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귀국
“아... 오빠 미안해.”
시험 기간이라는 악수에 치여 오빠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설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니. 집안 식구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귀국했을 때까지 몰랐을 소식이었다.
-김정수 회장이 극적으로 정신을 차려 눈을 떴습니다. 다음 영상은 김정수 회장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려 준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떤 기업인이 국민들을 넘어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 정말로 존경스럽고,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니다.
“......”
TV에서 나오는 소식에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불편한 마음과 이로 인해 벌어질 일들이 너무도 무섭고 두렵게 다가왔다.
시험과 오빠를 저울질을 해본다. 내일이 마지막 시험.
지금껏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은 다른 날과 달랐다.
“저 여자는...”
그러다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오빠의 팔과 손, 몸에 착 밀착해 있는 여자의 모습.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가 나서 그런 건 아니다. 이번 일로 오빠가 떠날 거 같은 두려움에 발생한 떨림이었다.
“정말 괜찮은 게냐.”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과 못마땅한 시선으로 덧칠돼 있었다.
“나... 시험 포기할까?”
당장 달려가야 할 거 같은데, 평생을 공부해 오던 학업을 포기하기에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공부는 하고 싶을 때 해도 된다. 하지만 좋은 사람은 평생의 한 번뿐일 수 있지.”
과연 김정수 회장만큼 괜찮은 사위를 어디서 또 찾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절레절레. 가로로 여러 번 저어지는 고개는 부정을 뜻했다.
없었다. 꼭 잡고 싶은 심정은 강하나, 그렇다고 막내딸의 의견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휴... 저 갈게요.”
학업과 사랑.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던 때, 힘겹게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쉬이이─
그날 저녁. 김포공항 활주로를 통해 한 대의 비행기가 대만으로 향했다.
***
“전 괜찮으니 모두 돌아가세요. 각자 일도 있을 텐데.”
병실은 늘 만원으로 휑할 날이 없다.
각국의 회장과 대표단들이 대만에서 터를 잡았는지, 교대로 병원을 왔다 갔다 했다.
“아닙니다. 회장님이 이러신데, 어떻게 저희만 갈 수 있습니까?”
제프 베조스가 강하게 반대 의사를 표했다. 단칼에 거부하는 모습이 참 날카롭다.
“맞습니다. 그리고 저기 있는 사람들도 생각해 주세요. 회장님과 같이 귀국하겠다며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요.”
“...... 쩝.”
참 고마운 사람들.
본인들 시간도 있을 터인데, 그 시간을 나에게 투자를 하였다.
어떤 이득도 주어지지 않는 이번 일에, 내 경호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대만병원은 한국인으로 가득했다.
우습게도 대만의 상권을 책임지는 행렬이 되어 버렸다.
“마음대로 하세요.”
가란다고 갈 거 같지 않았기에 백기를 들었다.
“한데, 대만 정부를 이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제프 베이조스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회장님은 목숨을 바쳐 사람들을 구하고 심지어 구원물자까지 무료로 풀었는데, 이 망할 대만 새끼들은 회장님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절대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됩니다.”
뒤를 잇는 이호영 실장의 분노의 일갈!
절대 곱게 넘길 수 없음을 확고하게 밝혔다.
‘확실히 괘씸해. 그렇다고 그들을 이해 못 하는 건 또 아냐.’
우리나라의 특징이 무엇이던가?
소 잃고 외양간을 아주 자주 고치는 풍습을 지니고 있다. 일이 벌어져야 득실을 따져 움직이는 문화.
그곳에서 나고 자라 그런지, 지금의 상황조차 이해가 되었다.
아주 웃기게도...
‘지인들과 가족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 부분은 짚고 넘어가는 게 좋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생각은 ‘이익’ 부분에 닿아 있었다.
“같은 마음입니다. 확실히 저를 버리려는 대만 정부에 정식으로 항의해 이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죠. 곧 대만 정부와 자리를 가지는데. 거기서 이번 일에 대한 책임보상을 받을 겁니다.”
아주 철저하게.
생각해 둔 부분도 있었다. 나는 사업가. 그렇다면 사업가에 맞는 생각을 가지고 대만 정부를 상대하는 게 좋다.
“오빠, 이거 드세요.”
그러던 차, 영희가 과일을 깎아왔다.
“응, 아. 고마워.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잘 먹을게.”
귀여운 동생이다. 무겁던 공기가 영희로 인해 살짝 풀어졌다.
“......”
응? 그런데 이호영 실장의 표정이 왜 저리지?
이상하다. 사납던 그의 눈에서 걱정이란 감정이 진하게 묻어났다.
“이 실장님?”
“아,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에.”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네요. 가서 쉬세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요. 저 돌본다고 제대로 주무시지 못한 걸 아는데, 쉬세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영희 너도.”
그러고 보니 나도 좀 피곤하다. 한숨 자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만 쉬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네, 그러지요.”
연락할 생각은 없다.
“오빠, 전 괜찮아요.”
“아냐, 쉬어. 나도 잘 거야. 누가 옆에 있으면 자기 힘들어.”
“네...”
영희의 얼굴이 어쩐지 시무룩하다.
두 남매가 오늘따라 이상했다.
“휴... 이제 혼자인가?!”
라고 생각을 했는데.
드르륵.
문이 열렸다.
“응? 윤희?! 여기는 어쩐 일이야.”
한국에 있어야 할 여자가 이곳에는 웬일?
“지금 그게 며칠 만에 보는 사람에게 할 소리예요? 사람이 어쩜 그렇게 무심할 수 있어요. 연락 한 번 없고.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이게 뭐예요. 다치고. 아파하고.”
오자마자 눈물을 터트린다.
뭐가 그리도 기분이 상한 건지 들어오자마자 불만을 터트리나 싶더니 서럽게 눈물을 쏟아냈다.
“아냐. 난 괜찮아. 뭔 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다니, 이게 없는 거예요?”
“눈 뜨고 살아 있잖아. 그럼 된 거지.”
“오빠!”
“그래, 미안. 근데, 시험 기간 아니었나? 끝난 거야?”
“... 몰라요.”
“응?”
“아빠가 공부는 언제든 할 수 있어도, 좋은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들댔어요.”
“......”
“처음이에요. 학점을 포기하고 이렇게 일탈을 해보기는.”
“와줘서 고맙다. 윤희야.”
모든 이야기를 듣고서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호 회장이야 나와 윤희를 정략혼으로 얻을 수 있는 ‘득’을 생각했겠지만, 지금의 난 전보다 ‘이윤희’ 자체에 매력을 느껴갔다.
이 여자라면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려도 좋으리라 판단했다.
“가, 갑자기 그렇게 치고 들어오면 내가... 읍!!”
당황하는 윤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쏠리며 내 얼굴에 닿았다.
두 번 고민하지 않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동공이 확장되는 모습이 귀엽다.
“우리 제대로 만나보자.”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녀가 가져온 신념을 무너트리고 나를 찾아왔다.
이 부분에서부터 진한 감동을 받았다. 아무래도 앞으로 그녀 없이 살기 힘들 거 같았다.
“......”
“또 해도 되지.”
크게 확장됐던 동그란 눈이 스르르 감겼다. 무언의 허락이리라.
어두운 병실, 단둘이 있게 된 병실에는 야하면서 조용한 숨소리가 잔잔히 깔렸다.
***
대만의 총통관저, 대만총통부.
“지금 병원에 세계 부호들이 몰렸습니다. 그리고 각국의 언론들이 이번 일로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냥 넘기기에 사안이 심각합니다.”
대만지진사태와 KJ그룹의 행보로 인하여 모든 언론들의 주목을 받는 상황에서 생각도 못 한 문제가 생겼다. 하필 그때 여진이 또 발생할 줄이야.
“또 그런 일이 발생한다 해서 내 선택은 바뀌지 않을 걸세. 최소의 희생이 모두를 살리는 길이야. 하지만, 확실히... 김 회장에게 단단히 빚을 지고 말았어.”
그의 입장에서도 이번 사건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영국을 넘어 세계인들의 표적이 되었다.
“뭐가 적당할 거 같은가?”
첫날 KJ에 제시한 조건들이 많다. 거기서 뭔가를 더 해주는 건 무리였다.
아니, 무리보다 딱히 해줄 만한 게 없다 보는 게 맞았다.
“아직 우리가 제시하지 않은 조건 하나가 있습니다.”
“조건?!”
“그렇습니다. 바로 세금입니다.”
“..... 음.”
“세금을 면제해 주고 사업에 우선권을 준다 해서 우리가 손해 볼 건 없습니다. 오히려 대만의 경제가 살아나고 경제력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을 겁니다.”
KJ그룹의 위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술력을 보유한 초강대기업.
KJ만 제대로 자리를 잡는다면 국민들의 취업문제도 깔끔히 해결될 터.
거기서 거둬지는 세수는 국가의 재정을 풍족하게 키워줄 터다.
“그래, 그게 좋겠어.”
천수이벤 총통은 결정을 내렸다.
***
“지난번 일은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해해 달란 말은 하지 않지요.”
병원으로 천수이벤 총통이 찾아왔다. 병실에는 KJ그룹의 실세들과 인연을 맺은 세계 재계 인사들이 천수이벤 총통을 노려봤다.
개수작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를 독하게 풍겼다.
참으로 든든한 용병(?)집단이다.
“사람이야, 다들 생각하는 방향과 주관, 성향은 다르니까요. 이해합니다. 한데, 섭섭한 마음은 숨길 수 없네요.”
당신네들을 살리는 데 비싼 노동력을 보였는데, 반대로 그들은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모른 척했다면 대만으로 향하는 모든 시장을 통제해 경제를 바닥으로 이끌었을지도.
“큼, 그러시겠지요. 그래서 그에 부합하는 보상을 해드릴까 합니다.”
“들어보지요. 제 몸값을.”
이해를 한다 했지, 그의 결정을 반기는 건 절대 아니다. 나도 사람이며 감정이 있다.
암만 공자라도 자신을 사지로 밀어버리는 인간을 좋게 볼 리 없었다.
“10년간 모든 기업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 드리겠습니다.”
“... 제 목숨값이 상당히 저렴하게 책정됐네요.”
“흥, 그깟 세금. KJ그룹 유지비도 안 될 거 같은데.”
“간이 작구만.”
“이래서 대만놈들은...”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영어로.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할 총통이 아니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걸 보니, 그도 인간은 맞나 보다.
“들으셨죠. 저분들도 매우 저렴하다 하는데, 좀 더 부르심이 좋아 보입니다만.”
천수이벤 총통을 침대에 누운 자세로 응시했다. 어떻게 나올 테냐?
“원하는 게 있어 보이는데, 직접 말씀해 주시죠. 제 머리로는 이 정도가 김 회장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입니다.”
천수이벤 총통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 이상으로 속이 좁은 사람이다.
첫 만남 당시만 하더라도 배포가 있어 보였는데.
“좋습니다. 제가 원하는 조건을 말씀드리죠. 우선 10년간 세금면제 받아들이겠습니다. 여기서 추가로 난터우 일대를 한인타운을 만들었음 합니다. 한국인에 한하여 세금 우대를 해주시고.”
난터우는 관광지로 만들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주요 산업으로 쌀, 도자기, 복세공, 과일통조림, 사탕수수 등이 있다.
울창한 삼림, 산을 배경으로 르웨탄 호수가 깔려 있다.
이곳을 한국인을 위한 한인타운으로 조성해 관광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빠르게 세워졌다.
“부, 불가하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조건입니까!”
역시나 그는 거세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렇다고 내가 가만히 물러날 양반이 아니다.
“만약 이 조건을 들어준다면, 2002년 한일월드컵. 대만의 국기가 월드컵 경기장에 올라오도록 도움을 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