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KJ전자
“LCD사업은 기준치 미달로 양산 시점이 뒤로 미뤄지고 있습니다.”
초기사업인 만큼 문제점도 많고 양산 기준치를 맞추기 힘들 거다. 불량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양품. 지금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할 시기.
“불량률이 많은 가요?”
“47% 선입니다.”
음...
“양품인지 불량인지 애매모호한 것들은요?”
“전체 생산에 15% 정도 차지합니다.”
어라? 나쁘지 않은데.
애매모호한 불량품들. 대개 이런 건 양품일 경우가 많다. 애초에 목표로 삼은 건 50%.
충분히 시도할 만하다.
“그 15%로 정한 것까지 포함해 양산에 들어가세요.”
“알겠습니다.”
“그걸 바로 인텔로 보내세요. 인텔엔 내가 연락하죠.”
광학필름만 되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다.
LCD모니터는 광학필름만 해결되면 즉시 생산에 들어갈 수 있었다.
긴 시간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가며 LCD모니터 1세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KJ전자는 이제 시작이다.
1999년도 이제 가을.
시간은 참 빠르게 흘렀다.
외환위기가 바로 엊그제였던 거 같은데, 달력은 2000년도를 향해 달려갔다.
-KJ전자 LCD광학필름 개발 성공!
-인텔 LCD모니터 양산 돌입! KJ전자에서 광학필름 개발에 성공하면서 KJ그룹 계열 인텔에서 LCD모니터 생산에 돌입했다. 기존 뚱땡이 모니터로 불리던 CRT 모니터를 단종시키고 LCD모니터를 주력으로 내놓았다. 한편, KJ전자는 이 기술을 활용해 LCD TV를 만들 계획이라며 현재 생산되는 모든 제품을 순차적 단종을 선언하는 한편, 3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에 나섰다.
-KJ그룹 또 일냈다. 세계 기술력 10년 앞서다.
일본경제는 10년 뒤처졌지만, KJ는 10년을 앞서가는 기술력을 선보였다.
덕분에 경쟁기업인 육성, 엔씨, IBM 등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지금 KJ에서 꾸준히 특허를 내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대로 진행도 되지 않은 상황에 설마 KJ에서 LCD모니터 개발에 성공할 줄이야. 허...”
육성전자 개발진들의 탄식이 짙게 터졌다. 아직 CRT에서 벗어나지 못한 단계에 얇은 디자인으로 제작된 LCD모니터가 시중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으니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 회의에서 이번 안건이 나올 게 뻔한 상황에 이거 참...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이건호 회장은 TV에서 비치는 그대로의 인물로 사업 욕심이 엄청난 인물이다.
그렇기에 반도체 산업을 고집해 지금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도움 없이 LCD를 개발하기에 무리가 따랐다.
일이 참 고약하게 되었다.
PM 1시 20분.
“휴, 어쩌겠습니까? 사실대로 보고를 올려야지. 괜한 거짓을 고했다 몰매를 맞는 건 우리입니다.”
“휴... 이만 일어나죠.”
연구진들만 이번 사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해답이 없으니, 나설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
“......”
육성그룹 대회의장으로 이건호 회장을 중심으로 개발진들을 포함해 임원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먼저 말문을 여는 이는 없었다.
모두 이건호 회장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모두 할 말이 없는 걸 보니, 이번 일에 대한 해결책이 없는 모습입니다?”
정적이 흐르는 대회의장에 이건호 회장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그의 매서운 눈동자가 회의장에 자리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의 눈에는 어떤 감정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면목없습니다.”
누군가 용기 내 입술을 뗐다. 고개를 숙인 모습이 조선 시대 죄인을 보는 기분이다.
반역자 최후의 모습이 저러지 않을까 싶다.
“잠시 멈출 신호로군요. 막히는 건 멈춤을 의미합니다. 멈추고 다음을 위해 정비하고 출발하는 게 좋겠죠.”
“...!?”
“......?”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의 눈에 놀란 눈동자가 이건호 회장을 향했다.
그들은 이건호 회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에 의문을 담은 시선을 보냈다.
“나도 압니다.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마음을 가볍게 하세요. 무거우면 세상이 무겁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하나, 이건호 회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꼭 우리 걸 고집할 필요 없지요. 없다면 밖에 나가서 가져오는 수밖에.”
“... 아!”
“...!!!”
그제야 사람들의 어둡던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이건호 회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 까닭이다.
“우리가 더운밥 찬밥을 가릴 때가 아니죠. 뱃속에 들어가면 찬밥도 더운밥이 됩니다. 우리가 안 되면 찬밥이라도 가져와 먹는 게 맞는 일. 연구는 멈추지 말되, 지금 문제로 가난한 마음을 가지지 마세요. 마음속에 풍요를 심고 일에 집중하세요. 안 되는 건 내가 하겠습니다.”
이건호 회장의 눈빛이 변했다. 잔잔하게 흐르던 그의 목소리에 힘마저 느껴졌다.
사람들은 이건호 회장이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를 하였다. 그의 모습에 회의장은 존경의 물결이 사람들 중심으로 흘러 이건호에게 집중됐다.
“명심하겠습니다.”
걱정으로 가득하던 회의장에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이건호 회장이 존재했다.
***
“육성에서 연락 왔습니다.”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 이때, 이호영 비서실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올 것이 왔다였다.
“예상이 벗어나지는 않았네요.”
이번 사업을 진행하면서 몇 가지 상황을 정리했다. 그건 몇몇 기업에서 찾아와 기술협조를 요청하는 것.
그것 외에 경쟁사가 곧 바뀌게 될 시장을 버틸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1년만 시장을 독점해도 시장변화는 극명하게 갈린다. 기존 기업은 경쟁력을 잃고 주저앉게 되고 종내에는 사업 포기선언에 이른다.
이번 일로 이건호 회장의 행동능력에 짧게 감탄했다.
“받아보죠. 연결하세요.”
“바로 연결하겠습니다.”
이호영 실장이 밖으로 나가고.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길게 울렸다.
“바꿨습니다. 김정수입니다.”
-저번에 뵙고 오랜만입니다. 김 회장님. 오늘 뵈었음 하는데,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수화기 너머로 이건호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호 회장은 살가운 목소리로 약속을 요청했다.
“뵌 지 좀 되었으니, 오랜만에 뵙도록 하지요. 어디가 좋겠습니까?”
-요 앞에 제법 맛있는 한정식집이 있습니다. 괜찮다면 제가 모시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직접 차량을 보낼 생각인가 보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리고 한국에서 내 차만큼 좋은 차도 없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쪽에서 움직이도록 하죠. 주소는 비서실로 부탁합니다.”
-허허.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과한 호의는 필요 없다.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무시했다.
굳이 그에게 빚을 질 필요도 없고.
PM 5시.
“차량 준비했습니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이호영 실장이 들어와 차량이 준비됐음을 알려왔다.
옷을 대충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실장님도 함께하죠. 오늘 이건호 회장이 맛있는 걸 산다 하니. 저만 먹을 수 있나요.”
“전 괜찮습니다. 추후 회장님께 얻어먹겠습니다.”
불편한가?
그래도 농이 늘었다.
“그래요. 그렇게 하도록 해요. 내일 시간 비워 두세요.”
“제 일정은 회장님과 함께입니다. 하하.”
참 좋은 사람이다. 그와 유쾌한 대화를 나누고 방을 나섰다.
부릉─!!
오늘 좋은 날이라는 듯, 롤스로이스 펜텀이 경쾌한 투레질을 해댔다.
롤스로이스가 대기를 뚫고 앞으로 쭉 밀고 나갔다.
“설날 때 어땠어요?”
도로를 달리는 와중 기사에게 물었다. 전에 물어볼까 하다 잊고 물어보지 못했는데, 이제야 물어본다.
“하하. 덕분에 저 완전 성공한 사람 취급을 받았지 뭡니까. 주변에서 어찌나 부러워하던지. 육성그룹 계열사 부장으로 있는 친척이 한 명이 있는데, 처음으로 어깨를 폈습니다.”
“하하. 종종 애용하세요. 기사님 차다 생각하고.”
“어휴, 제가 어찌 개인 용도로 사용을 하나요.”
“일정만 잡혀 있지 않으면 괜찮으니, 맘껏 이용하세요.”
교차로에 정차한 차 안. 그가 좋아하니 나도 좋다.
“곧 회사 영업차로 롤스로이스가 추가로 한 대 입고 될 겁니다. 그 관리를 기사님이 하세요.”
영국에 자리한 롤스로이스사에 연락해 차량 한 대를 추가로 주문했다. 직원들 복지로 내놓기로 한 이상 제대로 해보기로 하였다.
“아휴, 제가 어찌...”
기사가 크게 부담스러워한다.
“기사도 두 명 더 추가 모집할 겁니다. 제 일정 때문에 기사님이 가족과 시간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앞으로 기사님이 책임지고 일정을 짜서 운영하세요.”
“......”
차가 출발했다. 차체가 살짝 흔들리는 걸 보니 꽤 긴장한 눈치다.
무려 KJ그룹의 오너 전속 기사다.
이 정도는 되어야 뽀대가 나지 않겠나?
“급여도 올라갈 거고 여러 혜택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잘해 보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가족 앞에서만 어깨를 펴게 할 수 없다. 운전기사라고 무시 받지 않도록 내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어느덧 차량은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다.
내 롤스로이스를 알아본 육성그룹 수행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후다닥 나와 질서정연하게 앞에 섰다.
“이리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안에서 회장님이 기다리십니다.”
알아서 뒷문을 열어주는 육성그룹 수행원들의 도움을 받아 차량에서 내렸다.
사람들이 존경 어린 시선으로 응시한다.
“부탁하죠.”
경호원들이 뒤를 따라 안전을 확보했다. 육성에서도 꽤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정원을 지나 긴 복도 중심에서 우측에 위치한 방으로 안내됐다.
드르륵─ 한지로 꾸며진 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이건호 회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이쿠, 오셨습니까? 저도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 다리가 불편해, 죄송합니다.”
이건호 회장이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겼다. 얼굴에 미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진심이 느껴졌다.
“괜찮습니다. 이런 거까지 따지면 한도 끝도 없지요.”
위치를 떠나서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 아닌가? 한참이나 오래 산 인생 선배를 불편한 몸을 이끌게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내가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냄새가 참 좋네요.”
자리에는 이미 불고기 전골 요리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최고급 한우로 만든 전골 요리가 냄새만으로도 최상급임을 알 수 있게 해줬다.
벌써부터 배가 요동쳤다.
“시장하실 거 같아 미리 준비를 해봤습니다. 먼저 식사부터 하시죠.”
지금 시간이 6시 반.
우리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잠시 대화를 멈추고 먹는 데 집중했다.
전골 요리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배는 점점 불러왔다.
2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간만에 맛있는 요리를 먹었습니다.”
우리의 식사는 끝났다. 잣이 둥둥 떠 있는 수정과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우리는 술 대신 수정과를 마시며 대화를 시작했다.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렇게 맛있는 집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저도 종종 애용을 해야겠네요.”
“하하. 제가 이 집 사장에게 영업비를 받아야겠습니다. 대 KJ그룹의 컨택을 받게 했으니 말입니다. 하하.”
이건호 회장의 얼굴이 즐거워 보인다. 지금 자리가 꽤나 만족스러운가 보다.
“그도 그렇네요. 하하. 꼭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하. 진즉 모실 걸 그랬습니다.”
잠깐의 잡담 시간을 가졌다. 바로 본론을 이야기를 해도 상관없었지만, 그가 바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니 잠시 그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그러기를 10분.
“제가 이 자리를 만든 이유에 대해 대충 눈치를 채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가볍던 분위기 속에 무게가 실렸다. 입에 가져간 수정과가 든 잔을 내려놓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말씀해보세요.”
“큼, 그럼 빙글 돌리지 않고 말씀드리지요. KJ에서 개발한 LCD와 모니터 건에 대한 기술협력을 받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