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이윤희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헐레벌떡 뛰어오며 숨을 헐떡이는 윤희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확실히 재벌 가문의 봐오던, 아니 부자들 여식들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였다.
“아니, 뭐. 너도 참 칠칠맞다.”
“헤헤.”
푼수끼도 있고.
자, 보라. 그녀와 차림과 표정이 주변에 깔린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난 더 끌린다.
‘이건호 회장이 금지옥엽으로 키운 막내를 왜 내게 주려 하는지 알겠어. 그런 무리수까지 둬가며.’
그리고 날 잘 본 거겠지.
“가자.”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았다. 낯선 감각이 손에서 느껴오지만, 운전에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었다.
“오빠가 운전대 잡는 거 처음 봐요.”
내가 운전대를 잡은 차량은 벤츠 마이바흐 GLS600.
V8 엔진에 최대 마력 557hp. 배기량 3982CC다.
이런 멋진 차를 타고도 겨우 감상평이...
“내가 몰 일은 없으니까. 기사를 고용한 이유가 대신 운전해 달라는 건데, 일자리를 뺏을 수 없지.”
“그럼 오늘은 왜 오빠가 해요?”
“이런 날도 있어야 기사님이 쉬지.”
“... 오빠 직업 바꿔도 될 거 같아요.”
“응?”
갑자기 이건 무슨 말?
“무슨 말을 그렇게 막힘 없이 해요?”
“아, 난 또 뭐라고. 사실이니 그렇지. 생각을 해봐. 하루 종일 운전만 해야 된다고. 아무리 내가 고용주라도 고용인에 대한 배려는 필요한 부분이야. 이런 걸 복지라 말한다면, 그건 경영자 실격이야.”
“오빠, 그거 알아요?”
“아니, 모르는데.”
“아씨, 들어봐요.”
후후, 21살다운 모습이 보기 좋다. 운전을 하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빠 같은 사람이, 아니지. 그런 경영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 거 같아요?”
“나 하나.”
“......”
“왜 그런 눈으로 봐?”
“예뻐서 봤어요.”
예뻐서 봤다라, 눈빛이 재수 없다는 눈빛인데. 내 착각이길.
차량은 정릉IC를 지나 구리 방면으로 접어들었다.
“근데, 어디 가요?”
“공부하느라 고생도 하고, 이왕 만난 거 좋은 곳에서 차 한잔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설마, 납치?”
“야, 날 뭐로 보고.”
“짐승요.”
“너 진짜 짐승 만나본 적 없구나?”
“어머!”
킬킬. 반응이 재밌다. 조금씩 그녀에 대해 알아가는 기분이다.
이 성격이 거짓이 아니면 참 좋겠다.
“어! 호수다.”
잡담을 하며 달리던 차량은 청평호수에 접어들었다. 나는 그중 호수와 가장 가깝고 높게 솟은 건물로 향했다.
-스타벅스.
“이런 곳에 카페가?”
“호수뷰랑 녹색뷰가 마음에 들어서 여기다 건물 짓고, 카페를 차려봤지.”
1층은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2층과 3층이 메인.
“이런 곳이 장사가 돼요?”
“안 되면 어때. 어차피 나를 위해 준비된 공간인데.”
이곳의 목적은 수익이 아닌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해 만든 데 있다.
4층부터는 숙박 시설로 꾸몄다. 그러고 보니...
차가 많네.
웅성웅성.
“와, 사람 짱 많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이 바글바글. 이런 보고는 듣지 못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아, 회장님 오셨습니까.”
책임자가 나를 알아보고 반긴다. 윤희의 놀란 시선을 뒤로하고 책임자를 바라봤다.
“어떻게 된 일이죠?”
“그것이 여기가 명소로 소문이 나면서 숙소를 예약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습니다. 중간에 쉼터로 여기는 사람들도 이곳을 찾아 호수와 산을 보며 커피를 마시다 갑니다.”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별생각 없이 지었는데, 관광명소가 되어버리다니.
어쩐지 오는 길에 이상하게 카페들이 많이 생겼다 했다.
“오빠 여기 진짜 예뻐요.”
“다행이네. 여기 카페라떼 두 잔 위로 올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손님이 직접 가져가는 주문방식이었으나, 여기는 직원이 직접 전해주는 방식을 취했다. 주문을 마치고 윤희를 먼저 위로 올려보내고 뒤를 따랐다.
살랑거리는 그녀의 치마 아래쪽을 가려주기 위한 나름의 배려였다.
“아, 부럽다. 나도 이런 곳 가지고 싶네요.”
“가지면 되지. 뭘 고민해.”
그녀의 재산은 족히 수천억.
고민할 이유가 없다.
“아빠가 싫어할걸요? 이대도 아빠가 권해서 남자들 없는 이대로 간 건데. 제가 카페 하겠다 하면 난리 치실 걸요? 계열사 하나 입사시키려고 혈안이신데.”
재벌 자녀들의 삶이란 정해졌다. 북한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졌다 말할 정도로 국내 재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넌 하고 싶은 게 뭔데?”
“KB재단 입사요.”
응? 여기서 갑자기 웬 재단? 그리고 육성 사람이 왜 KJ를?
갑자기 튀어나온 그녀의 말에 크게 당황했다.
“솔직히 재단 차려서 실제로 누군가를 돕는 걸 본 적 없어요. 그냥 기업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에게 장학금 명목으로 지원하는 건 많이 봤어도요.”
하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날에 어디서 얼마를 지원했다 정도는 들었지만, 그 외는 크게 들어 본 바 없다.
“KJ에 들어오고 싶은 이유가 그거야?”
“솔직하잖아요. 지원 내역도 투명하고 어디를 언제 어떻게 지원하겠다는 내용도 달리고. 어느 기업이 그런 걸 다 공개하며 관리를 해요. 솔직히 비자금 챙기는 저금통 역할을 하는데.”
이 여자... 너무 솔직한 거 아냐? 다행히 룸으로 된 방이라 밖으로 이야기가 새어나갈 염려는 없지만.
드르륵─
순간 심장이 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뜨끔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책임자가 직접 커피를 가져온 소리였다. 크게 안도하고 시선을 다시 윤희에게 가져갔다.
“솔직한 건 좋은데, 장소는 가리자. 자칫 구설수에 오를 수 있다.”
“헤헤. 미안해요.”
“미안한 소리를 듣자고 한 소리는 아니니 됐어. 근데, 정말 의외네.”
“왜 의외죠?”
“그렇잖아. 재벌 하면 사람들이 가진 인식이 편하게 성공 길에 오르는 뭐 그런 건데. 넌 편한 길 놔두고 어려운 길을 택하고 있으니. 좀 신기해.”
“날 그런 사람들과 같은 취급은 하지 말아줘요. 정말 그런 사람들 보면 근처에도 가기 싫으니까요. 물론 우리 가족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
푼수 같으면서도 귀엽고, 귀엽다가도 기특한 구석이 있다. 오늘 여러 가지 이유로 윤희를 만나보길 잘한 거 같다.
“KJ에 온다 해서 너의 직급이 막 오르지 않아. 난 규정대로 갈 거야. 물론 팔은 안으로 굽을 수 있겠다 싶지만, 그게 널 위한 방향은 아닐 거야.”
KB재단은 자원봉사기업이다. 그런 만큼 현지로 직접 나가 봉사하는 이들에게 더욱 높은 평점을 주며, 그와 함께 근무태도를 합산해 위로 올라가는 현실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여느 기업처럼 학벌이 좋다고 우대해 주지 않았다.
“뽑아주고 말씀하시죠. 저 아직 이대생이에요.”
피식.
듣고 보니 그렇네. 너무 앞질러 생각했다.
“그만 일어날까? 시간도 제법 오래됐으니.”
그녀와 처음으로 많은 대화를 나눠봤다. 그녀에 대해 제법 많은 걸 알게 됐다.
아직 그녀에 대해 마음을 확 잡은 건 아니지만, 좀 더 지켜보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래도 모처럼 어여쁜 여자와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
“크하하.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웬 양아치가 아가씨께 접근해 아가씨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김 회장님이 출연해 일을 깔끔하게 해결을 보시는데, 백기사가 따로 없었습니다.”
이건호 회장은 즐거운 웃음을 지으며 윤희의 수행원의 보고를 들었다.
“그래서 다음은?”
“김 회장님이 직접 나서서 만든 카페로 가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제법 뷰도 좋고 분위기를 내기 좋은 카페였습니다.”
“이거 잘만 하면 KJ회장을 사위로 받아들일 수 있겠어. 그렇지 않은가?”
“미리 축하드립니다.”
KJ회장의 장인이 된다는 건 많은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많은 걸 얻을 수 있었다.
‘그 사람 성격으로 바라는 건 주지 않겠지만, 기업가치는 오르겠지. 막내만 잘 산다면야...’
KJ에 바라는 건 많지 않다.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많은 걸 줬지만, 막내에게 준 건 주식이 다였다.
처음에는 김정수 회장이 욕심이 났지만, 그 욕심은 막내와 하나가 되어 행복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계속 주시하게. 그리고 중간중간 김 회장이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 내게 보고하게.”
딸의 행복을 바라는 아빠의 마인드가 발동했다.
잘되기를 간절히 빌며 막내를 위한 행동에 나서기로 하였다.
***
1999년 10월.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었다. 울긋불긋하게 변한 주변을 둘러보며 도로를 달렸다.
바람 소리가 창 너머에서 들려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LCD 개발 건은 어떻게 되고 있다고 하던가요?”
뒷좌석에 앉아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비서에게 이재진이 물었다.
이재진은 지금 용인에 자리한 연구소 일부 공간을 LCD개발연구소로 꾸려 개발 중이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하고 있다 합니다.”
“지금 뭐라고 했나요? 시작도 못 했다?”
이재진은 들려온 말에 귀를 의심했다. KJ에서 받은 필름을 연구소에 보내 대대적인 지원에 나섰는데, ‘시작했다가 아닌 시작도 못 했다’ 말에 황당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육성에는 바보 천치만 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다 극한의 분노가 머리끝으로 향했다.
“요즘 연구진들이 배가 불렀나 봅니다. 안 그래요?”
“......”
비서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의 분노가 피부로 전해져 온 까닭이다. 여기서 자칫 말을 잘못했다가 화가 자신에게 미칠 확률이 컸다.
“당장 연구소로 가세요. 당장!”
그에게 답을 들을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는지, 바로 용인 연구소로 갈 것을 주문했다.
육성그룹 본사로 가던 차량이 급하게 유턴을 하며, 용인으로 방향을 바꿨다.
***
-인텔 LCD모니터 판매 재개! 인텔이 전과 달라진 데스크탑과 다이어트로 살이 빠진 얇은 모니터 판매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국내 예약자만 무려 100만 명이 물리는 한편, 총 누적주문(전 세계) 1천만 대가 넘는 오더를 받았다.
육성전자를 포함하여 전 세계가 LCD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을 때, KJ는 판매에 들어갔다. 인텔, 마이크로 소프트의 주가가 끝없이 오르는 상황. 전년 대비 10배가 넘는 주가가 만들어졌다.
“시기도 적절하네요.”
“곧 있으면 학교는 겨울방학에 들어가니, 겨울 이벤트까지 걸려 있어 딱 좋은 거 같습니다.”
“일단 KJ그룹 컴퓨터를 전부를 바꾸시고, 그 후에 학교, PC방 기업 가정용으로 공급하세요.”
이때만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예상대로 시장반응은 무척 호의적이었다.
말이 100만 명이지 이 정도면 국내 시장 점유율을 떠나 반독점에 가까운 결과물을 만들었다 볼 수 있었다. 기업들은 특허로 묶인 KJ기술을 따라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특허보호기간은 20년.
여기서 더하여 미래 특허기술들을 시기에 맞춰 한두 개씩 특허를 등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기는 곧 2000년.
나는 10년을 당겨 두 가지 품목을 새로이 등록해 세계에 발표할 참이다.
“제가 드린 걸 세계에 발표하세요. 안드로이드, IOS를..."
이제 세상은 KJ에서 제공하는 운영체제를 이용해 스마트폰을 만들게 되리라.
“이제부터 정말 재밌는 일들이 생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