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대만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급한 불을 끌 수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회장님께서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십니다.”
-이거 정말이지, 대만의 대표로서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합니다. 꼭 좀 회장님께 전해주세요. 회장님은 대만의 은인으로서 귀빈으로 대접하겠다고 말입니다.
“회장님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대만 정부에서의 연락이다.
이호영 실장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방긋 웃었다.
비록 자신의 돈이 아닌, 회사의 자금이 들어간 일이지만 무척 뿌듯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호영 실장의 걸음은 회장실로 향했다.
***
“대만 정부에서 그리 여겨주니 참 감사한 일이네요.”
대만으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구호를 위한 봉사라 하지만, 여타 기업에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제가 다 뿌듯하지 뭡니까, 하하.”
이호영 실장의 웃음소리가 방을 울리게 했다. 정말 좋은가 보다.
“대만 상황은 어때요?”
“우리 직원들이 대만으로 파견되면서, 대만 주변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KJ는 계열사 직원들에게 파견의 의사를 선발해 대만으로 보냈다.
자발적으로 나서는 모습이 KJ그룹의 직원이라며 세계인들은 찬사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이번 대만행은 천막에서 지낼 생각이니, 별도로 호텔은 잡지 마세요.”
“아니, 회장님.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천막이라니요. 그건 안 될 소리입니다.”
“우리 직원들도 천막에서 생활하며 이재민을 돕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 저 혼자 편하겠다고 천막에서 보낼 수 없는 일이에요.”
“그렇다 치더라도 이건 너무 무모하십니다. 직원들과 회장님은 위치가 다릅니다. 직원들이 불편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칫 외부로부터 위험요소에 대비하는 경호원들도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회장님의 안전에 있습니다.”
“음...”
이거 듣고 보니 또 그렇다. 함께 고생하는 KJ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생각이 조금 짧았던 걸까.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됐다.
“하루는 어때요?”
“음... 꼭 천막을 이용하실 생각입니까?”
“실장님의 말은 충분히 이해했어요. 그래서 첫날만 천막에서 지내고, 그다음은 실장님 말대로 호텔에서 지내도록 하지요.”
“혹,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전 사업가이기도 합니다. 외부로 보여지는 모습도 중요하지요. 제 행동은 KJ를 홍보하는 데 큰 힘이 될 겁니다.”
세계에서 KJ그룹을 모르는 이는 없으나, 그건 겉모습뿐.
속까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는 이번 참에 KJ의 안과 밖은 ‘같다’라는 걸 세계인들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선의로 벌인 일이나, KJ가 얻어 가야 하는 부분은 챙길 필요가 있었다.
그건 ‘이미지’.
이번 대만행에서 KJ의 이미지를 확실히 구축할 참이다.
“그러시다면 그에 맞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호영 실장이 포기했다는 얼굴로 백기를 들었다.
“고마워요.”
이거 이호영 실장의 허락 없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됐다. 집에 엄마가 있다면 회사에는 이호영 실장이 있었다.
두두두두두─
헬리콥터 프로펠러가 힘차게 돌아간다. 한 주가 지나고 대한공항에 도착해 헬리콥터에 올라탔다.
헬리콥터는 하늘 높이 올라 이재민들이 모인 난터우로 향했다.
“회장님, 대만 총통 천수이벤입니다.”
함께 나선 이 실장이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저편에서 다가오는 중년인의 모습이 잡혔다.
“은인을 이렇게 만나 참으로 기쁩니다. 천수이벤입니다.”
인자한 얼굴에서 비치는 존경의 시선이 피부로 전해져 온다.
뿌듯함이 가슴에 머물러 따스한 온기를 품었다.
“은인이라니, 그런 과분한 말은 피해 주셨음 합니다. 저는 인간의 도리, 세계를 대표해 구호물자를 전했을 뿐입니다.”
손을 맞잡고 미소를 그렸다.
“회장님의 선행은 국가라도 감히 실천하기 힘든 일입니다. 돈과 물자를 보내온 것뿐 아니라 인력까지 동원해 대만을 생각해 주셨는데, 회장님은 대만의 은인이 맞습니다. 하여 전 회장님을 정부 차원에서 극진히 모시고 싶습니다.”
KJ에 있어 이번 일은 그리 부담이 가는 지원은 아니었다. KJ의 계열사 순이익 대부분이 조 단위를 가뿐히 넘는다.
그중 일부를 지원했을 뿐이거늘, 이들에게 있어 그 돈은 큰 빛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직원들과 하루를 머무를까 합니다.”
“그게 뭔 소리십니까? 어떻게 이곳에서 지내려 하십니까.”
총통의 안색이 굳었다. 두 눈동자가 크게 뜨인 것이 꽤 놀란 모습이다.
“오늘 하루 만입니다. 오늘 하루는 이곳에 남아 이재민들을 도울까 합니다. 총통의 배려는 내일부터 받도록 하지요.”
“허허, 그러시다니,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회장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천수이벤 총통은 허허 웃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천막은 저곳에 준비해 두겠습니다.”
“아니에요. 같이 해요. 회장이 무슨 벼슬인가요. 있는 대로 다 부려 먹게. 저 아직 젊어요. 80대 돼서 걷기 힘들 때 그때 멍때리고 있을게요.”
“하하, 그때 제가 옆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실장과 재미없는 농담으로 키득키득 웃으며 빈 공터로 향했다.
사전에 소식을 들었는지, 주변 땅은 잘 정돈돼 있었다.
땅땅─!!
“읏차!”
나무 지지대를 천막 중앙에 고정한 채 위로 세웠다. 총 여덟 구멍에 매달린 줄을 양쪽의 사람들이 힘껏 끌어당겼다.
팽팽해진 천은 지지대를 기준으로 삼각형 모양으로 팽창해 징에 고정했다.
“군대 이후 두 번 다시 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꼭 군대가 나쁜 건 아니네요.”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나 보다.
“무얼 하든 다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휴, 다 됐네요. 회장님은 이제 들어가서 쉬시죠. 전 저 사람들과 제 천막을 만들고 오겠습니다.”
“어디 가세요. 이 넓은 천막을 같이 치고서 저 혼자 지내라 뭐 그런 말은 아니죠?”
“회장님 개인 생활도 있으시고, 혼자 쉬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우리 전우입니다. 전우! 전우가 따로 자게 둘 수 있나요. 자리도 넉넉하고 스티로폼도 넉넉하니 크게 불편하지 않을 거예요.”
“저 코도 곱니다.”
“전 눈 감으면 바로 잠들어요. 그러니 부담 가지지 말고 여기서 같이 지내요. 어차피 오늘 하루인데, 어때요.”
“그러시다면, 실례를 무릅쓰고...”
KJ가 설립하고 처음으로 비서와 함께 지내게 됐다.
“후우, 덥네요.”
네 시간 정도 지난 시점, 대지를 채우고 있던 쓰레기와 돌 더미가 어느 정도 정리됐다.
“직원들 모두 열심히네요.”
“정말 그렇습니다.”
모자와 수건으로 태양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며 잠시도 쉬지 않고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실장님. 한국으로 복귀하면 계열사 전체로 공문을 돌려 파견에 나선 모든 직원들에게 100만 원씩 지급하러 이르세요. 타국까지 날아와 고생하는데, 이 정도 보상은 해줘야죠.”
“직원들은 참 운이 좋습니다. 회장님을 만난 건 직원들에게 있어 가장 큰 행운일 겁니다.”
“그것보다 듣기 좋은 칭찬은 세상에 다시 없겠네요. 후후.”
우리의 쓰잘데기없는 대화는 작업이 끝나고 잠이 들기까지 이어졌다.
***
“자네는 어떻게 봤나? 그 김 회장을.”
“영악하고 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방법을 잘 캐치해 내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무모한 움직임이라 보일 수 있지만, 그 한 번의 움직임이 사람들의 인식을 만든다.
이미지메이킹.
이 부분에 있어 아주 탁월한 사람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나도 같은 생각이야. 설사 우리가 본 얼굴이 가짜 얼굴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받은 도움은 진짜. 그에 상응하는 도움을 줘야 우리 체면이 서겠지.”
천수이벤 총통은 또 다른 고민에 빠져, 팔꿈치를 탁자에 올린 채 이마를 꾹 눌렀다.
이번에 들어온 구호 물품과 자금은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부족한 생필품, 식량, 식수, 응급약 등 모든 게 일사천리로 이뤄져 많은 국민을 치료할 수 있었다.
KJ의 도움을 모른 척 넘기기에 너무도 큰 은혜를 입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그는 사업가입니다. 우리 국가의 그의 사업장을 마련해 주는 겁니다. 세율도 몇 년간 혜택을 준다면 우리 국가 경제도 살고,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봅니다.”
“오, 그거 좋군. 아주 좋은 생각일세. 하면, 자네는 관련 부지를 알아보고 미리 준비해 두게. 나는 김 회장을 만나 그의 생각을 들어보도록 하지.”
그에게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고민하던 와중, 중년인의 말에 천수이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중년인은 밖으로 나갔다.
“난터우로 갈 거야. 차 준비하게.”
잠시 후 천수이벤 총통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
“으자자자. 아이고 삭신아.”
오랜만에 몸을 쓰고 밖에서 잠을 잤더니, 온몸이 왕왕 울었다.
뻐근한 어깨와 허리에 파스가 한가득이다.
“으... 정말 지독합니다.”
이호영 실장도 일어나, 눈살을 찌푸려 몸 이곳저곳을 주물렀다.
“스티로폼으로 바닥을 푹신하게 만들었다 해서 집보다 좋을 수 없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벌써 집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하하, 상동(이하동문: 일본말)입니다.”
참 고된 작업이었다. 나도 이제 늙었나 보다.
우리는 힘겹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아고고... 허리야.”
“나 어깨 좀 주물러 줘.”
밖으로 나가니 여기저기서 서로에게 도움을 받아 몸을 풀고 있었다.
신음 소리를 들으니 어제 작업이 얼마나 고됐는지 알만하다.
“귀국 전에 직원들 전부 대만에서 마사지를 받고 복귀하라 이르세요. 마지막 날은 모두 호텔에 재우시고요.”
“알겠습니다. 벌써 방이 그립네요.”
“하하. 오늘부터 편히 잘 테니, 마사지 받고 푹 쉬자고요.”
짓궂은 웃음을 입가에 그리며 하늘 위로 떠오른 태양을 바라봤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과 따스한 햇살을 받으니 조금은 살 거 같다.
우리는 간단히 세안을 하고, 빵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오늘도 고생이 많으십니다. 김 회장님.”
11시가 다 되어 갈 즈음, 대만 총통이 도착해, 나를 찾았다.
어제 편히 잤는지, 피부가 보송보송하다.
“사람을 도울 수 있어, 기분이 좋습니다.”
“회장님 같은 사람도 없을 겁니다. 작업은 몇 시까지 할 참이십니까?”
“이제 마무리 지어야지요.”
오늘은 오전 작업만 하고 자리를 뜰 예정이다. 호텔에서 이곳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번거롭고, 직원들이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부터 계획을 수정했다.
그리고 총통을 보니, 또 다른 일이 생길 것도 같았고.
“그럼, 제가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이런 도움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부담 없이 받아 주세요. 그래야 제가 마음이 편합니다.”
“그럼, 사양치 않고 받기로 하겠습니다.”
작업이 끝났다. 직원들과 사람들은 점심시간을 가지러 배식 장소로 향했고, 나와 이 실장은 총통의 차량에 몸을 실었다.
‘땀내가 너무 심해...’
몸에서 나는 쉰내를 맡으며, 우리는 거지 같은 모습을 하고 호텔로 향했다.
완전히 피난민이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