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이윤희
이화여대 불어불문과 교실.
딩동댕동─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학교종이 울리며 수업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교수는 동그란 안경알을 올리고는 전공서를 챙겨 교실을 나섰다.
“아, 끝났다.”
수업시간이 제법 힘겨웠는지, 학생들은 교실을 나설 생각도 못 하고 책상 위에 머리를 박았다.
“넌 재벌 같지 않아.”
단발머리에 귀엽게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올린 여자가 다가와 긴 생머리로 얼굴을 가린 채 책상과 하나가 되어 있는 여자에게 다가왔다.
“내가 재벌이냐? 아빠가 재벌이지.”
이름은 이윤희. 이건호 회장의 막내딸로 알려진 여자다. 윤희는 다른 재벌 자녀들과 달리 재벌임을 티 내지 않았다. 옷도 평범하게 입고 등하교는 여느 아이들처럼 전철과 버스를 이용했다.
덕분에 입학 초기에 윤희가 재벌집 막내딸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우연히 보게 된 그의 가족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너 그 말 밖에 나가서 하지 마라. 방금 왕 재수 없었다.”
여자가 황당한 얼굴로 윤희를 바라보다 허무한 시선을 보냈다. 윤희의 이력은 언론을 통해 소개돼 꽤 유명하다.
육성에서 운영하는 육성랜드 지분 9%, 육성네트웍스 230만 주와 육성SDS 257주에 해당하는 주식을 보유한 소식은 모든 학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재수 있거든! 아, 소리쳤더니 배고파.”
친구의 말에 책상과 하나가 됐던 고개가 튕기듯 위로 올라와 옆자리를 차지한 친구를 바라봤다. 참으로 선하게 생긴 눈동자가 여성의 시선과 닿았다.
“에휴, 그래. 그래. 넌 재수있는 여자야. 어련할까.”
“오늘 밥은 네가 쏘는 거다?”
“... 벼룩의 간을 강탈하려는 저 마인드. 존경스럽다.”
“히히. 가장.”
친구의 어처구니없는 시선에 윤희는 귀여운 미소를 흘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쓱 팔짱을 끼고 교실 밖으로 이끌었다.
얼마 후 교실에는 조용한 공기만이 흘렀다.
“오늘 부대찌개 먹자. 급 당겨.”
“눼이. 눼이.”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여러 번 움직이며 후문으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 하였다. 후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 남자만 아니었다면.
“아가씨. 모시러 왔습니다.”
“하아... 은아야. 아무래도 밥 못 먹을 거 같다.”
“별수 없지. 잘 들어가. 나 간다!”
경호원들 사이에 낀 윤희를 슬쩍 보다, 경호원들의 시선에 부담을 느낀 여성은 후다닥 후문을 벗어나 경삿길로 내려갔다.
뒤도 보지 않고 빠르게 앞질러 갔다.
“아빠가 보자 했나요?”
평소 자신의 뜻을 잘 들어주는 아빠다. 그래서 혼자 다니는 게 가능했는데, 지금의 상황은 단 하나를 의미했다.
아빠의 지시.
“모시겠습니다.”
“휴......”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별수 없었다. 윤희는 주변에 느껴지는 시선을 받으며 차량에 올랐다.
“그냥 문자나 남기지. 그게 뭐가 힘들다고.”
사전에 언급이라도 했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했을 터인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닥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좋아하는 친구와의 식사도 파투나고.
아빠를 보면 따져야겠다 생각하며 시트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무슨 일인데, 갑자기 보자 하셨어요.”
막히는 도로 탓에 40분이 지나고서야 목적지에 도착해 이건호 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윤희는 뿔난 얼굴로 이건호가 앉은 자리 건너편에 앉았다.
“허허. 왔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그 무슨 버릇이냐.”
“아빠는 말도 없이 사람 보냈잖아요. 제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알아요?”
이건호의 피가 섞여서일까? 단 한마디도 물러서지 않고 전투적인 모습을 보이는 그녀였다.
“쯧쯧. 여자가 그리 강해서 어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겠느냐? 그러니 아직도 남자친구가 없지.”
“내가 뭐가 강한데. 나 연약한 여자거든?”
다른 자식들과 달리 유일하게 격 없이 지내는 핏줄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자식들과는 다르게 대하였다. 엄한 아버지의 모습보다는 자식과 소통하는 모습.
“그리고 그건 아빠가 잘난 탓이잖아. 아무도 내게 접근을 못 해.”
입학 초에는 제법 인기가 있었다. 친구부터 시작해 선배들까지 찾아와 매일같이 대쉬를 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짧은 추억으로 끝났다.
‘윤희 이건호 회장 막내딸이래.’, ‘으아, 대박.’, ‘큰일 날 뻔했네.’ 등등의 말들이 오가며 윤희에게 접근하려는 남자는 싹 사라졌다.
“목소리 낮춰. 얘가 그렇게 조신하지 못해서 어따 써.”
“아빠 딸인 걸 어떡해.”
“왜 거기서 내가 나와. 제 엄마를 닮아서는.”
“아니거든! 아빠거든! 엄마 욕하지 마!”
“에잉, 쯧쯧. 딸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이건호는 혀를 쯧쯧 차며 섭섭함을 내보였다. 주변 사람들이 지금의 이건호 회장의 모습을 봤다면 크게 놀랐을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 찾은 이유가 뭔데? 연락도 없이. 그것도 갑자기. 이렇게.”
단 한 번을 지지 않는 윤희였다. 학교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학교에서는 피곤에 찌든 털털한 여학생의 표본이라면, 지금은 가히 말괄량이계 장군감이었다.
“소개팅하자.”
“... 방금 뭐라고 했어?”
“이젠 귀까지 먹은 게야?”
“나 정략결혼하는 거야?”
재벌 가문은 정략을 통해 가문을 키워간다. 서로에게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문의 행사. 아무리 어여삐 여기는 딸이라 할지라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넌 진짜 운이 좋은 거야. 그만한 인물에 그만한 사람 찾기 힘들어.”
“뭐, 좋아. 아빠 딸이니. 이해할게. 근데 누군데?”
솔직히 싫었다. 재벌 가문이라는 이유 하나로 자유로운 연애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여타 핏줄은 자유로이 연애를 하며 즐기기도 하지만, 그건 또 성미에 맞지 않다. ‘아무나’ 막 만나는 그런 저렴한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덕분에 그 많은 재벌 가문 자녀들의 만남 요청이 들끓고 있음에도 가지 않은 건, 아빠의 배려 덕.
‘그딴 쓰레기들에게 내 딸을 보내라고! 괘씸한!’
고민할 걱정도 없이 모두 걷어차 버렸다.
그렇게 다 반대하던 아빠가 저리 칭찬까지 하는 모습이라. 신선하면서도 무척 궁금했다.
“KJ 김정수 회장.”
“뭐? 진짜? 거기서 나 좋대?”
진짜 리얼로 서프라이즈를 경험했다. 기습적으로 치고 들려온 이름은 놀라움을 자아냈다.
“아니. 이제 추진해야지.”
“에이. 난 또 뭐라고. 그럼 그렇지.”
한때 육성그룹은 왕족 대우를 해줬다. 하지만 그건 옛말이 되어 버렸다. 그저 귀족 출신에 불가했다. 반면, KJ는 영국 왕실도 인정할 만큼 대한민국에서 황제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젊은 회장이니, 재벌 가문에서 눈독을 들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왜? 아쉬운 게야?”
딸의 묘한 반응에 이건호의 눈이 게슴츠레 변했다. 가자미 눈이 딸의 표정을 주시했다.
“아빠가 몰라서 그래. 김정수 회장님이 여학생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잘생겼지. 매너 있지. 인성갑이지. 완전 난리도 아니라니까. 연예인 저리 가라야.”
아무리 다른 재벌 가문의 여식과는 남다른 모습을 보여도 그녀의 나이는 이제 21살.
이성에 대한 눈을 뜨고 로망을 꿈꿀 시기이다.
“... 그래서?”
“난 그분과 대화하는 것만으로 행복할 거 같아. 안 되면 멀리서 응원해야지. 꼭 좋은 여자 만나라고!”
“......”
이건호는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지금껏 봐온 딸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가문 내에서야 털털하기로 유명하지만, 밖에서 딸의 모습은 가히 육성에 어울리는 도도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한데 지금 모습은 김정수 회장의 어떤 부탁도 들어줄 것처럼 두 눈가에 하트를 뿅뿅 달아 헤어나오지 못했다.
“알았다. 가봐.”
더 같이 있다가 스트레스 해일에 휘말려 쓰러질 거 같다. 이건호는 딸을 밖으로 내보내고 생각했다.
“그냥 하지 말까?”
딸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 오늘 처음으로 느껴본다.
***
-눈앞에 다가온 21세기 1999년 종말론이 큰 화제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이 개신교일각에서 제기되면서, 최근 발간되는 종말론 관련 도서들이 서점가를 휩쓸고 있다.
-한편, 미국의 미래학자인 존 니스빗은 메가트랜드2000에서 세계적인 경제호전, 예술의 번영, 환태평양 부상 등을 언급하며 21세기를 희망적으로 풀이했다.
“음. 종말이라. 지구의 종말이 올 거라 생각하세요?”
두 기사 중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에 시선을 뺏겼다.
“에이, 그건 종교인들이 관심을 받기 위해 짜 맞춘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말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자원이 마르면 모르겠지만, 전 절대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후후,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신문을 덮었다. 더 읽을 기사도 없었고, 현 주제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종말이 온다면 무리한 발전으로 발생한 공해와 그로 인한 각종 질병에 인구수가 줄어든다? 이 정도면 조금은 납득이 되겠네요.”
Y2K가 언급이 되면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해에 원자로가 이상이 생기는지에 대한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는 보도가 뜬 상태.
거기에 더해 유성과 충돌한다는 별 미친 소문까지 떠돌아다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하하. 회장님 말씀이 노스트라다무스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참에 책 하나 내시는 게 어떠십니까? 회장님이 내시면 아주 잘 팔릴 거 같은데. 블롬즈버리도 좋아할 겁니다.”
“아유,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전 그런 민망한 건 하기 싫습니다. 그리고 글은 아무나 쓰나요. 전 이렇게 읽는 걸로 만족하겠습니다.”
이호영 비서실장에 낯간지러운 소리에 몸을 벅벅 긁었다. 괜히 상상해서 귓불이 뜨거워졌다.
‘유명한 기업가들 대부분이 책을 냈지. 그런데 그건 전부 자기 자랑을 쓴 걸로밖에 보이지 않아.’
그들은 시기가 맞았고 운이 따라 돈을 번 케이스다. 물론 그들의 지식과 행동력과 실력이 따랐음은 인정하는 바이다.
그저 그때와 지금은 많은 부분에서 다름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특히 나 같은 경우는 운이 좋았지. 그런 도움들이 없었다면 난 전생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을 거야.’
무엇이 기회인지, 무엇인 옳은 선택인지 안다는 건 세상을 살아가며 무척 중요하게 작용했다.
따르릉─!!
생각이 깨졌다. 들려오는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가 생각을 방해했다.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전화가 온 걸 확인하고는 이호영 시장이 자리를 비웠다. 중요한 전화이거나, 본인이 들어서는 안 될 내용이 담겨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모양이다.
그리고 내게로 직접 걸려오는 전화는 무척 드물다. 대부분이 비서실을 통해 들어오지, 이렇게 직접 걸려오는 경우는 아주 극소수다.
“전화 받았습니다.”
-허허, 김 회장님. 별고 없으셨습니까?
“......”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나 싶었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이건호 회장이었다. 어제 봐놓고 웬 별고 타령.
“네.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그게 이번 협상 건에 대해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에 제가 다시 한번 대접하고 싶어 연락을 드렸습니다. 오늘 저녁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으로 초대해도 되겠는지요?
대체, 뭘 노리고 전화를 한 건지. 잘 모르겠다.
갑자기 생각이 복잡하게 엉켜 어지럽게 만들었다. 방금까지 종말론을 이야기했는데, 머릿속이 유성과 부딪혔다.
-꼭 초대하고 싶습니다.
“... 좋습니다. 오늘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모를 일이지만, 그의 집을 한 번쯤 구경하고 싶기는 했다. 그와는 이제 파트너로 묶인 사이. 이 정도 호의는 이제 받아도 되리라 봤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착각일까? 이건호 회장의 목소리가 무척 즐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