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대만의 영웅
얼마나 갔을까? 거리를 가늠하기 위하여 중간중간 적어놓은 숫자가 시야로 들어왔다.
20미터.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쿠웅─!!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 벌어졌다. 탈출할 때 불안한 마음이 강하게 들더라니.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지, 지진이다!”
밖으로 나간 사람들의 목소리가 땅굴을 타고 들려왔다.
땅이 강하게 흔들렸다.
큭, 이대로 죽는 건가. 다시 태어나 상상도 하지 못할 업적을 만들었다.
찌질하던 지난 인생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모두 탈출했겠지.”
거리는 10미터에서 15미터 사이. 바로 코앞에 보이던 빛은 갈색 흙으로 뒤덮였다. 주변에 설치된 랜턴만이 빛이 되어 주었다.
“멋진 인생이었다. 정수야.”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그간 이룩한 부는 부모님의 노후를 책임져 줄 것이다.
엎드렸던 등을 돌려 땅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졌다.
마지막, 나의 유종의 미를 거뒀다.
-어리석은 것! 당장 일어나지 못해!
“......”
머릿속이 왕왕 울었다.
-이 나의 정신을 가진 자가 할 소린가! 여기서 포기해 모든 걸 잃을 생각이냐 말이다!
천재 도굴왕의 기억의 파편으로 짐작됐다.
-이까짓 거 무너져서 뭐! 다시 파면 그만인걸. 포기라니! 내 자존심을 짓밟아 버릴 텐가!
“......”
-그렇네. 나도 같은 생각이야. 포기하지 말게.
올리버 스미스의 목소리.
-헹,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만, 나도 억울해서 말이지. 살아. 이 멍청한 새끼야.
대도둑 장칠성의 목소리.
-해킹은 수많은 계산에 결괏값을 찾아낸다네. 엄청난 시간이 걸리지. 한데, 자네는 모두가 불가능하다 여기는 많은 것들을 해냈어. 자네의 결괏값은 고작 죽음인가? 난 패배자가 됐지만, 자네는 패배자가 되지 말게.
해커, 그레이 헤먼드...
“패배자라. 난 왜 이러지. 이러면 전생과 크게 다르지 않잖아. 이 등신 새끼.”
그레이 헤먼드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떠졌다. 또 실수할 뻔했다.
나만의 생각에 잡혀 가장 중요한 걸 포기하려 하다니.
전생의 일을 되풀이할 뻔했다.
“절대 포기하지 못하지. 10미터야. 그거면 돼.”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도구들을 바라봤다.
징과 망치. 저거면 충분하다.
***
“어, 어쩌면 좋아. 회장님! 회장님!”
“이 개새끼들아! 너희들을 구한 사람이 우리 회장님이라고! 뭐해! 당장 인부들 투입해 구하라고!”
“비켜! 시발 새끼들아! 너희들이 뭔데 우리를 막아!”
땅굴 입구가 막혔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단 한 사람이 저 땅굴 안에 있었다.
KJ그룹 김정수 회장. 자신의 직원을 구하겠다고 손바닥이 피가 터지도록 땅을 파내 사람들을 구한 영웅.
이호영 실장을 더불어 KJ 직원들은 앞을 가로막는 대만 군인들과 몸싸움을 했다.
“또 여진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야, 이 개새끼들아! 그 시간이란 걸 뒀다 여기 있는 사람들 어떻게 될 뻔했어?! 다 뒈질 뻔했다고! 그걸 우리 회장님이 구했어. 알아!”
이호영 실장은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며 군인들을 밀쳐냈다.
새벽해가 뜨는 6시. 저녁은 아침이 되었다. 사람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눈빛은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올랐다.
“천수이벤 총통!”
“안전이 우선입니다. 안타깝지만.....”
천수이벤 총통의 얼굴에는 갈등의 빛이 역력했다. 이번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연달아 발생하는 여진을 감내하며 작업에 착수할지, 안전을 최우선으로 할지.
하나, 그의 행동을 보자면 안전을 더 중요시하는 걸로 보였다.
“우리가 작업에 나서지 않겠다는 게 아닙니다. 안전을 확보하고...”
“닥쳐! 이 개새끼야!”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중간에 선 통역사는 이를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무척 난감해했다. 천수이벤 총통이 가만히 있는 걸 보니, 이호영 실장이 내뱉은 말과 다르게 해석한 걸로 보였다.
“그 망할 놈의 안전! 안전! 당신의 그 안전타령 때문에 몇 명이 죽어갈 뻔했는지 알아?! 내 안전 따위 개나 줘버려. 당신네들 도움 없어도 되니까, 여기서 당장 꺼지라고!”
“... 모두 비켜주게.”
결국 천수이벤 총통은 사람들에 지시를 내려 길을 터졌다.
“회장님!”
“어디 계세요! 살아 계시는 거죠? 네!!”
“회장님!!”
사람들은 무너진 입구로 달려가 소리를 쳤다. 영웅이 살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이건 기적입니다. 국민 여러분 보이십니까? 김정수 회장이 모두를 구해냈습니다. 안에 갇혔던 모든 사람들이 무사히 구조됐습니다. 김정수 회장이 해냈습니다.
대만의 소식이 실시간으로 방송을 탔다.
“와!!”
“김정수! 김정수!”
공항에서 비행기편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들려오는 소식에 열광했다.
대한민국에 새벽은 없었다. 모든 국민들이 아침까지 기다려 구조되는 장면을 목도하며 열광했다.
쿠우웅!
“...... 뭐야?!”
“설마?!”
“김정수 회장 안 나오지 않았어?”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땅굴이 막히는 장면은 모든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대만 새끼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은혜를 원수로 갚아!”
“XX새끼들아!”
김정수 회장을 구하기 위해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막는 대만 군인들의 모습에 국민들은 분노를 터트렸다.
-대만 정부가 김정수 회장의 구출작업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대만 정부의 태도에 깊은 유감을 보냅니다.
방송사도 대만 정부의 움직임을 크게 질책했다.
여기뿐만 아니라 세계 언론들은 이번 사태에 대만을 책망했다.
“우리도 대만으로 갑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몇몇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만으로 향하자 주장을 하기도 했다.
“갑시다!”
“그래요. 우리가 가서 대만 정부와 싸웁시다.”
“김정수 회장을 이대로 죽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남자의 말에 동조해 나섰다. 대한민국은 김정수 회장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가 되었다.
***
영국.
“당장! 비행기편 마련하세요. 어서요!”
제임스 맥어보이가 급히 빌딩을 나서 공항으로 향했다.
“우리도 대만으로 갑니다.”
블롬즈버리 출판사 주드 로 대표도 움직였다.
***
미국.
“당장 전세기 준비하세요!”
인텔 대표.
“이대로 있을 때가 아닙니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세요.”
마이크로 소포트, 스타벅스, 워너 브라더스 등 KJ와 인연이 있는 모든 대표와 회장단이 대만으로 향했다.
***
한국.
“아이고, 정수야. 내 아들. 흑흑.”
“정, 수야...”
김보균과 정지예는 TV를 보며 오열했다. 자랑스럽게 바라보던 아들의 매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모시러 왔습니다. 공항에 전세기를 대기해 놨습니다.”
그러던 차 집사장이 발 빠르게 조치를 내려 대만으로 향할 이동수단을 준비했다.
KJ저택에 대기 중인 헬기가 새벽하늘을 날았다.
“저, 저도 데려가 주세요! 부탁이에요!”
급하게 달려온 티가 나는 여성이 앞에 섰다. 그녀의 손에는 자전거가 있었다.
“당신은...?”
“이호영 실장의 동생 이영희예요. 꼭 좀 부탁드려요.”
이영희였다. 영희는 고개를 숙이며 절실히 부탁했다.
“같이 가요.”
“네!”
이들 부부 사이로 이영희가 합류했다.
***
“이재민을 돕기 위해 나서다 또다시 발생한 여진으로 인해 김정수 회장이 갇힌 지도 50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작업은 더디게 이뤄져 사람들을 애타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김정수 회장이 살아 있다 믿습니다. 모두 김정수 회장이...”
“회, 회장님이다!”
대만으로 파견 온 특파원이 김정수 회장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파하던 때 멀리서 기적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서 카메라 돌려요! 여러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땅굴에 갇힌 지 50여 분 만에 김정수 회장을 구출했습니다. 아직 김정수 회장의 상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특파원은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한국 특파원뿐만 아니라 자리에 있는 모든 기자들과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방송을 이어갔다.
“다, 당장 후송대를 대기시켜 놓게. 아서 김정수 회장을 구하게! 어서!”
천수이벤 총통이 뒤늦게 나섰다. 응급대가 급히 들것을 들고 달렸다.
***
퍽! 퍽!
얼마나 팠는지 모른다. 장비를 제대로 갖췄다 하더라도 땅을 파는 건 쉽지 않았다.
부족한 공기와 지친 체력은 모든 걸 놓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기억들이 삶의 끈을 꼭 붙잡도록 힘찬 응원을 보냈다.
헉헉.
“꼭 살아 돌아간다. 절대 여기서 무너지지 않아.”
이를 악물었다. 뭐에 긁혔는지 팔과 다리에서 통증이 일었다.
하나, 삶의 의지는 그 아픔과 고통을 잊게 만들었다.
웅성웅성─
“이, 이 목소리는...”
흙더미 너머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팍! 팍! 텅~
지친 몸을 이끌고 마침내, 마침내...
“회, 회장님이다!”
밝은 햇살이 무너진 출구를 뚫고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 사이네 아주 친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호영 실장...
“살았...”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짹짹─
으음...
“여기는...”
약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흐렸던 시야로 하얗게 도색된 천장이 보였다.
“회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저 알아보시겠어요!”
병원이구나. 난 살았다. 그렇지 않다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볼 수 없었을 테니까.
“이 실장님.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생생히 기억한다. 자신을 안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그의 등을.
“고맙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두 번 다시는 회장님을 보지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로요. 큭.”
이 실장의 눈물이 떨어진다.
그의 눈물을 본 건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두 번째.
“회장님, 회장님!”
“정수야!”
“엄마, 아빠... 영희?! 그리고 모두... 어떻게...”
“회장님은 이틀 동안 깨지 못한 채 누워 계셨습니다. 그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도착해 회장님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도 전에 들이닥친 사람들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빌 게이츠, 라나, 제임스 맥어보이, 피터 슈라이어, 존 코진, 김유성, 마윈, 주드로, 하워드 슐츠 등등의 사람들이 병실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김정수 회장님, 당신은 우리 국민 모두의 영웅입니다. 절대 죽지 않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서 우리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갑시다.
-대한민국의 자랑입니다. 여러분 목소리를 더욱 크게 외쳐주세요. 김정수 회장을 위해.
-회장님! 일어나세요!
“.....”
밖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호영 실장이 나를 부축했다.
“저, 저도 도울게요!”
이영희가 왼쪽으로 다가와 자신의 어깨에 내 팔을 올렸다.
“고마워.”
“그날 이후 결심했는 걸요. 제가 꼭 회장님을... 모시기로.”
“...?!”
방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아니겠지.
영희에게 방긋 미소를 짓고는 창문 앞에 섰다.
“허......”
창문 아래로 태극기와 촛불을 들어 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시야로 들어왔다.
난생처음으로 겪는 경험. 가슴 속으로 뜨겁고 울렁거리는 느낌이 혈관 전체로 퍼졌다.
“김 회장이 깨어났다!”
“김정수 회장이 깨어났어!!!”
“김정수! 김정수! 김정수!”
나를 알아본 많은 사람들이 소리높여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두 번 다시 잊지 못할 이 감동.
지금 이 순간, 이 장면을 내 평생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기겠다.
“모두 감사합니다. 저를 위하여 기꺼이 찾아와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꼭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때 포기하지 않고 살길 잘했다. 나를 사랑해주고 생각해 주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위해 더욱 열심히 살겠다.
대만의 암울한 날은 끝나고 새로운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양쪽에 자리한 이호영 실장과 이영희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