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중국
빌딩에 달린 만국기가 바람을 악보 삼아 박자에 맞춰 흔들렸다. 좌우 위아래. 파들파들.
가만히 고개를 내려 빌딩 아래를 내려보며 감상에 젖었다.
“과연 중국이 어떻게 나올지 은근히 기대가 되는데...”
KJ의 영향력은 가히 대단했다. 살아 숨 쉬는 괴물이 되어 세계 경제를 빠르게 흡수해 KJ 아래 경쟁기업을 두었다.
그런 덕분인지,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에 자리한 모든 언론사는 내 의도를 파악하고 관련 기사들을 사정없이 쏟아냈다.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그리고 그사이에 KJ가 있음을 강조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며칠 전부터 시작된 멈출 줄 모르는 걱정이 이 실장의 액세서리가 되어 찰랑거린다.
단 하루도 빼놓지 않으면 어색할 지경이 될 정도로 머릿속에 세뇌돼 틀어박혔다.
“괜찮지 않음 어때요. 버스도 떠났고 총도 쌌고, 회수 불가인데? 전 오히려 기대돼요.”
내 안에 숨 쉬고 있는 기억들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순수한 나의 힘으로 중국 정부와 맞서는 상황.
짜릿한 이 기분, 매우 즐겁다.
“강심장을 타고나신 건지. 휴. 회장님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 심장 여분을 여러 개 준비를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이 실의 두 손이 위로 올라갔다. 항복 선언이다.
“후후, 중국에서 연락이 올 거예요. 늦어도 내일엔 오지 않을까 싶은데. 실장님은 어때요?”
“저라면 기사를 보는 순간 즉시...”
똑독─
이 실장의 말이 다 끝나기 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중국 정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 왔네요.”
이 실장의 말이 끝났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돌리세요. 받지요.”
역시 중국은 양반 국가는 아니었다. 상놈 국가.
중국에 딱 어울리는 별명이다.
따르르릉─
전화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 바꿨습니다. 김정수입니다.”
-왕학체입니다.
왕학체, 왕학체... 아!
기억났다. 첫 중국 방문 당시 나를 찾아왔던 뱀의 눈을 닮은 재수 없게 생긴 사람이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회장님 덕분에 심심치 않은 날을 지냈습니다. 이번 일은 상당히 유감입니다.
훅─ 치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저에게 섭한 마음이 있었나 봅니다. 전 그런 기억이 없는데.”
시치미를 뚝 떼고 반응을 살폈다.
-대만의 깃발을 올린 건 우리 중국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주석께서 이번 일을 중요시 여기고 계십니다. 자칫 사업이 틀어질 소지가 큽니다.
국기라는 명칭이 아닌 깃발이라 말한다. 진짜 어지간히 싫은가 보다.
......
그런데, 이거 좀 기분이 나빠지려 한다.
지금 날 핫바지로 취급하는 건가?
나를 위하여 추진한 사업이기는 하더라도 이건 선을 넘은 행위다.
“의원님, 난 한국인입니다. 중국의 국민이 아니지요. 그리고 KJ는 중국의 부족한 기술에 대한 도움을 주는 위치에 있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착각은 자유라지만, 잘못된 부분은 걸고 넘어가는 게 좋다.
그래야 착각의 늪 속에서 벗어나 갑을관계를 확실히 인지할 수 있을 테니.
-김 회장님. 지금 우리와 해보자는 겁니까?!
수화기에서 전해오는 목소리에 가시가 가득하다.
귓구멍을 콕콕 찔러왔다.
“전화한 목적을 말하시죠. 저 바쁜 사람입니다.”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대화 주제를 틀어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드잡이질은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익!
“시간 없습니다. 없다면 끊어도 될지요.”
살짝살짝 속을 긁었다.
-...... 중국에서 주석이 뵙자십니다. 가능한 일자를 말씀해 주시죠.
귓가로 아득바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흡이 거친 걸 보니 옆에 자리했다면 주먹 한 방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주 화요일에 가도록 하지요. 만남은 수요일 오후 2시. 이때가 좋겠네요.”
-그렇게 전해드리지요. 끝으로 경고를 하겠는데, 주석 앞에서는 지금과 같은 건방진 언사는 피해야 할 겁니다.
뚝.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런 배우지 못한 인간이 다 있나.
대체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의 인성과 교육수준은 어디로 이탈해 버리는 건지, 당최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좋은 대학을 나와 사회에서 인정받던 사람도 군대와 정치계에 입문하면 바보가 되는 마법에 빠지나?
정말 모를 일이다. 배운 사람들이 하는 게 정치일 건데...
“들으셨죠? 다음 주 화요일 중국 일정 잡으세요.”
중국 일정이 잡혔다. 이번 일이 얼추 마무리되면 조금 쉬자.
휴식도 업무 중 하나.
오랜만에 지인들 만나 술 한 잔 꺾어야겠다.
쉬이이─
“모시지요.”
중국공항으로 들어서니 왕학체 의원이 대기 중이다. 전에 있었던 일로 꿍해 있는 모습이 초등학생 아이를 보는 거 같다.
“부탁하죠.”
꿍한 그의 뒤를 따라 공항을 벗어나 호텔로 향했다. 말을 걸어도 입을 다무는 그의 모습에 약간 심기가 틀어지기도 했지만, 깔끔히 무시했다.
“그럼 내일 12시에 이곳에서 뵙지요.”
호텔까지 안내한 그는 공안 열 명을 배치하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동안 저 모습을 유지할 거 같다.
***
사라라─
열어둔 창문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피곤함을 씻겨 주었다.
으자자차차─
허리를 쭉 펴 뻐근한 몸을 풀고 밖으로 나섰다. 중국인들의 특유 암내를 맡으며, 관저로 향했다.
“인사는 생략하지요.”
관저에 들어서 강택민 주석을 만났다. 얼굴에 노기가 가득 실려 있는 모습이 톰과 제리에 나오는 성난 불독을 떠올리게 하였다.
“좋을 대로.”
나 또한 인사를 생략하고 그의 맞은편 자리에 착석했다. 불편하고 끈적한 분위기가 방 안을 잠식해 갔다.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김 회장에게 여러모로 참 실망이 큽니다.”
벌어지지 않을 거 같던 그의 입이 열렸다. 가까스로 불편한 심정을 억누르는 모습을 잠시 감상했다.
“실망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로 제가 잘못한 건 없다 보이는데, 어떤 부분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중국의 발전을 위하여 기술을 풀고 투자를 감행했습니다. 취업 시장의 활성화를 돕고, 충분한 인프라를 형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까지 하였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니 많이 불편하네요.”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요?”
“그렇습니다. 주석께서 내게 이러는 이유가 참 궁금합니다. 우리는 아주 좋은 파트너로 같이 성장할 수 있으리라 봤는데, 느닷없이 이렇게 나오시니. 섭섭함을 감출 수 없는 건 이쪽입니다.”
“대만은 중국을 배신하고 영토를 강탈한 국가요. 그런 그들을 위해 힘을 쓴 김 회장은 중국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행동과 같소.”
중국, 미국, 대만. 참으로 복잡한 국가이다. 독립을 강하게 밀고 나가는 천수이벤 총통.
대만을 흡수하기 위하여 힘을 쏟는 중국.
그사이에 껴 중국의 눈치를 보며 간을 보는 미국.
자처해서 참여하게 된 KJ그룹.
참으로 멋진 구도가 되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한국에 있어서도 중국은 적군, 약탈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중국 영지로 속해 있는 만주벌판은 한국의 영토입니다. 돌려달라고 정식으로 요청을 한다면 돌려줄 의사가 있으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우리는 애초에 파트너가 아닌 적이라 칭할 수 있습니다. 중국과 미군도 마찬가지겠고 일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중국은 모든 국가에게 사과를 하는 게 맞습니다.”
“......”
“제 말이 틀렸습니까? 전쟁은 끝났습니다. 최소한의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기록하는 건 좋으나, 그런 감정들로 스스로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면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겁니다.”
나만 해도 중국을 깔보는 마음을 품고 있다. 양아치라 표현하기에 망설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거 역사의 족쇄는 피하는 게 좋다. 진짜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서로 협조해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걸 위해 주석님은 단절한 수교를 다시 열고 적극적으로 외교활동에 나서고 있는 게 아닌가요?”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요. ”
“대체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거죠? 북한을 보세요. 꽁꽁 문을 닫고 갇힌 정책으로 가난을 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원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국가가 됐습니다. 만약, 주석님과 비슷한 운영으로 개방정책을 펼친다면 지금보다 훨씬 잘사는 강국으로 발돋움했을 테지요.”
“대만과 다른 문제요.”
역시 중국인의 고집은 대단하다. 하나 내 고집도 만만치 않다.
“제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왜 다를까? 주석님은 한국 전쟁 당시 한국에 단 한 번이라도 사과를 하셨습니까? 그걸 가지고 중국에 항의를 한 적 있나요? 적어도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쟁 당시 일에 대해 사과를 했습니다.”
“만약 주석께서 만주벌판을 한국에 양도하고 정식으로 사과를 한다면, 대만과의 일은 없던 걸로 하지요.”
절대 그 짓은 못하겠지. 영토 욕심을 내보이는 중국한테 영토를 달라는 건 전쟁을 하자는 소리와 같다.
“정말로 그렇게 나올 거요? 자꾸 중국에 반하는 언사를 잇는다면 KJ는 중국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요.”
“중국으로 향하는 모든 수출과 수입을 포기하고 길을 막겠습니다. 기술적 도움도 받을 수 없을 겁니다.”
“중간에 비명횡사를 할지 모릅니다.”
“혼자는 죽지 않겠습니다.”
찌릿찌릿.
다소 위험한 발언이지만, 한 번 죽어본 목숨이다. 죽음의 두려움을 잊은 지 오래다.
가족과 윤희가 마음에 쓰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 치유되리라 봤다.
찰칵.
“!”
미친...
설마 총을 들고 있을 줄 몰랐다. 강택민 주석은 품속에 소지하고 있던 총을 꺼내 내 머리를 향해 겨냥했다.
이거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도 내 말을 따르지 않을 건가? 김 회장. 자네의 동료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걸세.”
말투가 변했다. 지금껏 존칭을 쓰던 그의 입에서는 아랫사람들에게나 할 법한 말들이 새어 나왔다.
“거 좋네요. 하나 이건 알아둬야 할 겁니다. 중국은 나를 죽임으로써 많은 것들을 잃게 될 겁니다. 그 정도 각오가 되어 있다면 방아쇠를 당기시죠.”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차갑게 식었다. 심장은 아주 천천히 뛰었다.
두-근, 두-근.
시계의 초침 소리마저 귓가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말을 들으니, 더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위험분자는 미리 없애는 게 좋겠지.”
딸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검지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 탄창이 돌아가는 소리.
총열이 정확히 이마로 향했다.
‘이거 대만에서 죽을 위기를 넘기더니, 중국에서 끝나는구나. 내가 너무 강하게 나갔나?’
-중국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야만스럽군.
-지능이 떨어지는 놈들은 공격성이 강해 이빨부터 들이밀지.
-내가 살아 있다면 중국의 기밀을 해킹해 세계에 퍼트렸을 터인데, 아쉽게 됐어.
-묫자리는 알아봤는가? 유서라도 남기게. 내가 묻힌 장소를 알려주지. 끌끌.
기억들이 서로의 의견을 내며 지금의 상황에 대하여 의견 아닌 의견을 모았다.
“......”
두 눈을 정확히 이마를 겨냥한 총열을 지나, 강택민 주석의 두 눈을 응시했다.
“잘 가게.”
탕!
그 순간 방아쇠가 당겨지며 총성이 공기를 강하게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