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보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거기에 도장만 찍어주시면 100억까지 빌려줄 겁니다.
-정말로 그걸로 되는 거야?
“... 이런 쓰레기들이!”
혹시 몰라 남몰래 방 내부에 도청장치를 부착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는 동안 방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을 도청했는데, 정도를 넘어선 이야기가 귓가로 흘러왔다.
“전 바로 들어가 지금의 대화를 막겠습니다. 당장 이 사실을 회장님께 알리세요.”
이연희 실장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런 대화까지 듣게 되자 열불이 발밑에서 가슴을 타고 위로 올라왔다.
즉시 부하직원에게 일러 회장에게 연락을 취하라 지시를 내리고 걸음을 움직였다.
“지금부터 모든 내용은 제가 대신 처리하겠습니다.”
문을 벌컥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다수의 수행원과 경호원도 함께였다.
“무, 무슨 짓이에요! 지금!!”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이연희에 당황한 정지은은 겁을 먹다, 맞은편에 지예가 있음을 깨닫고 목소리에 힘을 줘 언성을 높였다.
“여사님, 죄송합니다. 이후 벌어질 문제에 대해서는 이 자리가 끝난 뒤 책임을 지겠습니다.”
단호함이 서린 이연희의 눈빛이 정지예의 두 눈동자와 마주했다.
조금의 물러섬이 없는 눈빛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당황스러운 건 정지예도 마찬가지.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선을 이연희에게 보냈다.
“회장님 지시입니다.”
“네? 정수가 왜?”
“회사 재무구조를 확실히 파악하지 않은 채 투자하는 행위는 위험한 행동입니다. 1천만 원도 아닌 100억 규모의 보증은 가문과도 이어진 점. 회장님 재가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죄송합니다.”
가문에 해가 되는 행동이란 사실을 숨기고 모든 건 김정수 회장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걸로 대화를 몰아갔다. 이건 일종의 정지예를 배려한 이연희의 마음이기도 했지만.
‘곤란한 일이 생길 경우 내 이름을 팔아도 좋습니다.’ 김정수의 지시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이보다 확실한 이유도 없었다.
“아니, 무슨. 이걸 왜 그 녀석이 판단해요. 그리고 당신이 뭐라고 이 일에 끼어들어요. 당장 나가세요!”
정지은은 그녀의 목소리 따위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을 하여야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 정수가 왜...”
정지예는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의 지시이고 아들이 나섰다 하니,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곧 회장님이 이곳에 도착하실 겁니다.”
“......”
“......”
순간 방 안에 적막감이 찾아왔다.
“아, 제가 바쁜 일이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형님, 전 이만 자리에서...”
“회장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곳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서교원의 몸이 제지당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경호원들이 서교원의 양어깨를 구속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오! 당장 놓지 못합니까!”
“놔요! 이거! 당신들 이거 성추행이야. 고소할 거야!”
서교원이 힘으로 발악하고, 정지은은 자신의 몸에 손댄 경호원들을 성추행으로 고소하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방 안은 삽시간에 개판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
“허,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보증?”
어이없고 황당함이 소화기관에 영향을 끼쳤다. 숨을 쉬는데, 코가 막히는 기분이다.
이 사람들 갈수록 도를 넘어선다.
“회장님 이모부께서 여사님께 대출 100억에 대한 보증을 요구했다 합니다.”
“... 허허.”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 한두 번은 할 수 있다. 실수란 모르고 저지른 잘못을 이야기한다.
그래, 그것이 실수라 우리는 말한다.
한데, 그들이 벌이는 짓거리를 실수라 가볍게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실수가 아닌 사기라 칭하는 게 올바른 표현일 터다.
“당장 해당 은행으로 가지요. 은행에 일러 어떤 대출도 승인하지 말라 이르시고, 한국제조에 대해 빠짐없이 조사하세요.”
엄마의 유일한 가족이기에 적정선에서 넘어가려 하였다. 그래서 몇 번이고 참고 잊으려 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니 사람을 가마니 취급을 한다.
확실한 벌이 필요하다 여겼다.
“바로 조사에 착수하겠습니다.”
이호영 실장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걸음이 바빠진다.
“차량 대기하세요. XX은행지점으로 갑니다.”
내 몸은 KJ빌딩에서 엄마와 쓰레기들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차량은 차도를 따라 달렸다.
따르릉─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은행에 도착하기 5분 전에 들려온 벨소리다.
-한국제조에 대한 조사가 끝났습니다.
지시를 내린 지 50분.
인력이 많으니, 조사도 빠르게 이뤄졌다.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차량은 신호에 막혀 좌회전 깜빡이를 켠 채 교차로에서 대기 중이다.
저 멀리 은행 건물이 보였다.
-시간이 짧아 전부 알아내지 못했지만, 한국제조에서 회장님 이름을 이용해 대략 500억 규모의 투자를 받고 은행에서는 회사를 담보로 100억대 대출을 받은 걸 확인했습니다. 공장 확장 공사 과정에서 건설사로부터 자재비 일부를 돌려받은 정황도 확인됐는데, 시간을 더 주시면...
이거 완전 범죄 집단이잖아?
이 실장의 보고를 듣다 화가 치밀어 올라 쌍욕을 퍼부을 뻔하였다.
“그쯤이면 됐습니다.”
신호가 바뀌었다. 차량이 서서히 움직여 좌회전을 하였다.
1차선에서 2차선으로 2차선에서 3차선으로 차선을 바꿔 우회전 깜빡이를 켰다.
“더 조사해 보고, 이 사실을 검찰에 알리세요.”
난 이들 부부를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다.
-알겠습니다.
“도착했습니다.”
핸드폰이 내려지는 타이밍에 맞춰 기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차량 문이 덜컥 열리며 지점장으로 짐작되는 50대 남성부터 시작해 엄마를 수행, 경호하던 이들이 자리로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수행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하다. 꽤 긴장한 모습.
하나, 그들의 기분이 어쨌든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제 허락이 있을 때까지 아무도 방에 들이지 마세요. 그리고 기자회견 준비하세요.”
이제 그들은 벌을 받아야 할 때가 왔다. 아주 처참하게 붕괴를 시켜 주마.
절대 편히는 살지 못할 것이다.
“저, 정수야...”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먼저 보이는 얼굴은 엄마다. 엄마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씁쓸함이 밀려왔으나, 꾹 참고 고개를 틀었다.
“......”
“... 큼.”
이모가 고개를 숙인다. 나와 눈이 잠깐 마주친 이모부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무안함을 피하려 애썼다.
“엄마, 이곳은 제가 처리할게요. 쇼핑이라도 하며 쉬고 계세요.”
“정수야, 이게 있잖아.”
“엄마. 부탁해요.”
“정수야...”
“엄마, 예전에 그랬죠. 돈 없어도 사기 치지 말고 정직하게 살라고. 그런데, 그 정직과 착함을 이용해 죄 없는 사람을 고통에 빠트리려 하고 있네요. 엄마는 그런 사람을 용서할 수 있나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정수야.”
“그런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네요. 다음 내용은 집에 가서 다 말씀드릴게요. 뭐 하세요. 엄마를 모시세요.”
엄마는 강인하신 분이다. 자식에 대해서만큼은.
하지만, 동생과 가족에 한해서는 또 약하시다.
엄마가 불안한 눈으로 나와 이모 부부를 번갈아 보지만, 시선을 돌렸다.
“빨리 모시세요.”
“정수야, 잠깐만. 엄마 말 들어봐. 정수야!”
약해지려는 마음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수행원들의 힘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개새끼들...
난 선택의 기로에 섰고, 선택을 하였다.
“저와 할 말이 많죠. 두 분.”
지옥행 열차에 그들을 올리는 것. 그것이 내 선택이고 내가 할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 더는 내 가족이 아니다.
“우리가 뭐, 뭘 잘못했다고 이래. 돈이 없어서 회사가 어려워져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거지. 네가 도움을 줬다면 좀 좋아.”
“그래. 정수야. 생각을 해봐. 우린 가족이야. 이 정도 도움은 받을 수 있는 거잖아? 능력이 없다면 모를까? 도움 정도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겁을 상실한 이모가 막장 드리블을 시작했다.
이모부가 그 공을 센터링을 받아 머리로 들이박는 광경은 나를 더욱 화를 내게 할 뿐이다.
“도움... 좋죠. 가족끼리 도움. 그런데 왜 그 도움을 우리 가족은 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을까요? 혹, 기억나세요?”
쓰레기 새끼들.
아빠가 다쳤을 적, 집에 돈이 없어 치료비를 위해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
‘언니 미안해.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들어.’
‘이번에 회사 사정이 좋지 못해, 미안합니다.’
당시 이해는 했다. 모두가 힘든 시기라는 사실을. 한데, 회사 사정이 어렵고 힘들다던 이모네는 더 넓은 평수의 집으로 이사를 하고 해외여행을 떠났다.
당시 결혼반지와 내 돌반지를 팔고, 부모님 유품까지 팔고서야 치료비를 간신히 만들 수 있었다.
늘 소중히 여기고 계시던 아빠의 선물.
그때만 생각하면... 개새끼.
“그런 개소리를 늘어놓고 내게 투자? 도움? 염치가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지. 시발.”
더는 내 안에 봉인된 화를 억누를 생각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사라졌다.
“지, 지금 어른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
“닥쳐! 시발XX들아!”
사업을 시작하고부터 욕을 모르고 살았는데.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보다.
“......”
“......”
“내가 당신네들 조사를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 재무구조도 엉망인 회사를 내 이름 석 자를 팔아 상당한 투자를 받으셨더만. 건설비를 높게 책정해 돈도 빼돌리고? 회계는 정상적으로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그런 일을 벌여 KJ그룹과 내 얼굴에 먹칠을 한 죄. 당신들을 전부 명예훼손과 사기죄로 고소하겠습니다.”
그리고 난 이 사실을 알려 둘을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나락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변명은 법정에 가서 하시죠. 당신들과 많은 대화를 할까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두 분을 보니 무지 역겹네요. 같이 있는 것조차 너무 힘이 들어 더는 같이 있지 못하겠습니다.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네들에게 앞으로 벌어질 악몽을...”
방 밖이 시끄럽다. 나는 대화를 끝내고 문을 열었다.
“검찰에서 왔습니다.”
“저기 저 두 사람입니다. 잡아가세요.”
때마침 검찰이 도착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나머지는 KJ로펌 변호사들이 일을 맡을 거다.
“기자들이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대화를 끝내니 많은 부분들이 진행됐다. 예상대로 기자들의 행동은 어느 누구보다 빠르다.
내 걸음은 곧장 진을 치고 있을 기자들이 있는 은행 현관문으로 향했다.
찰칵찰칵─
터지는 셔터 소리를 들으며 기자들 앞에 선 난, 수행원들 보호 아래 입을 열었다.
“여러분을 모신 건 KJ와 저의 이름을 팔아 부당 이득을 챙긴 일당들에 대해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저는 이 둘을 명예훼손과 사기죄로 고소할 생각입니다. 한국제조 서교원 대표와 그의 아내 정지은 씨에게 투자를 했거나 빌려준 분들은 즉시 돌려받기 바랍니다. 절대 KJ와 저와는 어떤 연관도 없는 사람들임을 다시 밝히며 피해를 본 분들은 바로 돈은 회수해 가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난 절대 두 부부의 인권을 챙겨줄 생각은 없다. 자를 욕보였고 가족을 욕보였다. 심지어 친언니에게 사기까지 치려 하였다.
“저 두 사람 신상까지 털어 공개하세요. 얼굴 모자이크할 필요 없습니다.”
가족을 파는 자들의 인권을 보호할 만큼 나는 착하지 않다. 이제 이들은 법의 심판을 받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지옥으로 한없이 주저앉게 될 것이다.
멈칫.
“엄마...”
차량에 오르려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눈물 흘리며 주저앉는 엄마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걸음은 차량에서 엄마에게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