KJ그룹 차원에서 홍보를 해드리죠. 이 정도만 하더라도 꽤 파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카드 포인트가 쌓이면 물건 재구매율이 증가한다.
게다가 엔지그룹에 대한 홍보를 해준다면 분명히 매출 증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원하시면 2% 내 투자를 할 수 있게끔 해드리죠.”
육성그룹은 5%, 엔지그룹은 2%.
적당한 수치다.
“음...”
이제야 마음이 동했는지, 얼굴에 처음으로 고민의 기색이 짙어졌다.
싫은 기색이 가득하던 얼굴이 몇 가지 조건으로 짧은 시간 내에 바뀔 수 있다는 게 참 재밌는 현상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아무래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봐야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죠. 계산은 회장님이 하시는 거 맞으시죠? 전 배가 고파서 먹고 가겠습니다.”
“그러지요...”
“2인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러리다.”
권 회장이 자리를 비웠다. 어찌나 빨리 걷던지 시야에서 금세 사라졌다.
“윤희야, 오늘 강남에 있다고 했지? 여기 청담동인데, 오랜만에 데이트하자.”
권 회장 덕분에 공짜로 맛있는 식사를 하게 됐다.
돈 굳었다.
***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집으로 복귀한 권혁수는 아들을 불러 앉혀 청담동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의견을 물었다.
“솔직한 말씀으로 KJ에 넘기는 게 우리 입장에서 가장 좋은 선택지라 생각합니다. 정치권에서도 영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KJ에 잘 보여야 당선될 확률이 높다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닙니다.”
KJ그룹이 정치권에 힘이 생긴 데에는 미국의 영향도 컸지만, 정확히는 현 정권이 들어서고부터라 할 수 있었다. 북한과 통일은 절대 무리라 외쳤던 일들이 KJ그룹 하나로 현실화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론의 충성심.
국민들은 KJ그룹 김정수 회장의 팬이 되어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다.
“지금 육성그룹과 KJ그룹은 가족으로 이어졌습니다. 김정수 회장과 이윤희는 제 아들과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습니다. 우리도 충분히 김정수 회장과 가족사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내 그 생각을 못 했어.”
눈이 번쩍 떠졌다.
경쟁만 했지 가족을 생각지 못했다.
권혁수는 크게 감탄하며 그제야 어둡던 얼굴을 펼 수 있었다.
똑똑─
대화가 어느 정도 끝날 시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죄송합니다. 이건호 회장님 전화입니다. 급히 바꿔 달라는 말씀에...”
“전화 돌리게.”
이 타이밍에 육성에서 전화라.
“아마 카드 문제로 전화를 한 거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 늙은이가 내게 전화할 이유가 그것밖에 없으니.”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권혁수는 나직이 중얼거리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납니다. 권혁수.”
-오랜만입니다. 요즘 도통 모임에도 나오지 않으시고. 얼굴 보기 힘듭니다 그려.
“요즘 재미가 참 좋으시겠습니다. 잘난 사위 얻으셔서.”
정말로 부러웠다.
자신에게 딸만 있었어도 시도라도 해보는 거였는데, 이어질 구멍이 하나 없었다.
이래서 딸 하나는 꼭 낳고자 하였는데, 이놈의 염색체는 XY로 가득했다.
-허허. 재미랄 게 있겠습니까? 성인끼리 만나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뿐이지요.
말은 저리해도 목소리는 그렇지 않다. 목소리에서 행복이 진하게 묻어났다.
“내게 전화를 한 이유가 뭡니까? 사위 자랑이나 늘어놓으려고 한 건 아닐 테고.”
-오늘 우리 사위를 만나셨다고요.
“......”
-내 사위지만, 상당히 무서운 아입니다. 사위가 아니었다면 엔지카드 인수전에 육성이 끼어들려 했었는데, 나쁘지 않은 조건을 제시해 인수전에 나서지 않기로 했습니다. 주변 기업에도 나서지 말 걸 당부하던 차에, 오늘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하게 됐습니다.
방금 전과 달리 진심이 느껴졌다.
걱정으로 가득한 음성이 귓속에 닿자,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건호 회장이 어떤 인물이던가?
그의 말 한마디면 정치계 거인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었다.
백전노장이 바로 그이기도 하였다.
겁이라고 입에 달고 살아본 적 없는 늙은이가 ‘무섭다’라며 직접적인 표현을 하였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더군요. 팁을 말씀드리자면 매각대금으로 평생 지분을 들고 있으세요. 매도하지 마시고. 요즘 엔지그룹도 승계작업에 들어가고 있을 터인데, 이만한 좋은 기회도 없을 겁니다.
“확실히... 내게 전화를 한 건, 날 설득하기 위함이요?”
-설득보다 조언입니다. 엔지그룹을 유지하고 싶다면, 적정선에서 협의하길 바랍니다.
“조언이라... 알겠소.”
-이번 일 잘되길 바랍니다. 조만간 식사나 하시죠.
“끊으리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우리의 시대도 끝이라 이 말인가...”
허탈했다. 지난 시간들이.
지금의 그룹을 만들던 순간들이 허무하게 다가왔다.
“오권아.”
“네.”
“네 이름으로 KJ카드 지분을 인수하거라.”
“네?!”
“승계에 도움이 되겠지.”
아, 짧은 감탄이 터졌다.
“감사합니다.”
KJ그룹에 모르는 정보가 있는 모양이다.
권오권은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전했다.
승계작업에 큰 도움이 될, 기회를 준 것에 대하여.
***
-KJ그룹 베어링스 은행 카드 사업부 분리, NG카드 전격 인수!!
-베어링스 카드 국내 점유율 1위로 올라서다. 그간 축적해 온 자본을 모두 쏟아부은 KJ그룹은 국민들의 사채를 지원해 줌으로써 금융위기를 막아냈다.
“베어링스 카드는 앞으로 유럽과 미국에 걸쳐 최고의 서비스를 갖춘 카드사로 거듭날 겁니다. 해당 카드는 장외에서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며, 투자자분들과 함께 성장해 나가는 기업이 될 겁니다.”
요즘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자주 맞는다. 이제는 모르는 기자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매번 마주치는 기자들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KJ는 세계 유일무이한 최고의 금융기업이 될 겁니다.”
금융에서 다음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이제 다음은 리먼 브라더스가 남았다.
‘그것만 가져오면, 명실상부 최고의 금융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1850년 설립되어 미국의 네 번째로 거대한 글로벌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
“그리고 자금난에 시달리는 그 밖의 회사들까지 KJ가 먹는다.”
인터뷰장을 빠져나오며 주먹을 강하게 쥐며 의지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