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딜
1997년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반환받은 중국은 일국양제 통일정책을 도입했다.
동시에 대만으로 향하는 야심이 보다 강렬해져, 중국은 일국양제를 대만에도 적용하려 했다.
대만이 이를 받아들일 이유는 없고.
무엇보다 대만은 중국으로 인해 대만의 국기를 내걸지 못했다.
엄연히 중국과 대만은 전혀 다른 국가.
그럼에도 중국의 영향 아래 살아가는 불쌍한 국가였다.
국기는 국가를 상징하는 얼굴.
그걸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건, 대만이란 국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 얼마나 수치스럽겠나?
‘90년대 다시 수교가 이어지기 전에 복잡했지. 대만과 거래하면 중국과 무역 활동을 못 했고, 중국과 거래하면 반대 상황이 벌어졌고.’
한국과 북한만큼이나 복잡한 두 국가였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하는 소리십니까?”
천수이벤 총통이 부릅뜬 눈에 힘주어 말했다. 내가 한 발언에 책임을 질 수 있는지 여부보다 두 국가 간 마찰을 걱정하는 걸로 보였다.
그것도 아니면.
“중국이 겁나시나요? 아님 제가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모를까 싶어 묻는 건가요? 이것도 아니면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할 거라 보십니까?”
그의 질문에 답이 아닌 질문으로 돌려줬다.
“그 말은 회장님께서 하신 발언에 책임을 질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해도 되는 겁니까?”
이번에는 천수이벤 총통이 대답을 질문으로 날렸다.
“적어도 난 누구처럼 의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총통 당신이라면 생판 모르는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 1조 원을 어떤 보증도 없이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음.....”
“적어도 난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부족한 식량도 무상으로 지원하고 있지요. 심지어 난 목숨을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내게, 그런 의심성 발언을 할 줄이야. 매우 불쾌하네요.”
적어도 이들에게 충분한 믿음을 주었다 생각을 했는데, 이런 취급이라.
대만이 본래 이런 나라였나?
대체 대만은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에 계속 내 인내를 시험 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불쾌하다.
“김 회장은 살아생전 거짓 없이 살아왔다 자부할 수 있습니까?”
거짓말이라.
어긴 적 없다. 지키지 못할 약속 자체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지만, 못 지킬 이유도 없었다.
좀만 신경을 쓴다면, 가능한 일들.
“있습니다. 애초에 하지 못할 약속도, 거래도 하지 않는 사람이 접니다.”
그만큼 약속은 무척 중요하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높여주는 부분이 약속이며, 이를 이행해 지키는 것이다.
“...... 단 한 번도 말입니까?”
“못 지킬 이유라도 있나요?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가 온다면 그건 상대방이 나를 배신했을 뿐입니다. 그런 일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약속을 어길 이유는 없습니다. 총통님은 그간 어떻게 지내오셨는지 모르겠으나, 난 내 식구와 지인들 그리고 거래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 정말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천수이벤 총통의 시선에 주변에 자리한 사람들의 면면을 바라봤다. 동공이 흔들리고 하고 눈썹이 꿈틀거리기도 한다.
눈가에 주름이 지는가 하면 이마에 골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목울대가 꿀렁이는 걸 보면 어떤 말이 하고 싶지만, 참는 것 같기도 하였고.
많은 고민과 갈등이 그의 머릿속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는 모양이다.
“정말로 믿어도 되는 건지요?”
“중국이 KJ그룹의 사업을 방해한다 하더라도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약속합니다.”
그간 속고 속이는 환경에 살아온 사람의 특징이 저러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내가 가져야 할 행동은.
“2002년도.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강한 자신감으로 밀어붙이기보다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그것만이 그의 의심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 방법이다.
“만약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총통의 뜻대로 하세요. 불만 없이 따르지요.”
“당신과 같은 사람은 일평생 처음이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너무 생각을 가둬놓고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허, 허허. 좋습니다. 지금껏 보여준 의와 은혜를 입게 됐으니. 믿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우리의 거래는 성립이군요.”
“2002년 때 봅시다.”
“그러지요.”
우리의 반영구적인 거래가 끝났다. 이제 앞으로 대만과 중국과의 갈등으로 빚어진 ‘국기’ 관계를 어떻게 풀지 생각할 일만 남았다.
“김 회장, 우릴 못 본 체하지 않겠지요?”
“맞습니다. 이 좋은 걸 혼자 먹으려 하면 배탈 날 겁니다.”
총통과의 대화가 끝나고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앞다퉈 나섰다.
AIG 그린버그 회장이 나서자, 시티코프 리드 회장이 뒤를 이어 말했다.
“저도 빼놓으면 안 됩니다.”
“이런 좋은 투자에 우리가 빠지면 섭하지요.”
골드만삭스에 JP모건까지 나섰다.
“저도 끼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엔 스타벅스 회장 하워드 슐츠까지 끼어들었다.
“절 생각해 찾아와 주신 분들을 챙기지 않을 이유는 없지요.”
이자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 볼 수도 있다. 어쨌든 한국의 위기를 이들로 인해 쉽게 풀어나갈 수 있었고, KJ그룹 성장에 큰 동력이 되어 줬다.
무엇보다 이들과의 관계는 KJ그룹에 있어 득이 되면 되었지, 손해 볼 일은 없었다.
“KJ의 비율을 70%로 하고 30%를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비율을 저들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다. 너무 많은 지분을 주면 나중에 관리하기 머리 아프다.
그리고 30%라 할지라도 난터우에 조성될 한인타운과 관광객을 유치할 호텔 등을 생각하면 결코 적은 비율도 아니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우리끼리 30%면 충분하지요.”
“이거 병문안 와서 기다린 보람이 있구려. 하하.”
저 보라. 기뻐하는 모습을.
귀국해서 정확한 투자 규모를 따져봐야 알겠지만, 최소 몇조는 들어가게 될 터다.
높은 아파트와 한국과 대만문화를 접목한 상권.
난터우에서 즐길 수 있는 유흥과 관광사업.
대충 계획을 세워 하나하나 따져보니 규모가 상당하다.
“자세한 내용은 귀국해서 정리 후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비율문제는 회장님들 선에서 정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오랜만에 투자할만한 곳을 찾아 좋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병실에 모인 사람들의 기분이 천장을 뚫어 하늘로 날아갈 기세다.
이럴 때 보면 참으로 순수한 사람들로 보인다.
실상은 아닌 것을. 크크.
퇴원까지 앞으로 일주일.
슬슬 퇴원 준비를 하자.
***
“영희야.”
둘이 머무는 호텔 방.
이호영은 고민스러운 얼굴을 짓다 이내 결심이 섰는지, 영희를 불렀다.
“갑자기 그런 표정을 지어. 무섭게.”
잔뜩 굳은 호영의 모습에 영희는 이맛살을 작게 구겼다.
분위기를 잡으니, 방 안이 무겁게 느껴졌다.
“여기 앉아봐.”
“뭔데?!”
오늘따라 이상하다. 영희는 내키지 않은 얼굴로 이호영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혹시, 혹시 말이다.”
이호영의 목소리가 무척 조심스럽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답답하니까, 빨리 말해. 뭘 그렇게 뜸 들여. 사람 무섭게.”
이호영의 모습에 영희가 짜증을 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 더욱 신경이 날카롭게 변했다.
“휴,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우리 솔직해지자. 너 혹시 회장님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지?”
병실에서부터 가져오던 생각을 힘겹게 입 밖으로 꺼냈다. 제발 아니기를 바라며. 깍지 낀 두 손을 강하게 잡았다.
“그, 그걸 왜 묻는데. 갑자기.”
영희가 크게 당황한다.
“너 설마...”
“왜, 안 돼? 남녀 사이에 그럴 수 있지. 아직 여자친구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럼 괜찮은 거 아냐?”
생각 외로 이영희는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을 과감히 밝혔다.
얼굴은 ‘뭐가 문제인데’로 무장했다. 불만스러운 시선이 얼굴에 가득하다.
“......”
반면 호영은 큰 충격에 빠졌다. 속으로 제발 아니기를 바랐다.
하나, 늘 좋지 않은 건 반대로 향했다.
“장례식장부터였어. 오빠도 정신없고 아무도 날 위로해 주지 않을 때, 정수 오빠가 다가왔어. 처음엔 부담스럽고, 모든 게 싫었는데. 엄마 발인날이 될 때까지도 신경 써 주고 챙겨주고 너무 고마웠어. 나 아직도 그때 일 못 잊어. 처음이었어. 진심으로 대해준 남자는.”
영희는 두 손을 꼭 잡고 가슴 중앙으로 가져갔다.
당시 정수의 온기를 떠올렸다.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
모든 이야기를 인내하며 참고 다 들은 이호영은 더욱 복잡한 심정이 되어 영희를 바라봤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동생이다.
요즘 다시 학업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안심했는데,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알아. 나랑 정수 오빠랑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 그냥 정수 오빠 모르게 좋아만 할 거야.”
영희의 얼굴이 슬픔으로 물든다.
“......”
이호영의 입은 달싹이다 이내 크게 호흡하고 입술을 뗐다. 더는 동생에게 희망 고문을 시킬 수 없었다.
진실을 알리자.
“... 영희야. 회장님. 곧 약혼해. 어제 약혼자분이 오셨어. 지금쯤 회장님과 있을 거야. 그러니 이만 정리해.”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지금껏 누군가를 좋아한다 밝힌 적이 없던 동생.
아니, 남자친구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 잔인해.”
영희의 얼굴이 밑으로 내려갔다. 시선이 무릎으로 향했다. 두 손에 힘이 쫙 들어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 어깨.
뚝뚝.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그걸 지금 말해. 조금은 내 마음을 지켜줄 수 있었잖아. 오빠 나빠. 정말로...”
소리라도 지르며 원망하면 좋으련만.
그조차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다.
“영희야...”
“나, 나. 정말로... 좋아했어. 정말이야. 처음으로... 아빠 같았어. 그래서 너무 좋았어. 정말로... 그런데... 그런데...”
“......”
이호영는 더는 말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건.
“미안하다.”
고작 미안하다는 네 글자가 다였다. 이호영은 영희의 떨리는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하... 힘들구나.”
호영은 정말로 힘들었다. 애초에 KJ그룹에 입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아픔은 없었을 터인데.
아무래도 오늘은 알코올이 필요해 보였다.
***
XX병원.
“오빠, 그 여자 누구예요?”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시간, 윤희가 뜬금없는 질문을 건넸다.
대체 누구를 지칭해 묻는 건지.
“그 왜 있잖아요. 오빠 막 깨어난 날 옆에서 이 실장님과 부축해 주던.”
아~ 영희. 난 또. 누굴 말하나 했다.
“영희라고, 이호영 실장님의 여동생이야. 예전에 말한 적 있던 거 같은데. 이 실장님 모친 이야기.”
“아!”
“거기서 알게 됐어. 예쁘고 귀엽고 착한 아이야.”
“여자로 보는 거 아니죠?”
뭐냐?! 혹시 이거...
“질투?”
“지, 질투라뇨. 그냥 걱정돼서. 오빠 지인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건 또 처음 보는 모습인걸?
이렇게 당황하면 횡설수설하는 모습이라니. 새로운 걸 봐서 그런지 신선하고, 인간적으로 다가와 좋았다.
“걱정하지 마. 여자로 느낀 적 없으니까. 널 여자로 느낀 것도 한참 후에서야. 난 그렇게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아. 애초에 정략혼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꼭 그렇게 말해야 해요!?”
“그만큼 내 마음이 네게 있다 말하는 거야. 쉽게 주지 않는 마음을 너에게 줬어. 그럼 된 거 아닐까?”
“... 말이나 못 하면.”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남자의 본능이 다시 꿈틀거렸다.
“퇴원하는 날, 파티가 있을 거야. 거기에 영희도 나올 거니. 잘 지내봐. 친동생이다 생각하고. 불쌍한 아이야.”
“아, 알았어요.”
이제 좀 안심이 되는지, 긴장하던 눈빛이 자리를 잡았다. 재벌가 여식답지 않게 맑고 순한 마음을 지녔다.
“나 잠시 다리 위에 누워 있어도 되지?”
“이미 누웠으면서 물어요.”
윤희가 수줍게 웃는다. 윤희와 눈을 마주했다.
“와줘서 고마워. 그리고...”
“쉿. 다음 말은 내가 할래요.”
얼굴이 점점 가까워져 온다. 나는 눈을 감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랑해요.”
세 번째 키스.
윤희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지금의 시간을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