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귀국
보름달이 어둠을 밝히는 시각.
“김 회장님의 무사 퇴원 축하를 기념하여 건배!”
쨍!
허허벌판 위에서 술 파티를 벌였다. 높이 쳐든 잔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잔 안의 알코올이 출렁였다.
크─!!
단숨에 들이켠 술은 참 썼다.
“모두 개인사가 있을 건데 저를 위하여 응원해 주고. 기도해주고. 기다려 주어 감사합니다. 제가 얼마나 운이 좋고 행운아인지 알게 됐어요.”
정말이지 누군가에 사랑을 받는다는 건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윤희로 인해 알게 됐고, 지금 자리에 모인 사람들로 인해 알게 되었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진심을 담아 허리를 앞으로 꺾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회장이 되어 처음으로 숙여보는 머리였다.
피유─
사람들이 환호하며 휘파람을 불어 출 쳐지려는 분위기를 확 띄웠다.
박수 소리가 밤하늘을 타고 멀리 뻗어갔다.
“그런 기념에서 우리 다시 건배를 할까요? 모두의 안녕을 위하여!”
“위하여!”
대만의 마지막 밤. 사람들은 잔을 높이 들어, 모두의 안녕을 빌었다.
저벅저벅.
두 여자가 말없이 밤길을 걸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누가 먼저 입을 열지 눈치를 보는 와중.
“오빠랑 약혼한다 들었어요. 축하해요.”
끝내 참지 못한 영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힘이 쫙 빠진 목소리.
시선은 정면을 주고 있었으나, 곁눈질로 슬쩍슬쩍 눈치를 봤다.
“고마워요.”
대화가 오가기 시작해서일까.
무겁게 느껴지던 공기가 조금은 가볍게 풀어졌다.
“영희 씨 정수 오빠 좋아하죠?”
“!”
갑자기 깊숙하게 들어오는 한마디에 영희의 몸이 움찔댔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확인한 윤희.
그녀의 눈에 안쓰러운 감정이 맺혔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게 무슨 죄도 아니잖아요.”
“조... 아해요.”
영희의 입이 작게 열렸다.
목소리에 걱정을 가득 싣고.
“솔직해 좋네요. 저 있죠. TV에서 두 사람이 붙어 있는 걸 보고 엄청 걱정했어요. 영희 씨에게 오빠를 뺏길까 봐. 그래서 시험도 포기하고 달려왔어요.”
“......”
윤희가 슬쩍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자신보다 조금 작은 키에 귀여운 얼굴.
남자들이 딱 좋아할 여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영희 씨가 매력 있는 여자라 말하고 싶어요. 정수 오빠만큼 좋은 남자가 많지 않겠지만, 영희 씨라면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밝혔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얼마나 불안했는지,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충분히 영희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러워요. 솔직히...”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영희의 앙증맞은 입술이 위아래로 떨어졌다.
영희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윤희를 올려봤다.
‘예쁘다.’
긴 다리에 관리가 잘된 얇은 허리와 커다란 골반.
심지어 가슴도 빵빵.
모든 것이 완벽한 여자였다. 반면, 자신의 모습은...
“...... 전 그저 옆에서 바라보는 것만도 괜찮다 생각했어요. 가끔씩 밥 먹는 것도 좋고. 마음속으로만 좋아하려 했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오빠 앞에 접근하지 않을게요. 정말 죄송해요.”
힘겹게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꿈이라 생각하고 싶지만, 불어오는 찬 바람이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정말 괜찮아요?”
“... 네.”
윤희의 시선을 피하는 영희. 윤희는 영희를 보다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눈으로 말했다.
“굳이 피하지 않아도 돼요. 오빠랑 밥도 먹고, 가벼운 장난도 치며 예전처럼 지내요.”
“네?!”
“그게 더 이상하잖아요. 좋아하던 사람을 어떻게 쉽게 잊을 수 있어요. 심지어 이 실장님과 지내다 보면 오빠 소식을 듣게 되고 보게 될 텐데. 억지로 지우려 하지 마요. 나, 영희 씨랑 잘 지내고 싶어요.”
“......?!”
“오빠랑만 밥 먹지 말고 나랑도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한잔해요. 당연히 밥은 내가 살게요.”
“어째서...”
“나 그렇게 꽉 막힌 여자 아니에요. 그리고 확신했어요. 영희 씨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저, 정말 그래도 돼요?”
“음... 깊은 스킨십만 아니라면? 영희 씨에 한해서 허락할게요!”
윤희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에 정수에 대한 믿음이 확실히 새겨져 있었다. 절대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영희도.
“그리고 우리 잘 지내봐요. 언니.”
“... 윤희 씨.”
비록 자신보다 어린 동생이지만, 정말 멋진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라면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을까?
‘졌네...’
완벽한 패배였다. 그래서일까? 아파오던 가슴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후련했다.
조금은 힘들겠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조금은 정리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윤희 씨, 밥은 내가 살게요. 단, 너무 비싼 건 먹지 말아요.”
내려갔던 어깨가 위로 올라왔다. 한결 가벼워진 영희의 얼굴을 내려본 윤희는.
“언니, 땡큐!”
영희를 끌어안고 가슴에 비볐다. 마치 언니가 동생을 대하듯.
“......”
묘한 부분에서 자존심이 상한 영희였다.
***
쉬이이─
끼리릭, 끼릭.
활주로로 내려서는 비행기.
KJ 로고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비행기 입구에 계단이 놓이고 굳게 닫힌 철문이 개방됐다.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가 눌러지며 주변을 밝혔다. 저녁임에도 플래시로 인해 주변 사물이 아주 잘 보였다.
“회장님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지금 심정이 어떠신가요!”
“대만에서의 멋진 활약상에 깊게 감동했습니다. 한국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습니다. 이에 감상을 듣고 싶습니다!”
아직 대만에서 나눴던 사업계획에 대해서는 퍼지지 않았나 보다.
모든 질문에 대만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포커스를 맞췄다.
옮기던 걸음을 멈춰 내밀어진 마이크 앞에 섰다.
“모두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의 격려와 기도로 죽음의 기로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 그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 짧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오른팔을 뒤로 뻗어 윤희의 손목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
“오, 오빠.”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내 마음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여기 있는 윤희와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모두 축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빠.”
윤희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손목을 잡은 손에서 떨림이 전해졌다.
시선을 옆으로 살짝 돌렸다.
두 눈이 마주쳤다.
“의견도 묻지 않고 내 멋대로 해서 미안해. 하지만, 꼭 밝히고 싶었어.”
어차피 결혼은 기정사실화.
윤희는 몸을 착 달라붙어 두 손으로 팔을 꼭 잡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고마워요.”
윤희의 체온을 느끼며 다시 시선을 앞으로 가져갔다.
더욱 강렬해진 플래시가 시야를 가렸다.
“트, 특종이다!”
“결혼 일자가 어떻게 되십니까!”
“KJ그룹의 안주인이 되신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윤희에게도 질문이 날아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밝힐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추후 정해지면 따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쯤 하시고 자리를 물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했지만, 어제 밤새 마신 술로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아.”
아쉬움이 가득한 시선들.
하나, 더는 앞길을 막지 않았다.
기자들은 막았던 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경호원들의 보호 아래 공항을 벗어났다.
-긴급속보! 육성전자 이건호 회장. KJ그룹 김정수 회장을 사위로 들이다.
-김정수 KJ그룹 회장이 이건호 회장 막내딸로 알려진 이윤희(22) 씨와 백년가약을 약속했다. 결혼 일정은 양가 상견례를 통해 결정될 예정.
“크하하. 좋구나. 좋아.”
그동안 바라오던 일이 현실로 이뤄졌다. 이건호 회장은 신문을 들어 보여 함박웃음을 날렸다.
너무 김정수 회장에게 끌려다니는 건 아닌가 싶은 우려의 마음도 있었지만, 대만으로 날아간 딸은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안고 귀국했다.
“이거 둘이 아니라 셋이서 왔으면 좋았을걸. 끌.”
남녀가 둘이 있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 부분에 생각이 미쳐 딸 몰래 붙여둔 수행원에게 들으니 저녁에는 병원을 벗어나 호텔에서 잤다 했다.
남들 시선이 조심스러워 그런다 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아. 허허.”
이건호 회장은 손에 든 신문을 내려놓고 책상 위에 자리한 모니터 화면을 바라봤다.
-육성전자 전일 대비 12.3% 오른 36,000원 마감.
-육성전기 전일 대비 8% 오른 8,5000원 마감.
-......
육성그룹 전체 시총이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이건호 회장은 만족스러운 눈으로 주식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
“정수야, 그 아가씨 참 참하더라. 육성 아가씨라고? 호호.”
엄마의 입이 쭉 찢어지신다. 동생으로 인해 상심이 크셔서 좀처럼 미소를 보이지 않던 엄마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펴졌다.
“먼저 약혼부터 하고, 결혼은 올해 가을에 했음 해요. ”
“왜? 더 빨리 하지 않고? 4월도 좋고, 5월도 좋은 거 같은데?!”
엄마는 아들을 빨리 보내고 싶은 모양이다. 은근히 결혼에 대한 압박을 하시더니, 좋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강하게 조여오셨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쪽 일도 있고, 저도 준비할 게 한두 가지 아니라서. 약혼을 4월로 잡고, 결혼은 10월경에 할게요.”
엄마의 강한 설득에도 난 뜻을 꺾지 않았다. 사실 특별히 바쁜 일은 없었지만, 충분한 연애를 통해 윤희와 추억을 쌓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윤희와 이제 제대로 만나기로 한 게 바로 며칠 전이다.
그전까지 얼굴을 본 게 10회도 되지 않았다.
“그래. 일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
“정수가 알아서 하겠지. 냅둬. 여자 한 번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아들이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는 것에 만족하자고. 축하한다. 정수야.”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아빠의 말에 상처를 받을 뻔했다. 점잖게 말씀을 하시니 치명타가 어떤 때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하하, 네. 일자는 엄마랑 아빠랑 정하세요. 상견례 일자도요. 이쪽에서 다 정하고 윤희에게 알려주기로 했어요.”
“그래. 그러데 아가씨는 언제 데리고 올 거야? 상견례 전에 한 번 봐야지?”
“먼저 이건호 회장님에게 허락을 구하고, 그 이후에 데려올게요.”
“어머, 애 좀 봐. 이건호 회장이 뭐니? 이제 장인이 될 사람에게.”
“......”
다시 또 훅치고 들어오는 엄마의 한마디에 말이 턱 막혔다. 회장이라 부르던 호칭을 바꿔 부르려니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고쳐 볼게요.”
“그래. 가서 괜한 실수하지 말고. 아가씨 오기 전에 미리 엄마에게 말하고.”
“네...”
자식이라고 아들 하나뿐이라 그런지, 부모님이 무척 들뜨셨다.
아빠의 표정조차 어느 때보다 상기돼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소개를 시켜드릴 걸 그랬다.
“전 이만 출근해 볼게요. 자세한 이야기는 다녀와서 해요.”
더 붙잡혀 있다가 더 큰 상처를 받을 거 같아 후다닥 출근길에 올랐다.
“그래도 나쁘지 않네.”
출근길에 오른 차량 안. 잠시 지나치는 무수한 커플들과 아이들을 시야에 담았다.
전생에 이어 두 번째로 치러지는 결혼식.
두 번째 인생은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살리라 다짐했다.
“대만 관련하여 회의를 할 겁니다. 이 리스트에 있는 임원들 모두 회장실로 모이라 하세요.”
20분 정도 지나 회사에 도착했다. 회장실 층에 오르자마자 대기 중인 남민희 씨에게 지시를 내렸다.
“결혼은 결혼이고. 대만의 문제를 어떻게 풀지에 대해 집중하자.”
결혼문제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잠시 후, 회장실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