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거래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겠습니다.”
10조를 준다 한들 IOS를 그에게 넘길 생각은 없다. 평생 밥벌이가 되어 줄 귀중한 기술을 준다는 건 정말 돈이 필요한 사람에 한해서다.
아니면 바보이거나.
난 그에게 단호하게 선을 긋고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얼마를 불러도 좋습니다. 전 그게 꼭 필요합니다.”
역시 천재 개발자라 그런가? IOS의 가치를 알아본다.
흡족하다. 이걸 만들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키보드 자판을 두들겼던 피곤함이 싹 사라졌다.
“그래도 안 됩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애절한 눈빛. 그의 눈빛을 보니, 더욱 우쭐해진다.
“음,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어찌 보면 판매라 말할 수도 있겠네요.”
“아니, 그게 무슨 말...”
“대여라는 아주 멋진 판매 방법이 있지요. 이걸 받아들이면, 애플에 대여를 해줄 의사는 있습니다. 일정 수수료를 KJ에 지급하고 판매 대수만큼 추가 수수료를 받는 조건이라면 애플과 거래를 하겠습니다.”
일정이 상당히 앞으로 당겨졌다. 초기 계획은 보다 완벽하게 운영체제를 만들어 애플과 육성에 판매를 할 참이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직접 두 발로 이 방에 들어온 순간 미래계획은 현재로 바뀌었다.
“......”
“이게 싫다면 이곳을 나가시면 됩니다. 우리의 대화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니 말입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욕할지 모를 일이나, 이건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KJ의 오리지널 기술이다.
전생은 전생. 현생은 현생이다.
“...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처음과 다른 지금의 얼굴.
많은 걸 계획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 미래설계에 들어갔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망상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하세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개발만 해놓고 사용하지 않으면 무쓸모. 돈 벌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인데 잘 활용해서 금고를 채워야 하지 않겠나? 그를 이대로 보낼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필요하다면 호텔방을 예약해 드리죠.”
고객이라면 최고의 서비스로 대접할 생각도 있다. 어쨌든 미래 대고객이 되실 분이다.
“휴, 정말 팔 생각이 없으십니까?”
끈질기네. 이 사람.
“애플을 통째로 넘긴다 하더라도 팔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내가 스마트폰을 개발해 판매할까? 시간은 걸리겠지만, 만들지 못할 건 없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조건을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흐흐, 환영합니다 고객님.
그는 절대 이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천재라는 족속. 아는 만큼 보인다 했다.
“당분간은 무료 배포하겠습니다. 그 이후에 일정 사용료와 기기당 1%의 이익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사용료는 정한 바 없기에 당장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했기에 그에게 확실한 조건을 내세우기 힘들었다.
아직 시장은 안드로이드와 IOS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 번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래서 일단 운영체제를 무료로 공급하고 차후 시장을 보고 판단키로 하였다.
“좋습니다. 그럼 계약은...?”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지면 그때 하도록 하지요.”
아직 미완성이라 할 수 있는 운영체제이지만, 충분히 활용할 정도는 되었다. 계속 업그레이드를 통해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놓는다면, 그때는 대체불가 운영체제로 거듭나게 될 거라 확신했다.
“당분간 무료라... 계약서에 서명하게 될 날이 두려워지네요.”
“두려움만큼 애플은 거대한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겠지요.”
그가 몸을 오들 떤다. 예상과 달리 겁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좋은 거래를 마쳤다.
-KJ그룹에서 새롭게 개발한 두 운영체제 중 IOS로 애플과 계약을 맺었다. 애플은 해당 IOS프로그램을 가지고 새로운 제품 개발에 돌입해...
며칠 뒤 애플과 있었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KJ그룹의 주식에 관심을 가지며 막대한 돈을 바쳤다.
***
“개새끼! 으악!”
와장창창.
방바닥으로 무수한 물품들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져 형체를 잃었다.
이재진은 들려온 소식에 격분한 나머지 두 눈동자에 분노의 불꽃을 태웠다.
“난 이렇게 됐는데, 그 새끼만...”
이재진은 누군지 모를 그를 떠올리며 화를 잠재우지 못하고 폭주했다. 다시 들려오는 와장장─ 소리가 들리며 그의 기분과 함께 부서져 나락으로 떨어졌다.
“전무님, 이러다 다치시기라도 하면...”
“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그 새끼 때문에 다 잃었다고! 전부, 다!”
근처에 대기 중인 수행원이 달려와 말려보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재진은 자신의 손이 심하게 찢어져 핏물이 맺힌 것도 모르고 골프채를 들어 사정없이 휘둘렀다.
휙─ 휙─
공기를 가르는 골프채는 길게 휘어져 임팩트하게 탁자 위에 올려진 화분과 장식구를 날려버렸다.
방 안은 그야말로 전쟁터 그 자체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무님!”
수행원도 멈추지 않았다. 멍청하게 서 있지 않고 이번엔 두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어 이재진을 제지했다.
“놔! 안 놔! 놔! 놓으라고!!”
이재진은 두 사람의 힘에 구속된 채 발버둥을 쳤다. 하나 그건 바람으로 끝났다. 두 사람 사이에서 발악하던 이재진은 힘이 쏙 빠진 얼굴이 되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무님은 육성의 미래입니다. 누구도 전무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재진의 어린 시절부터 쭉 지켜봐 왔다. 단 한 번의 장애물 없이 평탄한 길을 걸어왔다. 말하면 모든 게 이뤄졌고, 그를 거스를 사람은 이건호 회장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학업도 충실히 수행을 하였고, 하버드라는 엘리트 코스까지 마쳤다.
이제 앞날은 탄탄대로.
하지만, 그건 하나의 거대한 벽을 만나며 처참히 무너졌다. 그를 이기기 위하여 힘을 쏟았지만,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다.
덕분에 경영진들이 이재진의 경영능력을 의심하면서 입지가 확 줄어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건호 회장은 이재진을 전무 자리에서 내쳤다.
다시 일어설 힘을 잃은 이재진.
그가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은 무너진 정신을 스스로 다시 쌓아 올려 일어나는 방법이 다였다.
수행원은 그가 하루빨리 원래의 그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패배자가 아닌 자존감으로 무장한 패자의 모습으로.
“어쩌면 이건 기회이지 않겠습니까? 그룹에 속박돼 있어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는데, 지금은 자유의 몸이십니다. 전무님께서 하고 싶은 걸 하시고 그걸로 경영진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신다면 회장님도 인정하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이게 적정궤도에 오르면 경영권 승계작업도 큰 무리 없이 해결이 가능할 겁니다.”
“......”
이재용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발악하듯 소리를 치던 그는 괴성을 멈추고 수행원을 바라봤다. 그룹 내에서 제법 힘을 가진 남자.
그를 잠시 응시하다 눈빛을 빛냈다.
“하, 하하. 내가 왜 그 생각을!”
울다 화내다 이젠 웃기까지 한다. 정신이 나간 사람마냥 발광을 하던 이재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남자의 양쪽 어깨를 확 잡았다.
“바로 그겁니다. 바로 그거예요. 하하...”
“전무님이 하신다면 저도 투자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이재진이 독립적으로 나선다 하더라도 그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육성그룹의 후계자요 핏줄이었다. 일단 사업을 시작하면 육성에서 지원이 들어갈 거고, 자연히 대박행진곡을 틀며 승승장구를 하게 될 것이다.
“고맙습니다. 내 이 은혜 잊지 않죠.”
이재진은 어질러진 방도 신경 쓰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노트를 펼쳐 사업 구상에 들어갔다. 이 시대에 딱 들어맞는 사업을.
“정했어.”
종이에 쭉 나열한 업종들 중 한 곳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것은...
-닷컴.
***
“뭐? 재진이가 사업을 한다고?”
“그렇습니다. 닷컴 사업에 뛰어들 걸로 보입니다.”
“어떻게 보나?”
“닷컴 시장에 좋지 않은 여론이 들끓고 있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지 같습니다. 그룹 차원에서도 약간의 도움을 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음...”
이건호 회장이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그룹에서 내치기는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아들을 위한 조치였다. 아들이 직접 손을 댄 사업이 망했다는 건, 승계작업에 있어서 걸림돌로 작용하기에 중간에 핸들링을 한 것이다.
“방구석에서 발광하는 것보다 낫겠지.”
“저, 한데...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걸리는 부분?”
이건호 회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남성을 응시했다.
어서 말해보라는 무언의 표시했다.
우물쭈물하던 남자는 이내 결심이 선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김정수 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다모커뮤니케이션과 야후 지분을 대량 매도한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김정수 회장이 누구던가? 투자의 귀재로 이름이 높으며 미다스 손의 소유자로 경영계 초거대 괴물로 여겨지는 기업인이었다.
그런 이가 한창 인기를 끌며 주가를 끌어올리고 있는 두 포털 사이트를 대량 처분했다는 건, 닷컴시장에 어떠한 변화가 일고 있음을 의미했다.
좋은 쪽이 아닌, 나쁜 쪽으로.
“음... 김 회장을 만나봐야 하나...”
다시 이건호 회장의 얼굴에 갈등이 떠올랐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실수 없이 투자와 병행하며 기업을 이끈 인물의 움직임이다.
쉽게 짚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여기서 내가 제동을 걸면 승계작업에 지장이 있어. 녀석의 상심도 클 테지.’
김정수 회장의 의견을 구하고 좋지 않다면 접게 하려 하였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누군가? 육성그룹의 오너이며 이재진은 육성의 핏줄이다.
아무리 시장이 좋지 않더라도 충분히 감당이 가능하다 여겼다.
“내버려 두게. 설사 손해를 본다 하더라 우리 선에서 막으면 그만이야.”
“알겠습니다.”
결국 이건호는 아들의 손을 들어줘 힘을 실어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아들을 믿었고 육성을 믿었다.
-이재진 전무 육성 인터네셔널 설립. 육성그룹 닷컴 사업에 진출하나? 후발주자 E육성, 인터네셔널이 투자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이재진 전무는 E육성 대표로 올라서다. 지분 60% 최대주주. 인터네셔널은 해외투자에 나설 예정이며 E육성은 국내에 투자해 IT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라 밝혔다.
“흠, 육성이 조만간 꽤 골 아픈 일에 휘말리겠네.”
아침에 날아든 경제신문의 기사를 보며 혀를 쯧 찼다. 하필 들어와도 거품이 고점에 오른 시점에 사업을 시작하다니.
미래를 뻔히 아는 덕에 앞으로 이재진과 육성그룹이 어떻게 엮여 정치판에 구르게 될지 훤히 그려졌다.
“나서지 않는 게 좋겠지. 그들이 어떻게 하든 내 일도 아니고.”
약간의 조언을 줄까 했지만, 꾹 참기로 하였다. 여기서 괜히 나서서 그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로 하였다. 당시 이재진 전무, 아니지. 이제 대표지. 이재진 대표의 눈빛을 봤을 때 ‘나’라는 존재를 크게 신경을 쓰고 있는 걸로 보였다.
“이번 기회로 비싼 공부를 하게 될 거야. 이걸 양분으로 삼아 성장하길...”
이재진 대표는 신규 사업을 이끌어 확장을 시켜 기업을 키우는 능력이 부족하다. 하버드대를 나왔다 해서 모두가 사업을 잘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장단점이 있고, 행하는 방식도 다르다.
이재진은...
“수성형 타입이지. 덕분에 육성은 완성된 기업이야. 이제 지킬 일만 남았어.”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재진의 건투를 빌었다. 아직은 젊어 삐뚤어지고 좁은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곧 눈은 트여 나무가 아닌 숲을 보게 되리라.
“오늘도 날이 좋구나.”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2000년도 새해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