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김정남
잔잔하게 들려오는 바닷소리를 들으며, 호텔 안은 바깥과 달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멜로디가 공기를 타고 흘렀다.
김정남과 이동하는 장소는 차츰 어두워져 이내 사람들 얼굴만 간신히 확인할 정도가 되었다.
붐붐!!
노랫소리를 들으니 나이트 클럽으로 짐작됐다.
“너무 시끄러운데, 다른 데로 가시죠.”
단둘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에 그리 좋다 보기 힘든 장소였다.
앞서가는 김정남을 잡아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를 권했다.
“좀만 더 들어가면 조용한 장소가 나오니, 그리 걱정 마시오.”
처음으로 오는 장소가 아닌 모양이다. 발을 뻗음에 망설임이 없다. 그는 마치 자신의 집이라도 된다는 듯, 자유로이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여깁니다.”
출입구에 들어서고 5분 정도를 더 걸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서야 발걸음이 멈췄다.
“확실히 대화를 나누기에 최적의 장소네요.”
걱정과 달리 빵빵하게 들리던 노랫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다른 장소는 어떨지 모르나, 이곳은 밀실이라 부르기 아깝지 않을 정도 은밀하고 조용했다.
주변은 직원들이 지키고 있어 누군가 이야기를 엿들을 수도 없을 정도.
“이곳은 방음이 된 방이라,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습니다.”
김정남은 기대와 경계 사이에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룸 안은 잠시 적막감에 쌓이고.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이리로 데려온 건지 궁금하네요.”
그런 분위기 속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들어보면 알겠지요. 그쪽에서 내게 어떤 제안을 해올지는.”
그래도 눈치는 제법 있다 뭐 그런 건가?
매일을 위기와 경계 속에 살아와 그런지 눈치가 제법 좋았다.
이렇게 분위기를 깔아주면 좋지.
“말씀드리기에 앞서 오늘 만남은 정말 우연이란 점을 먼저 강조하고 싶네요. 아실지 모르지만, 여기는 애초에 우리 부부의 신혼여행지로 잡힌 곳입니다.”
“귀와 눈은 썩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의심부터 받고 대화를 하기에는 썩 내키지 않아 먼저 이야기를 꺼낸 점 양해 바라지요.”
어쨌거나 김정남은 왕(?)족에 나이도 많다. 예의는 갖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가 경계 없이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였다.
“어떤 이야기를 하실지 참 궁금합니다.”
“솔직히 여러 방향으로 궁금한 점들도 많습니다. 최소 4, 5개국어를 할 줄 아는 분이 왜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외를 떠돌고 있는지 말입니다. 북한 내에서 당신만큼 뛰어난 사람은 없다 보는데 말이죠.”
도박은 시작됐다. 아니 이걸 애초에 도박이라 말하는 게 이상할지 모르겠다.
조금은 위험할지 모를 민감한 질문.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알려진 대로 후퇴 없는 사람이군요. 보통은 이런 질문은 하질 않을 터인데. 그걸 저에게 묻는 이유가 궁금한데, 그 이유에 따라 대답을 해드리죠.”
끙. 대답이 아닌 질문.
첫 끗발이 개 끗발이 아니길.
‘어차피 지나칠 부분이긴 했어. 후에 나오는 민감한 대화보다 처음부터 풀어나가는 게 제일 좋아.’
가스라이팅, 블러핑, 샌드배깅, 슬로우 플레이라는 용어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초기에 잡고 들어가는 자세에서 상대의 패를 엿보고 그를 설득해 나가는 과정이라거나, 게임의 승률을 올려준다.
“일단 말하기에 앞서 호칭 문제를 정리하고 싶네요.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편하게 형님이라 칭해도 되겠습니까? 저는 편하게 불러도 좋습니다.”
첫 번째 단계.
친근한 호칭은 사람의 관계를 한층 더 발전을 시킨다. 벽을 치는 사람일지라도 친근한 호칭은 마음을 흔들어 놓기 마련.
“큼...”
이 사람 생각보다 마음이 약하다. 다 그렇다 말하기 힘들지만, 무언가 제시를 했을 때, 해당 질문에 대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성향은 순한 맛이다.
김정일 위원장과 성격의 차이가 큼을 알 수 있었다.
“전 외아들이에요. 살아오면서 형이나 누나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그래서 형이란 존재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약간의 연기를 겸하면 효과는 만빵.
거기에 더불어 연기의 달인이라 말할 수 있는 장칠성의 기억은 모든 부분에서 도움을 줬다.
탁월한 도둑이자 사기꾼다운 배짱이 얼굴에 둘렸다.
“호칭이라, 마음대로 하시죠.”
“하하, 그럼 형님은 편히 하세요. 전 이대로 말하겠습니다.”
첫 단추는 중요하다. 그리고 단추는 아주 잘 들어갔다.
슬쩍 귓불을 보니 붉게 물들어 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익숙지 않은 모습.
배다른 동생으로부터 무시를 받아온 그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수 있겠다.
“큼, 알았네. 그럼 내 질문에 답은?”
“전 북한의 다음 대 위원장은 형님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목적을 부여한다. 경멸의 시선을 받을지 모르겠으나, 확실한 목적성을 보이는 것만큼 신용할 요소도 없다.
이유 없이 접근을 한다? 그건 3살 어린이도 하지 않는다. 3살 어린이도 행동에는 이유가 따른다.
단지 무게의 차이일 뿐.
“역시 그거였나?”
그리고 이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매개체가 되어줄 것이다.
“겸사죠. 그리고 이번 사업은 도박성 모험입니다. 막말로 북한에서 악의를 가지고 막는다면 KJ가 받을 손해는 엄청날 겁니다. 전 그 돌파구를 마련 중이기도 하죠.”
너무 솔직했나?
좀 더 돌려 말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허, 하하. 내가 누구인지 잊었나?”
“잘 알지요. 북한의 다음 후계자.”
“... 내가 그 후계자 자리에 관심이 없다면?”
“저도 그렇고 형님도 위험해질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제가 북한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아주 잘 안다 봅니다. 후계자에서 밀린 경쟁자, 즉 위험 요소는 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형님이 그 자리에 앉지 못한다면 배다른 형제인 김정은이 방해꾼을 가만히 둘 이유는 없다 봅니다. 형님을 지지하는 세력도 가족도 위험에 처하겠지요. 자연히 형님을 도운 저도 위험에 노출이 될 겁니다.”
모든 대화를 세트로 묶었다. 그리고 그에게 미래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경고를 하였다.
“정은이를 만나봤나?”
“아니요. 그간 벌어진 역사들을 생각해 보면 답은 나옵니다.”
“그 발언 무척 위험한 거 알고 하는 소린가? 당장 내가 자네를 죽일 수 있어.”
“죽음. 그건 두렵지 않습니다. 한 번 죽으면 끝인데, 그걸 두려워할 이유는 없지요. 단지, 가족 정도는 신경이 쓰이네요.”
“... 그 눈. 진짜군.”
“죽음이 두렵다면 이런 일은 벌이지도 않습니다. 가진 재산으로 편히 살아가지, 위험을 감수하면서 살지 않죠.”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연기 이전에 내가 가진 신념과 생각은 연기가 아니다.
“좋아. 처음에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지. 난 북한이 싫어. 3대 세습은 바라지 않아. 세습은 북한을 가난하게 만들고 있어. 그런 가난하고 답답한 나라보다 이곳이 더 자유롭고 좋지. 얼마나 좋은가?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살 수 있는 이 삶이.”
걸려들었다.
내가 원하던 방향이다. 그래도 돌다리는 두들기자.
“네?! 3대 세습이 싫다니. 자칫 그 소리가 관련된 사람에게 들어가면 형님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연기는 그만해. 날 떠볼 생각은 하지 마. 이미 자네가 무엇을 원하려는지 알고 있으니까. 애써 내 비위에 맞출 필요 없어. 그걸 알기에 이런 말을 꺼낸 거니. 그리고 내 뜻은 몇몇 관료들도 알고 있는 사실. 술길 필요 없어.”
호, 이거 대담하니 오히려 내가 당황스럽다.
잠시 머릿속으로 주판을 두들겨 손실과 이득을 따져봤다.
결정하는 순간순간 위험 요소를 함께 가져갔다.
‘역시, 김정은을 밀어내고 김정남을 올릴 수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아. 미래를 위해서도 그렇고. 나를 위해서도 그렇고.’
그렇다면.
“연기는 아닙니다. 모든 게 진심입니다. 한데, 3대 세습을 거부하는 건 매우 위험한 발상이지 않습니까?”
“위험하지. 다른 놈들이 그랬다면 벌써 총살이겠지.”
“그럼, 그 말을 최대한 숨겨야 하지 않나요? 위험에서 벗어나기 힘들 거라 보이는데, 말입니다. 현 권력층에서 이를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당장 형님 가문만 하더라도... 음.”
“흥, 그깟 집안.”
어렸을 당시 김정남도 쓰레기에 문제아였다.
그런 생활로 인하여 그의 후계자 자리는 무척 위태로운 상황.
밑으로 동생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모를 일이나, 그는 지금 알게 모르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을 터다.
그런 과정에서 성격도 많이 변하고, 외국물을 많이 먹게 되면서 사고도 달라진 거로 짐작된다.
“전 우리가 아주 좋은 팀이 될 수 있다 봅니다. 형님은 세습을 끊고 전 사업을 이어가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고. 참 좋은 궁합이라 보는데, 형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음...”
“사실 전 북한과 한국을 하나 된 국가로 만들고픈 욕심이 있습니다. 사업가이기 전에 대한민국 사람이니까요. 만약 하나로 통합되면 중국도 미국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겁니다. 덩달아 북한은 지금보다 훨씬 부유한 국가가 되겠지요.”
독일이 대표적인 예이다. 서독과 동독이 하나가 되면서 독일의 경제력은 전에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돈은 제가 지원을 하겠습니다. 북한자금을 당겨 쓰기보다 한국 돈을 쓰는 것이 형님께도 좋아 보이는데, 어때요?”
“정확히 나를 어떻게 돕겠다는 거지? 단순히 돈으로 돕겠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북한이 가난하다 하여 돈에 모든 걸 넘길 만큼 멍청하지 않아.”
“그렇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의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형님이 위원장님의 신임을 받는게 중요하다 봅니다. 형님의 동생에게 쏠린 관심을 형님께 집중시키는 겁니다.”
“어떻게 말이지?”
“간단하지요. 당당히 밝히세요. 저와 사업을 하고 싶다고. 이번에 벌이고 있는 철도와 개성공단 사업을 형님께서 지휘를 하겠다고. 진짜 아닌 부분만 제외하면 형님이 하고자 하는 대로 형님의 입맛에 맞게 사업을 조율해 나가도록 하지요.”
이러한 과정에서 사업이 성공리에 끝난다면, 김정일은 김정남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터.
이때부터 잘못된 퍼즐을 새로이 끼워 맞추고 북한의 핵심 인물들을 아군으로 받아들인다면 김정남의 입지는 탄탄하게 굳어가리라.
“그리고 형님께 아주 큰 장점이 있습니다. 제가 돕는 이상 위조여권을 사용하지 않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디를 떠날 시 저에게 말해준다면 이동 수단을 확보해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으로 놀러 가 쫓겨나는 개쪽을 막아줄 예정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김정남으로부터 등을 돌린 결정적인 사건으로 자리를 잡게 되니까.
얼마 남지 않았다.
“그게 가능하리라 보는가?”
“가능하다 봅니다. 위원장님은...”
앞으로 10년도 채 살지 못할 겁니다.
“형님을 지지하게 될 겁니다.”
중국이 지지하고, KJ그룹이 지지한다. KJ그룹이 지지한다는 의미는 한국 정부도 지지함을 의미했다.
미국,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는 이가 바로 나다.
대만도 내 뜻에 따라 주리라.
김정남은 나를 알게 됨으로써 모든 국가의 지지를 받게 될 터다.
‘일본은 별도로 만나 대화를 할 필요가 있겠지만.’
“내가 오늘 처음 본 사람을 동생으로 삼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어. 그것도 KJ그룹 회장을 말이지. 좋네. 자네의 뜻에 따르지.”
됐다!
드디어 그의 입에서 승낙이 떨어졌다.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건 우리가 하나 된 의미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앞으로 이걸로 생활비로 생활하세요.”
내 지갑에 있는 카드 중 하나를 꺼내어 그에게 주었다.
일종의 뇌물. 이제 그가 내 카드를 쓰게 됨으로써 그가 어디에 있는지 추적이 가능하게 되리라.
“잘 부탁하지.”
기회는 기회를 낳았다.
앞으로 10년.
아직 갈 길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