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1999년도 희망차게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하늘 위로 가오리연이 꼬리를 흔들며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팽팽하게 늘어진 하얀 실들이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였다.
길게 늘어진 채 하늘을 나는 연을 보며.
“도착했습니다.”
“고생했어요. 명절인데 푹 쉬세요. 그리고 트렁크에 선물도 넣어 놓았고,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설날이 되었다. 일에 치여 설날 직전이 되어서야 마무리 짓고 집으로 올 수 있었다.
나로 인하여 일찍 고향에 내려가지 못한 기사에게 미안한 마음에 지갑을 열었다.
“아니, 이런 걸 또 다. 전 괜찮습니다. 회장님.”
“아니에요. 기사님도 엄연히 KJ 직원입니다. 게다가 제 직속이지 않습니까? 고생하는데, 이 정도는 챙겨 드리는 게 맞는 겁니다.”
수표 18장. 만 원권 지폐 20장.
총 200만 원을 넣었다. 고향 가면 나가는 게 돈이다. 이 돈은 아마 고향에 있는 가족을 위해 사용하게 될 터다.
그리고 이게 상사 된 자로서 책임 아니겠나?
“감사합니다.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 주시다니…”
“그리고 이 차는 끌고 가세요. 가족들도 가장이 모는 좋은 차 타봐야죠.”
“아이쿠, 아닙니다. 어찌 제가 이런 차를…”
국내 한 대뿐인 차로 유명한 내 애마. 롤스로이스 팬텀.
그걸 그에게 거머쥐어 준 것이다.
“기름은 늘 가지고 다니시는 카드로 넣으세요. 그럼 전 갑니다.”
“회, 회장님!”
“가세요.”
기사가 나를 불러오지만, 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나의 업무는 끝, 차도 제 역할을 다했다. 이제 나도 푹 쉬어보자.
“……”
회장이 떠난 차량 안. 홀로 남은 기사 김보식.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어, 돈을 벌기 위해 재력가 운전기사로 나섰다. 경력 15년.
이 또한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식구들을 위하여 악착같이 버텨 돌고 돌아 KJ그룹으로 흘러왔다.
한 장, 두 장, 세 장, 네 장, 다섯 장…
뚝. 뚝…
손에 한가득 잡히는 지폐와 수표.
마음이 따스하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롤스로이스를 몰아본 남자 중 한 명. 그가 자신이 되었다.
김보식은 아직도 온기를 머금고 있는 핸들을 손끝으로 느끼고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다녀오면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회장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핸들을 틀고 액셀을 밟았다. 액셀은 건물을 나가 집으로 향했다.
그 시각.
“회장님, 정말로 저 차를 기사에게 빌려주셔도 되겠습니까? 자칫 사고라도 나면…”
저택에 터를 잡고 있는 수행원 중 한 명이 멀어져가는 롤스로이스를 보며 인상을 굳혔다.
사고 싶다 하여 아무나 살 수 없는 차가 롤스로이스다.
귀족의 풍모를 갖춘 차. 비싸기도 비싸지만, 명예도 함께인 차.
그런 차량을 기사에게 일주일간 빌려주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차는 사람이 만들었어요. 사람보다 명예가 위라면 전 저 차를 즉각 폐기해 버릴 겁니다. 제 직원이라면 누구라도 좋아요. 원할 때 언제든 말하세요. 빌려드리지요.”
차는 망가지면 수리하면 되고, 폐기되면 다시 사면 된다.
하지만 내 사람은?
그런 어이없는 부분까지 생각해 사람을 이끌 생각은 없다.
“네?! 아, 죄송합니다. 전 괜찮습니다.”
급하게 고개를 숙이는 수행원. 그의 모습에 씁쓸하지만, 이건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기에 그냥 넘겼다. 여기서 더 해 봐야 이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 일이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
“아빠, 이 차 뭐야? 이거 회장님 차 아니야?”
김보식의 보금자리. 그곳으로 롤스로이스 팬텀이 하얀 햇살의 광채를 뚫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들어선 차량에서 내린 남자. 김보식의 모습에 그중 딸이 섞여 있었는지, 여자가 툭 튀어나와 보식 앞에 등장해 물었다.
“회장님께서 타고 가라 하지 뭐냐. 네 할머니 몸 편찮으신 걸 예전에 잠시 말한 적이 있었는데, 회장님이 배려해 주셨어.”
“와! 대박. 완전. 진짜!??”
보식의 말에 딸이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좋아?”
“이럴 게 아니지. 나 집에 다녀올게.”
물음과 다른 말을 꺼내고는 꾀죄죄하게 있던 얼굴을 가리고 후다닥 아파트 건물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대체 뭔 일인가 싶어 주변을 어슬렁댔다.
“김 씨, 어디 대박이라도 터진 거야?”
“어르신, 안녕하세요. 대박이 아니라 제가 다니는 곳 회장님이 빌려주신 거예요. 어머니랑 편히 고향에 다녀오라고.”
“허, 허허. KJ라 했던가?”
“네. 어르신.”
하얀 한복을 입고 걸어 나온 80대로 보이는 노인이 롤스로이스를 보며 부러움 가득한 감정을 눈동자에 담았다.
“내 손자도 거기 다닌다고 공부를 하는디. 회장이랑 친하면 잘 좀 봐줘.”
“아효. 제가 어떻게 그런 걸. 전 인사에 관련해 어떤 힘도 없어요. 그냥 기사일 뿐이에요.”
롤스로이스를 타고 온 걸 보자 노인은 김보식이 KJ에서 제법 힘 좀 쓰겠다 생각했다. 아니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 일개 직원에게 이런 걸 빌려줄 회장은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우리 손자가 참 착실해.”
“죄송합니다. 어르신.”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다. 모든 행동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모르기는 몰라도 기자가 붙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그릇된 행동으로 은혜를 준 KJ에 누를 끼칠 수 없었다.
“KJ는 모두에게 공평한 기업입니다. 그런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미안하네. 무리한 부탁을 해서.”
노인은 사람의 시선이 신경이 쓰인 건지, 그도 아니면 김보식의 강한 거절에 의함인지 등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이 참으로 씁쓸하다.
“엄마, 저것 봐봐. 할머니 저기 봐요! 내 말이 맞죠?”
집으로 들어갔던 김보식의 딸이 가족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옷이 바뀌어 있었다. 아무래도 고향을 가기로 했던 옷차림을 바꾼 걸로 보였다.
겨울과 어울리는 하얀 코트를 입고 몸이 불편한 할머니의 다리가 되어 롤스로이스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끙.
오늘 몇 번이나 듣는 질문인지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거절할 걸 그랬다.
김보식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회장님이…”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했다.
“아! 정말 고마우신 분이네요.”
“그렇지. 어느 기업을 가도 이런 분은 모시기 힘들 거야.”
김보식의 입가에 다시 따스한 미소가 맺혔다.
“아빠 이거 어떻게 열어?!”
그때다. 문을 열 줄 모르는지 딸이 민망한 얼굴로 보식을 불러 물었다.
“그거 앞쪽에 손잡이 있어. 저거, 아니다. 내가 해줄게.”
귀여운 딸의 모습에 보식은 걸어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딸은 할머니를 태우고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당신도 타. 이제 가야지.”
“네…”
그것도 잠시, 보식의 아내는 롤스로이스를 보며 침을 길게 꾸-울꺽 삼키더니 두 주먹에 힘을 불끈 쥐고 안으로 탑승했다.
꽤나 긴장을 한 모양이다.
그런 아내와 신기한 듯 이것저것 보는 딸을 보며 고향으로 향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회장님.”
설날 아침이 밝은 날.
“……”
“……”
“……”
“……”
“……”
KJ대저택으로 백여 명의 임원진들이 거실과 방을 채웠다. 그 장관에 거실에 있던 엄마와 아빠 그리고 그 외 사촌들이 깜짝 놀라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름만 대면 다들 아는 유명인사들이 내게 인사를 하겠다고 찾아왔다. 심지어 미국과 영국에서도 발걸음을 하였다.
블롬즈버리 대표 주드 로 대표.
인텔 라나 대표.
베어링스 제임스 맥어보이 대표.
은행장으로 있는 제라드 버틀러.
마이크로 소프트 빌 게이츠 대표.
소주 임효원 대표.
식품 김주식 대표.
자동차, 네트워크 마켓, 구글, 거기다.
“찾아오지 않을 수 없더군요. 하하.”
버크셔 헤더웨이 워런 버핏 회장까지.
모두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언제 이런 인사들을 눈앞에서 만날 수 있겠는가?
“잘 오셨어요. 거참. 집이 좁았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네요.”
안산시 미개발지역을 사들여 작정하고 최대한 넓게 지었다. 주차장은 최대 300대까지 주차가 가능했고, 갖가지 건물들이 대지 위를 차지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물은 역시 부모님과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1층 로비 공간만 500평. 지하 3층. 지상 5층.
천장을 바라보면 5층 지붕이 보이는데 통유리로 되어있는 멋들어진 집이었다.
“회장님도 복 많이 받으시기 바라요.”
워런 버핏 회장에게 답례 인사를 하고, 주변에 포진해 있는 대표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많기는 진짜 많다. 해외 지사장부터 시작해 국내 대표들이 내 앞에 있으니. 이걸 뭐라고 표현을 하면 좋을지. 완전 관심종자가 되어버렸다.
추석에는 이러지 말라고 해야겠다.
“여러분들도 복 많이 받으세요. 저를 직접 찾아와 인사를 해주어 감사합니다. 이리 오셨으니, 파티장이 있는 곳에서 작게 연회를 즐기다 가세요.”
그리고 이런 대인원을 받아들이기 위한 파티장 건물도 마련했다. 이 파티장은 지붕도 열리게 되어있다.
그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수행원들을 시켜 임원진들과 워런 버핏 회장을 파티장으로 모셨다.
“내가 우리 조카 잘될 줄 알았다니까. 내가 언니에게 말한 적 있잖아.”
“네가 언제 그랬어.”
“어머, 그걸 잊었어? 정수 태어날 때, 내가 막 기저귀 갈아주면서 그랬잖아. 정수야, 여기 앉아봐. 이모가 정수 어릴 때 참 예뻐해 준 거 잘 알지?”
임원진들이 빠져나간 거실. 귀부인이라도 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던 이모가 고개를 쓱 내밀며 눈빛을 보낸다.
그 모습이 왜 이리 가식적으로 느껴지는지… 그걸 엄마는 황당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 더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게로 쏠리는 이목.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안 나네요.”
말은 이리했지만, 사실 기억한다. 이모가 얼마나 거짓말의 달인인지. 날 돌봐달라 부탁하며 엄마가 이모에게 돈을 주고 나갔는데, 그 돈만 꿀꺽하고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이모부와 집에 붙어 앉아 놀기 바빴다. 그러다 친구들을 불러 고스톱을 하기 바빴던 이모.
내게 주어진 식사라는 것이 술안주로 있던 먹다 남은 음식들.
그나마 좋았을 때는 우유병 던져주고 내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때인 거 같다.
때리지 않은 게 참 다행이었지.
그 사실을 버리고 저런 뻔뻔한 얼굴로 내게 거짓말을 할 줄이야. 참 대담도 하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 더는 꺼내기도 싫었고, 오늘은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 날이라 좋게 넘기기로 하였다.
“그렇겠네. 넌 이모랑 이모부한테 잘해야 돼.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가족인 거 너도 잘 알지?”
“……”
거실에 있다가 별소리를 다 듣겠다 싶어 방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그 행동이 제지당했다.
“요즘 너네 이모부 사업이 잘돼서 사업확장을 하려 하는데, 정수 네가 좀 보태라. 그리고 정수 네가 이모부 회사에 오다도 좀 몰고. 우리에게 주면 그중 일부를 현금으로 돌려서 네게 줄게. 어때? 네게도 좋고 가족 모두가 좋아지는 일이야.”
어디서 뭔 소리를 어떻게 듣고 왔는지 모를 일지만,
분명한 건 무척 귀찮은 일에 휘말릴 거 같은 좋지 않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난 당겨오려는 골을 만지려던 손을 간신히 참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전 피곤해서 올라갈게요.”
할 말은 많은데 엄마 때문에 참았다. 그리고 이 분위기를 더 험악하게 만들기 싫어 두 번 참았다. 세 번은 나도 힘들 거 같기에 눈과 귀를 막고 방으로 올라갔다.
제발, 이 이상 도가 넘는 개소리는 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을 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