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저놈이?
“분명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기억 안 나네. 거기가 어디였지?!”
그날 이후로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이윤희 생각.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어디선가 접한 얼굴이었다. 머리가 그리 비상하고 천재적인 면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중요한 사람들의 얼굴은 기억하는 편이었다.
“안 되겠어. 알아보자.”
궁금한 건 참지 못한다.
그는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검색했다. 번호가 뜨고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김인서.
번호의 주인공이었다. 처음 윤희의 번호를 알고자 번호를 요구했으나, 번호를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윤희의 번호를 알기 위한 밑 작업으로 인서의 번호를 얻었다.
-어, 오빠! 안녕하세요!
인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영은 만족한 미소로 입가에 짓고, 입술을 뗐다.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내가 분명 윤희를 어디서 본 거 같거든? 그런데 기억이 안 나. 혹시 걔네 집에 대해 알 수 있을까?”
이런 건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게 좋았다. 괜히 머리 쓴다고 빙글빙글 돌리다, 원하는 정보도 얻지 못하고 소심한 남자로 낙인이 찍힐 수 있었다.
또한 그런 성격도 되지 못했다.
-어?! 오빠 모르셨어요? 전 아는 줄 알았는데.
“걔 유명해?”
-엄청 유명하죠. 싸이월드에 걔 이름 치면 바로 나와요. 호호.
“싸이월드??”
-네. 쳐보세요. 그럼 아실 거예요. 엄청 놀라실 걸요? 호호.
이런 화법은 신수영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진한 호기심이 일었다.
동시에 무언가 머릿속으로 흐렸던 기억이 돌아오는 기분을 느꼈다.
그 순간. 띵!
“알았어. 고마워.”
-오빠 약속 잊으면 안 돼요.
“알았어. 내가 책임지고 밀어줄게.”
-땡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신수영은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 맞아. 싸이월드. 여기서 본 거 같아.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이윤희.
인터넷을 켜고 싸이월드로 들어가 이윤희를 검색했다.
-우리 가족 사진.
“...... 하.”
엔터를 치고 들어간 화면 메인에 놀라운 진실이 두 눈동자로 들어왔다.
이건호 회장을 주축으로 육성가문 식구들이 자리해 있었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옆쪽에 일촌 신청을 한 흔적이 보였다.
신청은 받아 주지 않은 상태.
하지만, 지금에 있어 그건 큰 의미를 두지 못했다.
“이거 완전 대어잖아.”
자신의 집도 부족함이 없는 가문이지만, 육성에 비하면 무척 부족했다.
야망은 있지만, 채워지지 않은 상태.
하지만, 육성의 자녀와 이어진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대어를 낚으려면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지.”
신수영은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 중에 유일하게 미모도 가장 출중하고, 성격도 크게 나쁘지 않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런 여자를 놓친다면 평생을 후회 속에 살리라.
부르릉!
거대한 사각 박스를 연상케 하는 Jeep 랭귤러가 격한 엔진음을 토해냈다. 덜덜 떨리던 붉은 차량은 햇빛에 붉은 광채를 반사하며 이대로 달렸다.
“제시간에 맞춰 왔네.”
도착한 시간은 윤희의 수업시간이 끝나기 30분 전이다. 신수영은 차량에서 내려 이윤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어쩐지 도도함이 하늘을 찌른다 하더니. 딱 내게 맞춰진 여자였어. 전날 보자마자 편히 말한 게 좀 걸리지만, 오늘은 좀 다른 모습을 보이면 또 달라 보이겠지.”
여자들에게 있어 첫 이미지는 무척 중요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첫 이미지. 신수영은 그걸 만회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우월한 키와 외모.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자신의 재력과 외모에 흠뻑 빠져 넘어왔다.
아무리 신수영이 재벌가 여식이라 하지만, 아직은 21살.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충분히 요리해 그녀의 마음을 얻을 자신이 있었다.
“윤희 씨!”
그때다. 저 앞에서 걸어오는 이윤희와 인서가 눈에 들어왔다. 신수영은 전날과 다르게 그냥 윤희가 아닌 ‘씨’를 붙여 그녀를 불렀다.
“기다렸어요.”
“......”
“오빠 안녕하세요. 윤희 좋겠다. 나 먼저 간다. 잘 해봐.”
인서가 윤희의 등을 앞으로 밀고는 의미 모를 미소를 취하다, 신수영에게 살짝 윙크를 날리고는 자리에서 벗어났다.
“쟤, 쟤가! 비켜주시겠어요.”
이윤희는 멀어지는 인서를 노려보다 자신의 앞길을 막는 신수영에게 낮은 톤으로 말했다.
지나치려 하였으나, 그가 막고 있어 지나가지 못했다.
“조금만 이야기해요.”
“계속 막고 있으면, 후회할 거예요.”
이윤희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멀리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윤희는 그에게 짧게 경고했다.
“전에 내가 실수한 거 같아, 사과하러 왔어요.”
“......”
달라진 그의 말투에 그녀의 고운 아미가 중앙으로 모이며 작은 내천 자를 그렸다.
느끼함이 전해오는 오한이 피부를 떨리게 만들었다.
“그건 받도록 하죠. 그럼 됐으니, 비켜주세요.”
“잠시만. 저에게 시간을 주시죠.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이윤희의 얼굴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그. 비키라 말했음에도 끈질긴 그의 태도는 불쾌감을 증폭시켜 주었다.
“마지막 경고예요. 비켜요.”
‘미안하다’ 한마디를 건네고 떠났다면, 다시 봤을 법도 하건만, 그의 의도가 눈에 고스란히 보였다. 스키 동호회를 탈퇴해야겠단 생각이 더욱 확고하게 변했다.
“그리고 오늘부로 회원 탈퇴할 테니 그만 아는 척하세요.”
“지금 이게 무슨...”
꾹 눌러 참던 화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신수영은 너무 어이가 없어 가출한 이성을 찾아올 생각도 못 하고 본능에 몸을 바쳤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신수영 씨.”
갑자기 찾아든 불청객만 아니라면.
이윤희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가며 정면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 놀라움이 듬뿍 담긴 감정이 맺혔다.
***
“그러고 보면 회귀하고 나서 여자는 처음이네.”
그동안 일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처음 이건호 회장의 의도를 알고 불쾌감이 어렸으나, 막상 이윤희를 만나고 보니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만약, 이윤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대상이 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기분은 느끼지 못했을 터다.
“나쁘지 않은 여자야. 오히려 괜찮은 여자야.”
재벌 티를 내지 않는 모습도 마음에 들고, 저녁 시간에 가진 그녀의 대처도 마음에 든다. 그래서 더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정말이지, 서울 길은 몇 번을 와도 피곤해.”
신촌을 지나 이화여대 근방에 당도했다. 무슨 차들이 이리도 많은지.
단 몇 년 사이에 차량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이거 많이 늦었는데. 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길이 엇갈릴 거 같아, 미리 전화해 가고 있음을 알리려 하였지만, 이상하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음...”
문자도 남겼지만, 답장은 없다.
무슨 일이라도 처한 걸까? 아니면 핸드폰을 분실하거나 집에 놓고 오기라도 했나? 생각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회장님, 이윤희 아가씨가 저기 보입니다. 한데, 상황이... 이상합니다.”
그러던 차 이화여대 후문에 다다랐을 즘 기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어디요?”
“저쪽입니다.”
기사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가리킨 방향에 이윤희가 어떤 남자에게 붙잡혀 곤란한 표정을 짓는 장면이 시야로 들어왔다.
“... 신수영? 여기서 세우세요.”
복잡한 사람들로 인해 후문에서 적당히 떨어진 장소에 차량을 멈출 걸 지시했다. 오늘 타고 온 차량은 벤츠. 아무도 나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티 나지 않게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후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부로 회원 탈퇴할 테니 그만 아는 척하세요.”
“지금 이게 무슨...”
그리고 들려오는 둘의 대화.
신수영이 윤희의 걸음을 묶어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임을 인지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신수영 씨.”
윤희의 두 눈과 닿았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많이 놀랐음을 보여주었다.
“정수 오빠.”
“무슨 일인지 파악했으니, 잠시 기다려.”
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당신 뭐야?”
“모두 물러서세요.”
사방에 깔린 경호원들이 급히 움직이려 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학생들이 주변을 에워싼 경호원들 모습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직 신수영은 주변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
하지만, 그도 현재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나를 노려보던 시선을 주변으로 옮겼다.
“...?!!”
곧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현 상황을 인지한 모습을 보였다. 되도록 혼자 오고 싶은 마음이 강했으나, 요즘 세상이 참 무서워 경호원을 빼놓고 다닐 수가 없다.
수십의 경호원들이 신수영을 압박했다. 그 틈에는 이윤희의 경호원도 함께했다.
“이분은 KJ그룹 김정수 회장님이십니다. 예를 갖추기 바랍니다. 만약 불순한 행동을 할 시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선임 경호원 대장이 다가와 내 정체를 밝혔다.
“아, 아.”
“윤희는 만나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러니 더는 무례를 범하지 말고 이쯤에서 물러나고, 두 번 다시 윤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약속하면 더는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저, 전 그냥. 실수한 일에 대한 사과를 하기 위해 왔다...”
이런 놈한테 윤희를 주기에는 확실히 아깝다. 가문과 돈을 떠나 이놈은 쓰레기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세요.”
“감사합니다. 아니 죄송합니다. 그럼 전 이만!”
이제 신수영은 윤희 주변에 얼쩡거리지 않을 것이다. 그만한 조치도 마련된 상태.
그는 급하게 차량에 올라 자리를 떴다.
“감동건설에 경고장을 보내세요. 오늘 일은 잊지 않겠다고.”
“그리하겠습니다.”
나를 따라나선 비서에게 해당 안건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을 주문했다.
“저, 오빠.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어느 정도 주변이 정리된 상황. 윤희는 아직도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만나기로 했으면 데이트란 것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와, 완전 감동.”
신수영에게 보내던 시선과 다르게 선한 눈빛이 그녀의 분위기를 분홍빛으로 만들었다.
“감동은 뒤로하고. 왜, 문자와 전화를 안 받았지?”
신수영에게 경고를 보내면서 내내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
그와 대화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문자나 전화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아! 내 폰!”
그러던 차, 토끼 눈이 부엉이 눈으로 변했다. 윤희는 두 손바닥을 짝 마주치고는 울상을 지었다.
“정말 미안해요. 저 강의실 다녀올게요. 충전 중이었는데, 놓고 왔어요.”
“......”
그녀는 완벽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허당이었다.
사과하고 허겁지겁 학교로 달려가는 윤희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인간미는 있네.”
새로운 매력을 느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