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사람
-금일 새벽 1시 50분경 대만 난터우 현 지지 진에서 규모 7.7에 해당하는 대지진이 일어나 사망자 2500, 실종 29, 부상자 1만 5천 명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현지에 나가 있는 장승만 특파원이 전해주겠습니다.
-네, 장승만 특파원입니다. 여기는 대만 난터우...
“어이구, 1만 5천 명? 저게 뭔 일이야? 저런 사건이 왜 내 머릿속에 없었지?”
자잘한 사건은 몰라도 이렇게 사상자가 많이 나온 사건이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구호물자를 보내자.”
이런 경우 세계 경제 기업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가진 자의 특권이지 않나 싶다.
“잘 지내셨습니까?”
수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해외번호다.
-오, 오랜만입니다. 김 회장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인자한 목소리.
워런 버핏 회장이다.
“네, 잘 지냈습니다. 회장님, 몸은 어떠십니까?”
-나야 팔팔하지요. 나이 먹었다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안부차 물었을 뿐입니다.”
-그리 말하니 이번엔 서운해지려 합니다.
“조만간 찾아뵙지요. 와인에 치즈 어떠십니까?”
-오는 사람에게 심부름시킬 정도로 못난 사람은 아닙니다. 빈손으로 가볍게 오시면 한 손 가득 채워드리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보고 싶어 연락했을 리 없고?!
“보고 싶지요. 목소리도 듣고 겸사겸사 의논도 드릴 일이 있어 전화를 했습니다.”
-의논이라, 김 회장님이 나와 의논할 일이 뭐가 있을까요?
“대만 대지진 소식을 들으셨는지요?”
-방금 뉴스를 보던 참입니다. 인명피해가 심각 수준이더군요.
“그쪽 나라도 정신이 없을 겁니다. 해서 대만에 구호물자를 보낼까 합니다. 회장님의 재가를 받으려 연락했습니다.”
-아니, 그런 좋은 일을 왜 내게 재가를 받습니까?
“공동법인인데, 적은 돈도 아니고 큰돈이 나갈 일에, 당연히 허락을 구해야지요.”
여기에 내 돈을 더 박았다 쳐도 이게 예의다. 신뢰를 받고 지키는 건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된다. 나는 그를 믿는가? 믿는다.
그럼 그는 나를 믿을까?
믿게 만든다. 이것이 내가 가져야 할 마음이다.
-허허, 난 김 회장을 믿습니다. 돈을 허투루 쓸 사람이 아님을. 그러니 나는 걱정 마시고 맘껏 쓰세요. 설사 재단의 돈을 다 쓴다 하더라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내키지 않는다면 자금 내역을 메일로 보내세요.
“그 믿음 변치 않도록 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정말이지, 내 김 회장 같은 사람은 처음입니다. 허허. 정말 좋은 친구를 얻었어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대화는 솔직했고, 솔직함 속에 단단한 매듭을 느꼈다. 이 매듭은 시간이 갈수록 경고하게 묶여, 더욱 뜻깊은 관계로 발전하리라 자신했다.
“대만에 10억 달러 지원하고, 2억 달러는 생필품과 식량을 지원하세요.”
결정은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회장님은 정말이지 통이 크십니다.”
“사람은 큰일일수록 팔을 크게 벌려 품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명언 하나 얻어 가네요. 최대한 빠르게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부탁하죠.”
이호영 실장은 함박웃음을 머금고 밖으로 나갔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나는 도덕적 의무를 이행했다.
-역시 KJ그룹 김정수 회장, 7.7 대지진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낸 대만 난터우에 10억 달러와 1억 달러 규모의 생필품, 식량을 지원키로 발표했다. 생필품과 식량은 1차 2차로 나눠 비행기와 화물선으로 동시에 운반 예정이다. 10억 달러는 즉시 입금이 될 걸로...
“이게 참된 사람이지. 암.”
“다들 얼마를 보내니 이런 결정에 빠져 있는데, 역시 김정수 회장은 빨라.”
자국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김정수 회장에게 찬사를 보냈다.
“저 보라고. 도와줄 거면 직접 나서서 도와줄 일이지, 매일 저딴 방송으로 사람들 돈이나 걷을 줄 알지.”
그러자 한 노인이 손가락으로 TV 화면을 가리켰다.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전화 한 통이 이 어린아이들의 배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전화 주세요. 070-XXXX-XXXX(한 통화당 2천 원)
TV 화면에는 배곯고 있는 아이들을 영상으로 담은 광고가 나가고 있었다.
“염병. 나도 밥 벌어먹기 힘든 판국에, 저딴 걸 도울 돈이 어딨어.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밥 한 끼를 더 주라 그래. 그 돈으로!”
노인은 크게 성을 냈다. 노인은 지나다 봤다. 노숙자의 아들로 태어나 굶고 있는 아이들을.
1만 원 지폐를 쥐여주고 꼭 밥을 사 먹을 걸 연달아 이야기하며 자리를 떴었다.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자, 화가 치밀었다.
그런 아이들도 지켜주지 못하면서 외국 아이들을 챙긴다니. 그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만 열 내고 한 잔 들자고. 우리가 열 낸다고 누가 들어줘.”
“에잇, 더러운 세상.”
두 노인은 소주를 연거푸 들이켜고, 이내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주 이야기는 KJ그룹 김정수 회장의 칭찬이었다.
***
-이런 편지를 보내 미안합니다. 회장님의 발자취는 늘 우리를 감동으로 이끕니다.
“음...”
내게로 익명의 편지 한 통이 전해졌다. 안에는 편지와 돈이 들어 있었다. 액수는 천만 원.
백만 원 수표 열 장을 손에 쥐며 편지를 읽었다.
-대만의 일이 참 안타깝다 느낀 차, 회장님의 따뜻한 손이 대만으로 향했단 소식에 불편하던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은인이요, 세계의 은인인 회장님께 커다란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밥을 굶고 힘든 나날을 보내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KJ에서 나날이 지원하는 식사가 있지만, 그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깔렸습니다.
그런 아이들도 회장님께서 돌봐주십사 이 편지를 보냅니다.
-너무 염치없어 제 작은 성의를 표합니다. 이 돈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 주시길.
어려운 이들을 도와달라는 부탁의 편지였다.
갑자기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진다.
“이건 내가 돈으로 어떻게 지원한다 해서 될 일이 아니야. 아이들이야 죄가 없지만, 문제는 일을 하지 않고 구걸로 생계를 이어가려는 그들의 정신이야.”
자존감을 잃고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삶.
어떤 낙도 꿈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봤다.
“그들 중에는 사업을 하다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날개가 꺾인 이들도 있고, 대기업의 사기행각으로 노숙자가 된 이도 있어. 아이들 중에서 분명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이들도 있겠지. 그렇다면...”
그들의 정신을 개조하고 계기를 마련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게 그들을 위해 좋다 생각했다.
“일단은... 이 실장님.”
요 근래 일거리를 많이 줘 미안했지만, 이런 편지를 받은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미안하지만, 이 편지의 주인을 찾아봐 주세요.”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내게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한 편지입니다.”
“익명에 주소도 없어 찾는 데 시간이 걸릴 거 같은데...”
“시간은 걸려도 됩니다. 1년이든 2년이든. 찾아만 주세요.”
저걸 찾으라는 게 이상할 수 있었다.
하나, KJ빌딩에는 수많은 CCTV가 설치돼 있다. 수상한 사람 정도는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를 가졌다.
그래도 세상은 아직 따뜻했다.
***
대만으로 구호물자가 이동하는 때.
서울제조기업.
“승원 씨, 밥 먹고 해.”
“이것만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하여튼, 독하다니까. 무리하지 말고 끝나면 바로 와.”
“네!”
서승원은 힘차게 대답하고 다시 시선을 밀링으로 가져갔다.
이제 홀 하나만 TAP을 내면 끝이었다.
“16TAP이 어딨더라.”
소재가 워낙 무거워 매직바를 이용해 들기 위하여 아이볼트가 들어갈 자리에 나사선을 내는 작업.
승원은 원하는 TAP을 찾아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옳지, 여깄다.”
주황색 상자 안에 들어 있는 M16TAP을 꺼내 에어드릴에 연결했다.
위이이잉, 쉬리리릭.
탭을 뚫린 홀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탭이 힘차게 돌다 반대 방향으로 돌며 위로 올라왔다.
“끝났다.”
작업을 마무리했다. 설비 전원을 끄고 화장실로 향했다.
“......”
비누에 씻겨 나가는 검은 물.
얼굴에는 기름때가 진하게 묻어 있다. 서승원은 거울을 보며 얼굴에 묻은 기름때를 손끝으로 문질러 지웠다.
“죽기보다 싫었던 이 일을 내가 하게 될 줄이야.”
하루 12시간 근무. 많이 할 때는 16시간을 근무할 때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모든 교육과정을 포기하고,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현장에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약해지지 말자. 이것만이 내가 성공할 길이야.”
일을 하면서 확신이 들었다. 이 가공이란 게 웃긴 점이 업무 과부하에 걸리면 ‘외주’에 맡겨 대신 가공을 부탁했다. 완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닌, 가공업체가 가공업체 외주를 맡긴다는 점이었다.
영세 업체 사장만 하더라도 잘 찍히는 곳이 월 매출이 3천이 넘는다.
연 3억.
기존 거래처만 알고 지내도 직장인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집을 일으키는 거야.”
이보다 더 비전이 있는 일도 없다 여겼다. 재차 각오를 다지며 휴지로 손과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승원이! 여기로 와. 여기 자리 있어.”
현장 반장이 손을 들어 좌우로 흔든다. 밥과 반찬을 푸고 자리를 찾는 모습을 봤는지, 식판을 빠르게 비우고 자리를 양보해 줬다.
“감사합니다.”
“뭘. 맛있게 먹고 10분 더 쉬었다 와.”
“아니에요. 제가 하겠다 해서 한 건데. 시간 되면 바로 갈게요.”
“하여튼, 기특하다니까. 이러니 가르치는 보람이 있지.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
“네.”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다. 현장에서 일하며 그간 알지 못한 사회를 배웠다.
큰 보상은 없지만, 일한 만큼의 경험과 경력은 배신하지 않음을 알게 됐다.
“어머니, 잘 먹었습니다.”
전에는 입에 대지도 않았을 맛 없는 밥.
미각의 기준이 낮아진 건지, 모든 식사가 맛있었다.
“김치 챙겨놨어. 냉장고에 넣어 놓을 테니까, 가져가.”
“매번 감사합니다.”
사람에 대한 감사한 감정도 알게 됐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밑바닥 인생이 되어서야 알게 된 공부였다.
“벌써 1시네. 가자.”
밥을 다 먹고 나오니, 벌써 1시다. 점심시간이 끝났다. 서승원은 커피 한 잔 마실 시간 없이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뭘 또 그렇게 달려와. 저기 커피 탔으니, 한 잔 마시고 와.”
“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기분, 좋다.
“캬, 역시 밥 먹고 마시는 커피는 일품이야.”
이제 이곳에 완전히 적응해 버렸다. 서승원 단맛을 한 번 더 느끼며 자리로 돌아왔다.
“이건 황삭만 하라고 되어 있네.”
승원은 밀링에서 선반 자리로 이동했다. 도면에 적힌 메모를 보며 세팅에 들어갔다.
다이얼 게이지를 이용해 중심을 맞추고 선반을 돌렸다.
“끝.”
띠리리─
작업이 마무리됨과 동시에 근무시간이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수요일. 6시 정시퇴근하는 날이다. 다행히 추가 작업은 없어 무사히 퇴근길에 오를 수 있었다.
아직은 해가 짧아 주변은 어둑어둑하다.
“승원 씨.”
버스정류장 앞에 당도할 때, 앞으로 국내 고급 세단이 앞에 멈췄다.
창문을 내리니.
“대표님.”
주인공은 서울제조기업 양진택 대표였다. 승원은 깜짝 놀라 허리를 낮췄다.
“우리 대화 좀 하지.”
분위기가 이상하다. 양진택은 굳은 얼굴로 승원을 응시했다. 승원은 그런 양진택의 모습에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표정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