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육성-엔지, 윈-윈
“...헐.”
“풉─”
형님과 앉아 생각 없이 말하다 일어난 언행 예고 일치 사태.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온 표정입니다. 그 표정은 대체 뭐죠? 좀 불쾌하군요.”
너무 어이없어 당사자가 앞에 있음에도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바라보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죄송하게 됐습니다. 좀 황당하기도 하고, 암튼 이리 앉으시죠.”
“죄송합니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뇌가 정지가 된다는 말, 실제로 경험해 보니 알 것도 같다.
권오권 대표에게 행동에 대한 잘못을 사과했다.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그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전생에 대표님은 절대 양반이 아니었을 겁니다.’
라고.
“큼.”
자리에 앉으며 헛기침을 하는 권오권 대표.
그 타이밍에 와서는...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미안함과 황당함이 누르는 공기 속에 형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권 대표에게 건넨 시선을 돌려 형님에게 옮겼다, 다시 권 대표에게 향했다.
“...중히 할 말이 있어 왔는데, 선객이 와있을 줄 몰랐습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룹에 있어 꽤 중대한 사안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뻣뻣하게 세워진 권 대표의 고개가 내려갔다. 그도 스스로의 실수를 안 모양.
서로가 불편하던 상황에 그제야 분위기가 살짝 풀렸다.
“대체 뭔 일이기에 엔지그룹 대표님께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엔지와 육성은 경쟁상대가 아니었습니까?”
육성과 엔지그룹은 겹치는 사업군이 많다. 대부분의 사업군이 부딪혔다.
오죽하면 한때 컴퓨터 본체는 육성이, 모니터는 엔지가 좋다는 말이 나돌며 세트가 아닌 따로 구매하는 고객들도 꽤 많았다.
가전제품은 엔지를 더 선호하는 모습이지만.
이조차 경쟁품목.
“큼, 때로는 협력관계가 될 수도 있는 일이지요.”
“협력관계라...”
형님의 눈이 내 쪽으로 당겨졌다.
눈이 마주친 순간, 놀람이 깃들었다.
내가 생각한 부분들이 맞아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일 터.
“육성이나 KJ 정도면, 제가 왜 왔는지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핸드폰 사업 철수 소문이 맞는 모양이군요.”
“딱히 숨길 일도 아니죠. 짐작할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니.”
“저를 찾아왔다는 건, 내게 핸드폰 사업을 넘기겠다 뭐 이렇게 생각하면 될까요?”
직접 찾아와 사실을 인정하는 모습은 단 하나를 의미했다. 사업을 넘기겠단 의미.
그게 아니고서야, 권 대표가 여기 있을 이유는 없다.
“맞습니다. 육성에서 원한다면 제값을 받고 넘길까 합니다.”
“제값을 받겠다? 뭔가 말이 이상합니다?”
시장에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후퇴하는 기업이 제값을 원한다는 건, 욕심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이 대표에게 가장 필요하다 생각하는데,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을 하십니까?”
“E육성의 설립 이유,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 충분히 예측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제 말이 틀렸나요?”
사업가나 정치인들은 모두 얼굴에 가면을 수십 개는 쓰고 다닌다.
권 대표는 그 중 한 개를 벗어 협상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주 재밌는 소리를 하십니다.”
“이거 아마추어처럼 왜 이러십니까? 서로 잘 아는 사실인 것을, 숨겨 무엇하겠습니까?”
서민들이 모르는 사실 하나.
재벌끼리는 후계자가 기업승계를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기업에는 손을 대지 않고, 인수에 방해하지 않는다.
이건 그들만의 암묵적 룰이다.
이 법칙이 깨지면, 지금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후계자는 사라지게 될 터다.
아니면 비싼 돈과 세금을 바쳐야겠지.
여하튼, 그런 민감한 부분을 권 대표가 언급하고 나선 것이다.
‘그만큼 엔지그룹이 어렵다는 의미겠지.’
좀 더 지켜보자.
“이거 좀 불편한 대화가 될 거 같군요.”
“불편할 게 뭐 있습니까? 서로가 원하는 걸 얻으면 되는 자리인 것을.”
“그래서 추락하는 기업을 현 시세에 맞게 인수를 하면, 방해하지 않겠다... 뭐 그런 걸로 나와 협상을 벌이겠다 그런 건 아니겠지요?”
형님의 눈빛이 스산하게 바뀌었다.
확실히 이건 선을 넘은 행위.
권 대표의 다음으로 이어질 말에 온 신경이 집중됐다.
“나 권오권입니다. 설마, 그런 양아치와 나를 비교하는 건 몹시 불쾌하군요.”
“그렇다면 내게 뭘 원하는 게 있다는 소리인데? 한데 그 기업을 제값에 인수해달란 터무니 없는 소리를 내게 한다? 계산법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상황이 점점 복잡해진다.
그는 무엇을 원하기에 기업을 제값에 받기를 원하는 걸까? 그것 말고도 줄 것이 있는가?
생각을 해보지만, 딱히 얻을 게 없다.
흥미로 가득하던 시선이 지워지고, 얼굴에는 경계심으로 채워졌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좋은 겁니다. 우리 그룹의 인터넷망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드리죠. 이 정도면 핸드폰 사업부를 제값에 받을 권리는 충분하리라 봅니다.”
나름 머리 좀 썼다. 그렇지 않아도 인터넷망이 부족하지 않나 싶었는데.
인수를 한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건 안 되겠지.’
그래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스마트폰 시장에 필수라 할 수 있는 망 설치는 꽤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기도 하였고, 비용면에서도 상당하기에 지금 제안은 꽤 만족스럽다.
“이제야 저울이 좀 맞춰집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한 거래가 맞네요.”
“또 있습니다.”
또?
“컴퓨터 사업부도 함께 처분하지요. 이는 할인된 금액으로 드릴까 합니다.”
“음... 이게 목적이었군. 엔지에서 진짜 바라는 걸 말하시죠.”
“배터리 기술 우리에게 맡겨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OEM을 자처하겠습니다. 지금 육성에서 생산하는 컴퓨터처럼 말입니다.”
“지금 고작 컴퓨터 사업으로 배터리 기술을 가져가겠다는 겁니까? 어이가 없군.”
음, KJ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
하나, 육성에 있어서는...
‘너무 독점도 좋지 않겠지. 육성은 이미 충분히 이득을 본 상황. 결국 내가 호구와 같다는 의미인데. 로열티만 충분하다면...’
“형님, 전 나쁘지 않다 봅니다. 너무 우리가 독식해 먹는다면 추후 크게 배탈이 날지도 모릅니다. 물론, KJ그룹이 모든 시장에 걸쳐 반독점 체제를 구축하고 있지만, 대신 기업들에 기술을 대여해 뒤떨어지는 기술력을 보조해 주고 있지요. 왜 그런다 생각하십니까?”
“......?”
“정치권이 영원히 우리의 아군이 되리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걸 우리가 다 해먹으면 기업들은 반발하게 될 것이고, 이는 이슈화가 되어 공론화될 겁니다. 그렇다면 정치권에서 아주 좋은 먹잇감을 찾았다며 귀찮은 일을 만들겠지요.”
정치권조차 무시 못 할 권력이 내게 있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정치권을 무시하고 사업을 한다는 건, 무척 피곤한 일이다.
최대의 이익을 보장받으며, 적당히 기업들과 나눔 생활을 통해 정치권에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 것.
이것이 KJ그룹이 걷고 있는 방향이었다.
“육성과 KJ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건 두 가문에 결코 좋지 않습니다.”
“아주 아버지 같은 소리만 하네. 좋아, 내게 도움을 준 것도 있고 한 팀이니. 네 뜻대로 하지.”
“감사합니다, 형님. 이것으로 형님이 육성을 인수하는 게 더욱 쉬워졌네요. 그리고 권 대표님.”
형님께 쏟은 신경을 권 대표에게 옮겼다.
“말하시죠. 김 회장님.”
“KJ그룹의 기술을 가져다 쓴다는 건, 엄청난 가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로열티를 제공한다 해도 현 거래는 무척 불공한 거래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KJ그룹이 이득을 볼 수 있는 건, 단순히 매출이 늘어난 정도.
다른 부분으로 이득을 보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육성과 관계된 일을 나 하나 잘살아보겠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일.
편은 많을수록 좋다.
“정산은 밀리지 말 것, 우리의 허락 없이 기술을 멋대로 복사하지 말 것. 끝으로 외부로 기술을 불법 유출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엔지그룹과의 거래는 없어질 것이고, 그 부분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이에 동의를 한다면 KJ배터리 생산을 대표님께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동의합니다.”
“오늘부터 잘 부탁드리지요.”
KJ그룹에 새로운 파트너사가 생겼다.
그리고 육성은 스마트폰 생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시장흐름도 나쁘지 않게 흐르고 있어. 이 정도면 당분간 문제는 없겠어.’
만족한 결과 속에 계약서에 서명을 할 수 있었다.
***
2002년, 가을 선거철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 이제 가을의 끝 10월 말.
단풍이 지는 시기.
“날이 많이 추워졌죠.”
북한을 통해 백두산에 올랐다.
“추운 날 올라왔으니, 추울 수밖에.”
감성이 메마른 말투의 주인공은 정남이 형님.
정남이 형님과 백두산을 오르며 아래를 살폈다.
“그래도 이렇게 오르니 좋네요.”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담았다.
“저기 연결되는 철로들을 봐요.”
시간이 흐른 만큼 북한과의 철로 공사도 어느 정도 진척을 보였다.
백두산 근방까지 철로가 연결이 되었다.
기차를 타고 백두산의 경치를 감상하며 중국의 문턱에 다다르는 날도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이곳을 지나 저리로 쭉 뻗어 러시아와 중국으로 나눠지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아주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겠죠. 모든 화물이 북한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가게 될 터이니, 북한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게 될 겁니다.”
앞으로 1년 정도 남았다. 지하를 파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지상을 통해 연결되는 철로이다 보니 공사는 빠르게 이어졌다.
“네가 잘한 거겠지.”
“후후.”
우리는 천천히 걸어 위로 올라갔다.
“실은 제가 이곳에 오자 한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집에서 말씀드리기에 좀 그래서. 나와서 말씀드리는 게 좋겠더라고요.”
“또 무슨 말인데, 그리 무게를 잡지?”
정남이 형이 바싹 경계를 한다.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위원장님과 함께 있는 시간... 많이 만드세요.”
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나에게 도움을 주는 두 사람이 가족의 정을 좀 더 잘 나눴음 좋겠다.
한국과 달리 무척 딱딱한 두 사람이니.
가족의 정을 나누기 바란다.
“갑자기 그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갑자기 이런 말을 해대니 이해를 하지 못할 터.
오히려 이상하게 들려올 것이다.
“너무 안타까워서요. 한국은 그래도 종종 놀러 가서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거나, 가족끼리 모여 수다를 떨며 정을 나누는데 위원장님과 형님 사이에는 너무 높은 벽이 느껴져요.”
차마, 2011년에 사망하게 되리라고 말은 하지 못하겠다.
“그랬음 좋겠어요. 후회하지 않게. 그리고 위원장님을 쉬게 하고, 형님이 위원장 자리에 오르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라 봐요.”
“너...”
“절대 나쁜 의도로 말한 거 아닙니다. 요즘 꽤 힘겨워하시기에 물려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 봐요. 아무리 엄격해도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
“아 날씨 좋다.”
추운 날씨이나, 마음속에 담아 두고 갈등하던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마음이 한결 시원해진 기분이다.
반면, 정남이 형은 아닌 거 같지만.
“그래도 부모입니다. 정남이 형이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건, 모두 위원장님이 뒤에서 보호를 해줬기에 가능하다 봅니다.”
“......”
입을 봉했는지, 아무 말이 없다.
내 말 속에 숨은 뜻을 찾느라 복잡한 모양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슬슬 추워지기 시작하네요. 바람은 이쯤 쐬고 이만 내려가죠.”
변화하고 있는 북한의 역사 속에 김정일 위원장에게도 변화가 찾아오기를 바란다.
어쩌면 이 문제가 통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안정적인 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