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스티브 잡스
“여기가 한국.”
난생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을 방문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미국보다 발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시골이라 생각했던 한국은 높은 건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발전된 국가야. 선진국 반열에도 들지 못한 곳이라 보기엔 상당한 발전이야.”
미국의 회색 숲을 연상케 하는 도심을 거쳐 KJ빌딩이 있는 장소로 향하며 한국에 대한 평을 고쳤다.
“음... KJ는 시골에 본사를 두고 있었나?”
고속도로를 벗어나 안산에 들어서자 흙색 밭이 시야로 들어온다. 아직 녹지 않은 호수의 얼음과 논밭은 안산을 시골로 오해하게 만들기 딱 좋았다.
“25000원입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KJ빌딩.
택시기사에게 값을 치르고 수행원과 차량에서 내려섰다.
“조금만 지났을 뿐인데, 이곳은 엄청 발전했어. 이 빌딩 좀 봐. 여기는 우리 회사보다 훨씬 잘 되어 있어.”
세계적인 기업이라 치기에 빠지는 구석이 있다지만, 건물에서 느껴지는 위세는 기를 억누르게 만들었다.
애플보다 몇 배는 거대한 대그룹.
처음으로 느껴보는 위압감에 스티브 잡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 맺혔다.
“연 매출이 천조가 넘는 기업다워. 들어가지.”
세계 시장을 주무르는 기업답게 발을 들이미는 순간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코 나쁘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이 기분.
자주 느끼고 싶었다.
“이곳부터는 외부인 출입금지입니다.”
감성이 깨졌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목을 KJ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막아섰다.
“김정수 회장을 보러 왔습니다.”
“선약을 하셨습니까?”
“선약은 하지 않았지만, 당장 회장님을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생각도 못 한 장애물을 만났다. 스티브 잡스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직원에게 부탁의 어조로 물었다.
한국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왔다고 하면...”
“죄송합니다. 선약이 되어 있지 않은 분은 미국의 대통령일지라도 이곳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
애플이 KJ에 비해 많이 빠지지만, 그래도 미국에선 제법 알아주는 기업으로 통한다. 그런 기업의 회장이 자신이거늘.
설마, 한국에서 이런 대접을 받게 될 줄이야.
“어떻게...”
“죄송합니다. 또 그러시면 강제로 밖으로 끌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
“그리되시면 두 번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하니, 그냥 돌아가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예약은 비서실에 연락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직원은 똑 부러지게 말했다. 직원에게 있어 KJ 외에는 모두 하찮은 기업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KJ는 모든 기업의 위에 있었고, 그만큼 자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당신 후회할 겁니다.”
참다못한 수행원이 버럭 화를 냈다. 스티브 잡스를 수행하는 이들 또한 좋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직원을 압박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곳은 KJ빌딩이며, 회장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시면, 저희도 어쩔 수 없이...”
직원 주변으로 경비원들이 모여들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주변에 배치된 경비원들이 다가와 주변을 에워쌌다.
“휴... 됐네. 가지. 비서실에 연락해 약속을 잡게.”
“... 알겠습니다.”
수행원들은 분했다. 이런 굴욕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나, 날 선 시선은 직원에게 한동안 머물렀다.
“어허, 그만 하래도.”
“......”
스티브 잡스의 말에 결국 수행원들은 날 선 시선을 거두고 밖으로 향하는 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이번에 확실히 느꼈다. 자신은 약자이며, 확실한 을이라고.
***
똑똑─
노크 소리가 잔잔하게 방 안을 울린다. 책상 위로 향하던 시선이 문 쪽을 향했다.
“들어와요.”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이호영 비서실장이다. 그가 조심히 다가와 입술을 뗐다.
“방금 애플의 스티브 잡스 회장이 다녀간 걸 확인했습니다.”
“?”
“막 직원으로부터 보고가 있었습니다. 본인을 스티브 잡스라 칭한 이가 회장님과 만남을 청했으나, 약속이 되지 않은 걸 알고 밖으로 내보냈다 합니다.”
“허, 하... 하하.”
방금 내 귀로 엄청 황당한 보고를 들었다. 내 회사에 스티브 잡스가 왔단다.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가... 하하.
한데, 그걸 직원이 밖으로 내쫓았다는 보고는...
크하하. 웃음보를 터트리게 만들었다. 차마 크게 입 밖으로 웃을 수 없어, 속으로 엄청 웃었다.
“아주 잘했네요. 그 직원에게 보너스 지급하고 휴가를 주세요. 그런 훌륭한 직원은 상을 받아 마땅하죠.”
이 실장이 쉽게 말해서 그렇지, 사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KJ가 세계 경제를 책임지는 대그룹일지라도 재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이에게 그런 행동은 웬만한 담을 가지지 않고서 힘들다.
자칫, 불이익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직원은 KJ 차원에서 보호해 주고 상을 주겠지만.
“알겠습니다.”
“실장님이 직원들 교육을 잘 시키셨네요.”
“당연한 일입니다.”
뿌듯해하는 저 얼굴.
이럴 땐 참 솔직하지 못한 양반이다.
“그래서 그 잡스 회장에게서 연락은 왔나요?”
“네,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직원에게 보고를 듣고, 바로 그쪽 비서에게서 미팅을 요청했습니다.”
“제 일정이 어떻게 됐죠?”
“오후에 그룹 임원 면담이 잡혀 있고, 내일은 네트워크 마켓 실적 발표가 있습니다.”
“아, 그게 있었지. 모레는요?”
“모레는 협력사 대표와 미팅이 있습니다.”
... 일정이 아주 타이트하다. 면담, 미팅. 휴...
그러고 보면 운영체제 개발도 있으니, 조금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모레 4시에 시간 잡으세요.”
먼 타국에서 나를 보기 위해 온 스티브 잡스다.
꼭 만날 이유는 없지만, 무척 궁금증이 일었다. 그가 무슨 이유에서 나를 찾았는지 궁금증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4시로 잡겠습니다.”
이 실장은 복명복창 후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가는 걸 잠시 보다, 다시.
“하... 염병...”
다보탑을 연상시키는 결재서류에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룹결재를 전산화를 시켰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래, 오늘의 난 결재 기계다.”
뻐근한 목을 손으로 풀며 결재 삼매경에 빠졌다. 펜이 내가 되고 내가 펜이 되었다. 곧 내 정신세계는 펜과 혼연일체를 이뤘다.
스스스.
***
“모레... 알겠습니다. 회장님께 그리 전해드리죠.”
흑색 얼굴의 민머리 남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이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말이지, 한국인은 정말이지 매너가 없군.”
세계 최고의 재벌그룹이라 하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날아온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다니. 설사 예고도 없이 왔다 쳐도 가난한 국가의 기업이 미국인을 이리 대우한다는 건 너무한 처사였다.
“휴...”
이런 흑역사는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제기랄.
“모레요.”
“그렇습니다. 한데, 꼭 이렇게까지 해서 그를 만나야 하는 겁니까?”
흑인 남성은 아직도 마음이 풀리지 않는지,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스티브 잡스를 설득하려 했다.
“네, 그를 꼭 만나야 합니다. 그곳에 애플의 미래가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운영체제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해당 운영체제는 자신이 그리고 있던 프로그램. 꼭 얻고 싶은 아이템이었다.
“정말로 그 IOS가 애플의 미래라니. 저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만 애플이 손에 넣는다면 세계는 애플 중심으로 돌아갈 겁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흑인 남성의 말에도 스티브 잡스는 확신한다는 듯, 뜻을 굽히지 않고 못을 박았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이상 자신의 기분과 생각을 그에게 말하면 매너가 아니다.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애플의 최고 경영자.
무너지는 애플을 다시 일으킨 남자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
KJ그룹 회장실.
“오늘은 여러분의 생각과 건의사항 등을 듣는 자리입니다. 부담 없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KJ그룹 계열사 임원진들이 회장실을 가득 채웠다. KJ에서도 1%에 위치한 자들.
그들은 KJ의 실세요, 귀족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을 통치하는 건 나.
회장으로서 그들의 생각과 문제점 등을 듣는 건 무척 중요하다.
어쩌면 지시를 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사항이지 싶다.
“전 없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지금 회사생활에 만족합니다.”
하나, 어떤 임원진도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없는 걸 만드는 것도 경영자가 가질 자세라고요. 물론, 없는 걸 억지로 꺼내라 이 소리가 아닙니다. 평소에 이 KJ그룹에, 자신이 맡은 업무에 얼마나 충실했고, 관심을 보였는지 정도가 나타난다 봅니다. 만약, 어떤 말도 없다는 건. 여러분은 제가 키운 이 기업에 어떤 관심도 가지지 않는,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회의를 하면 늘 적극적으로 앞다퉈 말하는 사람이 있고, 회의 내내 존재 자체를 지우는 사람이 있다.
좋게는 입이 무겁다 말할 수 있지만, 난 그런 사람은 싫어한다.
말이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고, 기업인에게 있어 필수의 기술이라 봤다.
KJ그룹은 열정의 기업. 직원 중심 기업. 갖가지 문화가 적용된 다국적 기업이다.
그런 만큼 의견을 꺼내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설득하는 건, 경영자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때론 잘릴 거 각오하고 욕하는 것도 필요하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을 잡기 위해 쓰는 욕은 아주 좋은 약재료로 쓰인다.
“자, 그러니 어떤 것이든 자유롭게 말해보세요. 진짜 정 없다면 본인들의 가정사도 좋습니다. 직원들의 가정사를 듣는 것도 제 일이겠지요.”
서로 눈치 보는 모습이 귀엽게 다가온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귀엽다는 표현을 쓰기 뭣하지만,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빌리면 ‘귀엽다’는 표현이 결코 이상한 표현은 아닐 터다.
“정말로 KJ는 완벽한 기업입니다. 뭐 하나 꼬집을 게 없습니다. 단지 있다면...”
그때 내 우측에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번째에 앉아 있는 자동차사 대표가 입을 열었다. 상당히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나 그의 입은 다행히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회장님의 경영은 자원봉사 그 자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개선한다면, KJ는 더욱 큰 성장을 이루리라 봅니다. 투자자들도 그 부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끄덕. 끄덕.
위아래로 흔들리는 고개들이 여럿 보인다. 아무래도 오래도록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을 풀어주는 게 맞겠지.
내 경영의 방향성은 재벌이 아닌 ‘친서민’ 기업에 있다.
하나, 저들은 이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기존 기업들의 뒤를 따르려 하였다.
“제가 왜 친서민 기업을 지향하는지 아시는 분은 없겠지요. 이런 자리를 가지기를 잘했네요. 그럼 말씀을 드리지요. 제가 왜 자선단체처럼 가격을 올리지 않고 지금의 경영을 잇는지를...”
이제 저들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꺼낼 차례다. 내 두 시선은 자동차 대표가 아닌 모두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