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2002년 서서제조
탈도 많고 좋은 일도 많았던 2001년의 해가 지나, 까치가 지저귀는 2002년 2월이 되었다.
세계는 조금씩 대출에 대한 우려가 담긴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만수무강하세요.”
설날 아침, 결혼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첫 설날 아침이다. 윤희와 어여쁘게 한복을 입고 세배를 하였다.
“이모부, 이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또 다른 식구가 찾아와 절을 하였다. 주인공은 이제 사장님 소리를 듣고 있는 승원이 형과 경리로 일을 돕고 있는 효린이 누나였다.
“이리 모두 모이니, 참 좋구나. 정수는 이제 적당히 일하며 몸 생각도 좀 하고, 새 아가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잘 챙기길 바란다. 이건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받거라.”
“아, 아니에요. 아버님.”
덕담을 하시고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예전부터 저걸 해보고 싶어 하시던 아빠의 이야기가 떠올라서다.
‘저걸로 어제 그렇게 고민하셨다지. 하여튼 귀여우시다니까.’
엄마도 옆에서 살며시 웃으신다.
“아빠 성의니까, 받아. 뭣하면 미래 태어날 아이를 위해 저금하고.”
가진 현금 재산만 천억 원대가 넘는데, 저금이라고 말하는 게 조금은 우습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재촉에 못 이겨, 봉투를 받아든 윤희다. 생각보다 봉투가 제법 두꺼웠다.
“승원아, 효린아.”
다음 차례는 형과 누나가 되었다. 우리는 슬쩍 옆으로 이동해 둘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네, 이모부.”
“말씀하세요.”
승원이 형이 말하고 뒤를 이어 효린이 누나가 말했다.
“우리가 중간에 좋지 않은 일이 있어, 서로 얼굴을 붉혔지만, 이제 그건 마음에 담아두지 말길 바란다.”
“......”
“......”
분위기가 조금은 무겁다.
“그리고 부모님을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본래는 그리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어. 돈에 취해, 사람의 정을 잊게 되어 잠시 어긋난 행동으로 빚어진 실수다.”
“......”
“......”
그동안의 아빠의 고민이 느껴진다.
저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최근 면회를 다녀왔다. 많이 반성을 하고 있더구나. 둘이 나오면 너희 둘이 잘 돌봐줬음 한다. 그렇다고 모든 걸 내어줄 정도로 잘하란 말은 아니다. 숨구멍만 붙게 해달란 말이야. 그래도 그간 너희 둘을 키워준 부모 아니더냐?”
“네, 말씀 잘 새겨듣겠습니다.”
“네. 이모부.”
“잘 커줘서 고맙다. 하고 있는 사업 앞으로 잘 되길 바란다. 더 하면 덕담이 아닌 잔소리가 될 터이니 이만 하고, 자 이건 나와 네 이모의 성의이니 받아 가거라.”
각자에게 봉투가 전달됐다. 둘은 고개를 작게 숙여 보이고는 봉투를 품 안에 넣었다.
“아버님, 떡국 드시죠. 언니랑 오빠도 식사하세요.”
윤희가 눈치껏 나서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싱긋 웃는 모습은 모든 걸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상큼한 미소였다.
내 마누라지만 참 예쁘다.
“그래요. 모두 가요. 배고프네요.”
우리 부부의 떠밀림에 가족들은 모두 식당으로 향했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둔 우리의 설날은 언제보다 평화롭고 풍족한 기쁨으로 넘쳐났다.
***
“안녕하세요, 사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날이 끝나고 모두가 출근하는 이른 아침. 유독 기운이 넘치는 승원의 목소리가 공장 내 쩌렁쩌렁 울렸다.
“서 사장도 복 많이 받게.”
“감사합니다. 사장님.”
이웃 사장들이 승원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 주었다.
“그런데, 정말이야? 저 사람이 KJ그룹과 관련이 있다는 게?”
“글쎄 그렇다니까.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그때 어찌나 심장이 떨렸는지 모른다니까.”
승원이 지나가는 걸 눈여겨본 몇몇 사람들이 찾아와, 승원과 인사를 나눈 사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승원도 모르는 틈에 관련 업계에 소문이 쫙 퍼졌다.
“허허, 그런데, 왜 저리 있을까? KJ와 아는 사이면 최소 몇천은 해먹을 텐데.”
그러다 의문을 표하는 중년남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이제야 기억났네. 저 사람. 저 사람 그 사람 아냐.”
“홍 이사, 뭐 아는 거라도 있어?”
그때 홍 이사라 불린 중년인이 손바닥을 짝 치며 무언가 떠올렸다.
그의 행동에 중년남성을 포함해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가졌다.
“이 사람들 보드라고. 이리 눈이 어두워서야. 그 외 있잖아. KJ그룹에 사기 치려다 잡혀간 사람들. 저 사장이 그 사람들 자녀들 아녀.”
“뭐?”
“진짜야?”
“그렇지. 그래서 업계에서 절대 채용하지 말자고 선을 그었다고. 조용하더니만 여기서 저리 있었네.”
홍 이사가 승원이 들어간 건물을 바라봤다.
서서제조 간판이 눈에 들어오고, 남녀가 대화를 나누며 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럼 그 회장과 부모들은 왜 왔대? 돼지 콧구멍에 아주 수표를 꽂아 넣던디?”
“그게 정말이야?”
“그럼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내서 말을 할까?”
“허허, 저기 개업식에 참여를 했다 이 말이지?”
홍 이사의 눈빛이 싹 변했다. 장난스레 짓던 눈빛이 달라졌다.
“좋은 정보 고마워. 급한 일이 생겨서 급히 가봐야 쓰것네. 그거 납기 놓치지 말고 잘 좀 해줘.”
“아따, 뭔 양반이. 알았으니. 가봐.”
둘은 사이가 꽤 가까운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며 친한 친구들 보내듯 가벼이 대하였다.
홍 이사는 나가면서도 서서제조의 간판을 눈에 담았다.
‘031-XXX-XXXX. 오케이.’
홍 이사는 속으로 번호를 외우고는 잊을까 싶어 핸드폰을 꺼내 저장을 하였다.
“김 과장, 여기 한번 알아보고 물건 줄 거 있으면 맡겨봐.”
회사로 바쁘게 들어온 홍 이사는 번호가 적힌 종이를 김 과장에게 넘겼다.
“서서제조요?”
“그래, 그 태아정밀 바로 맞은편에 있는 신생이니까, 물건 맡겨보고 괜찮으면 계속 주문 발주 넣어.”
“혹시 이사님이 아시는 곳인가요?”
김 과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궁금한 부분을 물었다.
“아니 몰라. 모르니까 알아보고 넣어보라는 거잖아.”
“알겠습니다.”
“빠를수록 좋으니까, 서둘러.”
“네...”
“난 사장실에 다녀올 테니, 퇴근 전에 보고해.”
“네...”
홍 이사는 다시 사무실을 나가 사장실이 있는 건너편에 자리한 본관으로 향했다.
“형님. 여기 앉아 내 말 좀 들어봐요.”
홍 이사는 사장실에 들어서자 바로 사장의 손을 붙들고 소파로 이동했다.
“뭔 일인데, 그래.”
홍 이사의 친형이자 현 태광기계의 대표인 홍수형은 동생인 홍수빈 이사의 재촉에 인상을 구겼다.
“내가 누구를 봤는지 알아요?”
“누굴 봤길래, 일하는 사람 붙들어 앉히는 거야?”
“서교원 사장 기억하죠?”
“그 사기꾼은 왜?”
심드렁한 표정이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 아들을 내가 봤다 이 말이에요.”
생각보다 반응이 약한 형의 모습과 달리 홍수빈은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지금 그 말 하려고 내 일을 방해한 거야?”
하지만, 이번에도 반응은 시큰둥. 그러다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작 저 말을 하기 위하여 붙잡혔다 생각하니 짜증이 확 치밀었다.
“아따, 끝까지 들어봐요. 글쎄. KJ그룹에 사기 쳐서 그의 가족들 다 매장된 줄 알았는데, 그 김정수 회장이 서 사장의 자녀들을 돌보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게 우리와 뭔 상관인데?”
더는 이야기를 나누기 싫은 기색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겼다.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어허, 이 형님 보소. 사장이라는 양반이. 잘 들어봐요. 과거야 어떻든, 두 집안이 화해를 했다 이겁니다. KJ가 밀어주고 있고. 그럼 그 회사는 어떻게 될 거 같아요?”
홍수빈은 급히 그의 손을 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음...”
이번엔 방금 전과 달이 진지하게 생각을 해봤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왠지 좋은 방향으로 이어붙일 수 있을 거 같았다.
“얘기해봐.”
“최소가 KJ그룹 협력사가 되지 않겠어요?! 딱 보니 그 사장의 역량을 테스트해보는 것 같은데, 우리가 투자를 해 좀만 밀어주면 금방 성장하지 않겠소?”
“듣고보니...”
“키워서 성장을 시키고, KJ그룹의 협력사에 우리도 손을 얹자 이 말입니다. 재수가 좋아 그 회사가 상장이라도 해봐요.”
“오... 그렇구나.”
동생의 이야기를 들은 홍수형 대표는 박수를 짝 쳤다.
미쳐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을 홍수빈이 이사가 떠올렸다.
만약, 이게 성공을 한다면 태광기계는 KJ그룹과 연관이 있는 기업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추가로 하자면.
“그 사장을 만나보는 게 좋겠어. 제 애비보다 낫네. 후후.”
“이번 일 잘되면 저도 좀 챙겨주는 거 잊지 마쇼.”
“이번에 실적으로 올려 주마.”
“흐흐. 난 좋은 거 전했으니, 이만 가봅니다.”
홍수빈은 기분 좋게 웃고는 자리를 떴다.
“이거 완전 대어를 물어왔어. 오랜만에 기특한 짓을 했네.”
홍수형의 입가에도 웃음기가 감돌았다.
***
위이이잉─
기계 소리가 들려오는 현장, 서승원은 난로를 등지고 쇳가루를 맞으며 선반을 조작해 환봉을 깎았다.
“그거 얼마나 걸려. 사장이 물어보는데.”
“곧 끝난다고 말해줘.”
지금 서서제조는 딱히 고정된 영업망이 없었다. KJ그룹에서 일부 자재를 발주를 하겠다 했지만, 서승원은 딱 잘라 거절했다.
-아직 우리 회사는 KJ그룹과 거래하기에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서서제조가 최소 우량기업에 올라서게 된다면, 그때 도움을 받겠습니다. 그때까지 제 실력으로 올라서고 싶습니다.
이것이 KJ그룹을 거절한 이유이다.
지금은 근방에 자리한 가공업체에서 외주를 받아 간단한 가공만을 해주고 있었다.
그리 큰돈은 되지 않고 유지만 하는 수준이지만, 그만큼 더욱 열심히 달렸다.
“알았어~”
효린도 동생을 응원하며 더욱 열심히 일했다. 최소 동생의 성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세심하고 꼼꼼하게 일했다.
드르륵─
현장 문이 열리며 차가운 공기가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시선은 설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잠시 사무실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이것만 마치고 올라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천천히 하세요. 전 여기에 있겠습니다.”
들어온 이의 가슴팍에 태광기계가 적혀 있었다.
남자는 다름 아닌 홍 이사의 지시를 받고 서서제조를 찾은 김도진 과장이었다.
김도진 과장은 일하는 그의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봤다.
시간은 어느덧, 10분 정도가 지났다.
“죄송합니다. 제가 혼자 일하다 보니. 한데 어떻게 오셨죠?”
작업을 끝낸 승원이 고개를 돌려 김도진 과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전 태광기계 김도진 과장입니다. 신규거래처를 개발하는 중에 이곳을 발견해 방문을 드렸습니다. 혹시, 사장님 되십니까?”
“네, 제가 이곳의 사장 서승원입니다.”
승원은 옷에 붙은 ‘태광기계’ 로고를 보는 순간부터 떨리기 시작한 심장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 과장 직급에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나 서승원 놀란 내색을 감추기 위하여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태광기계에서 신규업체 개발을...’
태광기계와 거래를 트기만 한다면 고정수입이 잡히는 것과 같았다. 안산 내에서 그런대로 규모를 갖춘 회사로 알려진 이곳은 동종 업종 거래를 하고자 하는 중소기업순위 50위 안에 뽑히는 알짜 회사였다.
서승원은 명함을 건넸다. 승원의 눈빛이 먹이를 노리는 굶주린 짐승으로 변했다.
‘이건 기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