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타깃
쉬이이—
1998년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붉은 물결이 차츰 흐려져 회색빛으로 물들어가는 시기.
끼리릭, 공기를 뚫고 거대한 기체가 활주로로 바퀴를 내밀어 밀고 들어갔다.
빠르게 지나가던 미국의 경치가 공항으로 바뀌었다.
“차량을 대기시켜 놨습니다.”
빌 게이츠를 필두로 라나 대표와 수십의 수행원들이 열을 맞춰 쭉 늘어져 서 있었다. 군복 대신 정장을 입고 도열한 그들을 보자 열병식 분위기가 묘한 감동을 불러온다.
“오늘은 먼저 그린우드 묘지로 갈 겁니다.”
먼저 발길을 뉴욕에 자리한 그린우드 공동묘지로 정했다. 그간 바쁘다는 이유로 가지 못했던 올리버 스미스의 묘지를 올해가 가기 전에 방문하기로 하였다.
다른 인물들의 묘지 위치도 알 수 있다면, 참 좋았을 터인데.
“이곳은 왜?”
오면서 내내 조용히 있던 라나 대표가 물었다. 묘지가 보이는 창 너머로 보이는 시선을 거두고 라나 대표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제 스승이 이곳에 계십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빌 게이츠와 라나 대표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미국에서 학교를 나오셨습니까?”
“한국에서 모든 교육을 수료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당연한 질문일 수 있겠다. 내게 숨겨진 비밀을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
“학교에서 나왔지요. 꼭 한국이라고, 직접 배워야 스승이겠습니까? 제가 존경하고 제 인생에 가르침을 부여했다면 그 사람이 제 스승이 되는 거지요. 제 마음속 스승입니다.”
아! 하고 터지는 감탄 소리.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둘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둘의 모습에 픽 웃고는 차량에서 내렸다.
수많은 묘지의 비석을 지나 익숙한 걸음, 친숙한 향을 들이마시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일정한 발 폭과 일정한 속도.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한 걸음을 소중히 여겼다.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묘지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
난 수행원과 둘에게 더는 따라오지 말 것을 주문했다. 이 정도면 육안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니, 경호에 무리가 따르지 않을 것이다.
“기다리겠습니다.”
빌 게이츠의 목소리에 가볍게 끄덕여 보이고는 멈췄던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코너는 없었다. 오로지 앞만 보고 직진했다.
“음.”
깨끗하다. 오랜 시간 방문하지 않았는데 비석이며 주변이 말끔했다.
바닥에 보이는 꽃. 내가 놓고 간 꽃은 이제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새로운 꽃다발에 하나 놓여 있었다.
“뭐지?”
혼자가 아니었나? 올리버 스미스의 기억을 뒤져봤지만, 가족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경쟁자 워런 버핏만이 공간을 차지했다.
“음.”
꽃다발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떤 힌트라도 있을지 싶어, 자세를 낮춰 주변을 살폈다. 최소 어떤 인물의 이름이라도 적혀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없는데?”
알 수가 없다. 대체 누구일까?
나와 같은 사람일까?
저벅.
음? 발소리.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던 시간, 내게로 한 여성이 다가왔다.
“혹 얼마 전 이곳을 방문하신 분인가요? 장미꽃을 든!?”
뭐지? 혹시 이곳을 관리해 준 사람인가?
“네, 맞습니다만. 누구?”
“아, 다행이네요.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분이 이걸 맡기고 갔습니다. 장미꽃을 가지고 왔던 사람에게 이걸 건네주라 하더군요.”
“네?”
뭐지. 뭘까?
수녀로 보이는 여성은 품속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내게 전달했다. 그것을 받아 들었는데, 꽤 두툼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죠?”
“40대로 보이는 남성이었어요. 이름은 밝히지 않았고, 이것만 건네주면 된다고 했어요.”
“음… 감사합니다.”
“전달했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
어떤 목적도 없었다는 듯,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그녀를 한참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내려 봉투를 바라봤다.
“아무 일 아니니, 자리를 지키세요.”
멀리서 사람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져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들을 다시 뒤로 물리고 편지를 찢었다. 찌이익 길게 뜯어진 봉투 안을 확인했다.
“편지 한 장에… 1만 달러?!”
봉투 안에는 놀랍게도 편지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는 놀랄 정도의 거금이 들어가 있었다. 무려 1만 달러.
지금의 내게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이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무시할 돈은 아니었다.
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돈을 편지봉투에 넣어 두었을까?
“답은 편지 안에 있겠지.”
손을 급하게 놀려 편지지를 펼쳤다.
“이 글씨체는…”
아주 친숙하고 그리운 글씨체였다. 내가 아닌 올리버 스미스의 기억이 반가움, 슬픔으로 젖어갔다.
그리고 난 이 편지를 다 확인하지 않고도 편지의 주인공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워런 버핏 회장…”
-알 수 없는 그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첫 문장에서 가슴을 짜르르 울리게 만들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물이었지만, 글씨체에서 느낄 수 있었다.
따스함. 감사함을.
나는 조용히 편지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지만, 만날 수 없어 예의가 아님에도 이렇게 편지를 남깁니다.
-내게 있어 이 친구는 평생을 함께한 친구이자, 내가 이 자리에 올 수 있도록 만들어준 은인이기도 합니다.
-고아로 태어나 제대로 빛을 보기도 전에 간 내 친구를 위하여 바쁜 걸음 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1만 달러는 그대의 교통비이며, 나를 만나 달라는 약간의 수고비입니다.
교통비에 수고비. 아무래도 금전이 없는 사람임을 감안해 1만 달러를 편지봉투에 넣어 둔 거 같다. 워런 버핏, 그는 정말로 올리버 스미스를 진정한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마음이 따스한 사람이다.
“절 만나고 싶다면, 아래에 적힌 주소로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를 소지하고 있다면 절 만나는 데 작은 수고를 덜 수 있을 겁니다. 워런 버핏 올림.”
그랬나. 그랬던 거였나.
올리버 스미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네요.
이런 멋진 친구도 있고 말입니다.
“그럼 만나는 게 맞겠지. 아무래도 다음에 올 때는 혼자가 아닌 둘이 될 거 같네요. 그때 다시 봐요.”
편지를 잘 접어 지갑에 넣었다. 지폐를 빼 다른 주머니에 넣었다. 이깟 지폐보다 내게 있어 편지가 더 소중했기에, 구겨지지 않도록 잘 갈무리했다.
“이제 가죠.”
올리버 스미스의 무덤과 작별하고 베어링스 은행 미국지부로 향했다. 그곳에 미국 본사가 자리해 있다.
“타깃을 인수할 생각입니다.”
지부에 도착해 꺼낸 첫마디다.
“이야기는 듣기는 했지만, 너무 무모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연계점도 없는 상황에 갑자기 마트라니요.”
빌 게이츠가 우려를 표한다.
“연계점은 있어요.”
“네? 한국기업에 마트가 있었습니까?”
“아니요. 제가 어떤 사업을 시작하고 있지요?”
“사이트를 열고 있지요. 최근엔 인터넷 서점에 이것저것 팔기 시작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엔 라나 대표의 목소리다.
“맞습니다. 전 이를 이용해 한국 일본 중국 등 각 곳에 영업소를 차려 인터넷으로 국가를 가리지 않고 주문 배달할 수 있는 사업을 할 참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월마트를 받아들이고 싶지만, 그건 힘들 거 같아 타깃으로 정했습니다.”
이를 위해 난 각 곳의 이름 높은 사이트들을 대거 받아들이고 있다. 그중에는 협업해 일정 수수료를 내어주고 거래하는 방법도 계획 중이다.
“그곳에서 인텔의 컴퓨터나 부속품도 판매하게 될 거고, 마이크로 소프트 윈도우 프로그램도 판매하게 될 겁니다. 각종 가전 식료품 등도 당연히 거래가 될 겁니다. 우리나라는 배달의 문화가 잘 발달 돼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다면 더 발전하겠지요. 이걸 미국을 포함한 전국에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상당한 기업이 탄생하게 될 겁니다. 어쩌면 마이크로 소프트보다 더욱 가치 있는 기업이 될 겁니다.”
믿지 못하는 얼굴.
그들은 모를 것이다. 미래로 가면 마이크로 소프트는 뒤로 처지게 되리란 사실을.
“이를 위해 전 한 곳도 추가로 인수할 예정이지요.”
내 진한 미소에 두 사람은 몸을 흠칫 떨었다. 나는 둘을 장난스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곳은…”
***
“더는 우리도 안 되겠습니다. 우리의 투자는 여기서 끝내지요.”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마존은 이대로 죽지 않습니다. 보시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의 반응과 높은 성장률을요!”
“네, 잘 봤지요. 마이너스 성장을 말입니다. 아마존의 수익률을 더 올리지 않는다면 더는 힘듭니다. 5%까지 올리세요.”
이곳은 아마존 닷컴 대표실. 적자경영을 하고 있었지만, 긍정적인 시장의 반응으로 투자금을 끌어모아 유지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점유율이 늘어나면 모를 일이지만, 경쟁사인 네트워크 마켓의 자금력에 의하여 성장이 멈췄다.
단순히 멈췄으면 다행이지만, 탈퇴하는 회원들이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점유율은 줄어들고 부채는 늘고 있는 상황.
“그 소리는 우리보고 망하라는 소리나 다름없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있는 거 전부 팔고 운영할 정도만 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 1% 마진이 말이 된다 생각합니까? 이게 안 된다면 투자금을 회수하는 방법 외에 나도 별수 없습니다.”
KJ그룹이 인수와 합병으로 덩치를 키우려는 계획을 가질 때, 아마존은 위기에 봉착했다.
이대로 망하면 제프 베조스는 빚더미를 떠안고 회사를 접어야 하였다.
투자자와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니,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상황에 아마존의 운영에도 큰 타격을 받았다.
“1.2% 올리겠습니다. 이 이상 올린다면, 네트워크 마켓에 밀려 시장을 더 뺏기게 될 겁니다.”
사업을 접는 건 무조건 막아야 하였기에 자신이 생각하기에 맥스치를 제시했다.
“휴, 좋습니다. 그럼 우리 지분을 더 올려야 할 거 같소. 이게 안 되면 우리도 더는 양보 못 하오.”
투자자들의 눈이 시뻘게져 제프 베조스를 노려봤다. 이것도 이들로서는 많이 양보했다 할 수 있었다.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느냐? 없느냐? 가 여기에 달려 있는 까닭이다.
조금 위험할 수 있지만, 지분이라도 올려 미래수익을 더 높일 심산이었다.
“정말 이러셔야 하겠습니까?”
“당연하지요. 이 회사는 우리의 돈으로 유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프 베조스는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분을 양보한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방법이었다.
누가 있어 지분을 나누는 걸 좋아하겠나?
특히, 제프 베조스는 정도가 남들보다 더욱 심했다.
“1년만 내게 기회를 주시면… 꼭 결과를 내겠습니다. 그러니 1년만…”
“안 됩니다.”
“우리가 봉으로 보이십니까?”
이 개새끼들!
당장 튀어 나갈 듯한 욕설을 가까스로 부여잡은 제프 베조스는 이내 결심한 눈빛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지분을 늘려드리겠습니다. 대신 3년간 이 문제로 더는 묻지 말아주셨음 합니다. 이걸 받아들인다면, 투자자님들의 지분을 늘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회사가 망하는 것보다, 이렇게라도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기업을 살리는 걸 최우선으로 여겨야 하였다.
“좋습니다. 그러지요.”
“그때까지는 어떤 의견도 없을 겁니다.”
준비된 종이 위에 서로의 도장을 찍었다.
‘내가 살 길은 나스닥에 상장하는 일뿐이야.’
그리고 새로이 목표를 세우고, 아마존이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