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조찬모임
정치의 중심지가 청와대라면, 경제의 중심지는 어디일까?
초창기 10대 그룹으로 이뤄지던 조찬모임, 하나 그것이 발전돼 일반인들은 모르는 부의 권력 중심 1번지가 된 이곳!
조찬모임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 사람은 다 아는 해당 모임은 한국의 경제 판도를 바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 초대장이 그런 곳이다 이거죠?”
손에 들린 초대장을 여기저기 살폈다. 금색 테두리, 금박 종이. 종이에도 상당한 사치란. 그들의 부와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듯싶었다.
이호영 실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하나, 그것도 이제 옛말입니다. 회장님이 대한민국의 경제 그 자체이십니다. 그들이 뭉쳐봐야 회장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이호영 비서실장의 충성도가 또다시 상승한 건지, 이빨의 힘이 더욱 강력해졌다.
“제가 주의 깊게 볼 사람은 있나요?”
“없습니다.”
“… 기준을 낮춰서 묻는 겁니다.”
“음, 그렇다면 역시 육성과 미래 정도입니다. 그 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기업도 나오나 했는데, 역시 육성과 미래 정도가 다다.
“참여 의사 전달하세요. 궁금한데, 바람 쐴 겸 가보도록 하죠.”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한번 참여해 보기로 했다.
얼마나 대단한 모임인지 눈으로 한번 보자.
미국 일정을 이틀 남겨둔 이른 아침.
호텔로 고급승용차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사람들은 저마다 인사를 나누며 경호 인력에 둘러싸인 채 안으로 들어섰다.
끝으로 들어선 차는.
“나 저 차 처음 봐.”
“와, 저거 아무나 못 탄다 들은 거 같은데. 누가 탔지?”
국내에 유일하게 한 대 입고가 됐다 알려진 차량.
롤스로이스가 웅장한 사각 자태를 뽐내며 천천히 들어섰다.
뒤로는 무수한 검은색 외제 세단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세워졌다.
“김정수 회장이다! 어서 모셔!”
차량에서 내리는 남자를 발견한 직원은 황급히 달려 차량에서 내리는 사람을 맞았다.
그의 고개가 확 숙여졌다.
“이리로 모시겠습니다.”
빨간색으로 도배된 길을 따라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앞에 펼쳐질 세상을 기대하며.
***
“KJ 김정수 회장이 막 엘리베이터에 탑승했습니다.”
직원이 다가와 가장 안쪽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 중년인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주인공이 도착했다는군.”
그의 이름은 육성전자 이건호 회장.
작은 키에서 나오는 포스가 연회장을 압도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주변에 자리한 사람들도 다 함께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띵! 드르륵.
동시에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그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곧 주변은 검은 정장으로 덧칠한 사람들이 복도를 꽉 채웠다.
“초대에 응해줘 감사합니다. 초면이죠. 이건호라 합니다.”
육성그룹 회장 이건호.
“정진규요.”
미래그룹 정진규가 먼저 나서서 소개를 하였다.
“김정수입니다.”
주름으로 거칠어진 손을 맞잡았다. 전부와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다. 눈앞에 몇몇만 인사를 나누고 홀로 들어갔다.
“우리 자리는 저기입니다.”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지, 그도 아니면 주목을 받기 싫은 건지. 훤히 뚫린 자리가 아닌 어둡고 침침한 구석 자리를 가리켰다.
“김 회장님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어 저 자리를 택했습니다. 불편하시다면 다른 자리를 고르셔도 됩니다.”
“구석으로 가죠. 저도 관심받는 건 즐기기 않으니.”
여기까지 와 늙은이들의 관심을 받는 건 사양이다. 20대 청춘을 20대와 보내지 못하고 5, 60대와 보내는 것도 고역이라면 고역이다.
어쩌면 저주일지도.
이런저런 생각을 가지며 사람들의 관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비교적 시선에서 자유로운 구석 자리로 이동했다.
확실히 시선이 줄어듦이 느껴졌다.
“김 회장님의 업적은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하더군요. 그 짧은 시간에 성공한 비결이 참으로 궁금합니다. 노하우라도 있습니까?”
아까부터 이건호 회장이 진한 호감을 보낸다. 정진규 회장은 느끼한 시선으로 응시했고.
노인들의 사랑은 사양이다.
“노하우가 뭐 있겠습니까? 다 운이지. 운만큼 좋은 노하우도 없을 겁니다.”
내 인생은 모든 것이 운으로 작용했다. 운이 없었다면 난 다시 일어날 수 없었고, 이런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거다.
난 이들에게 내 솔직한 생각을 전했다.
“운이라. 회장님은 실력이 아닌 운으로만 이 자리에 왔다 생각하십니까?”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진규 회장이 나섰다.
내 이야기 꽤 불편하게 들렸나 보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결코 좋은 표정이라 볼 수 없었다.
“그렇죠. 제 실력은 1에 지나지 않습니다. 99%가 순전히 제 운에서 나온 거라 보심 됩니다. 회장님들은 전부 순수 실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보십니까?”
기분 좋게 온 자리. 망치고 싶지 않다.
난 그에게 역으로 물었다.
“실력입니다. 99% 실력과 1%의 운이 작용했다 보는 게 좋을 거 같군요.”
99%의 실력이라.
이 사람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하게 평가한다.
“대단하네요. 참 부럽습니다. 이 회장님은 어떻습니까?”
그의 생각은 어떨까?
“난해한 질문이군요. 이거 괜한 주제를 꺼냈다, 난처하게 됐습니다. 허허.”
말을 돌리려 하는 게 눈으로 보인다. 육성의 여우라 불리는 인물. 내 존재만 아니었다면, 미래에 상당한 빛을 타고났을 인물.
전생이었다면 그의 영향력은 국내 최고라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로 인하여.
이걸 보자면 실력보다는 운의 크기가 더 크다는 걸 의미했다.
‘반도체도 이건호 회장이 개발한 게 아니라, 수많은 연구원들이 힘을 합쳐 이뤄낸 업적이잖아. 그걸 이건호가 숟가락을 얹은 거고.’
세상 사람들은 이건호 회장이 반도체를 만들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이건호 회장은 돈을 댔을 뿐이지 직접 만든 게 아니다. 만약 반도체 연구개발이 죽 쑤었다면 육성은 빚에 허덕여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걸 보면 사업가에게 운이란 매우 중요했다.
‘가족들이 멍청하고 혼자 명석한 것도 운이라면 운이다.’
“부담 없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다 말했는데. 이 회장님만 넘기면 재미없지 않겠습니까?”
내 눈은 정확히 이건호 회장의 두 눈동자에 박혔다.
나도 말했는데, 어디서 빠지려고.
“전 5대5겠군요. 전 솔직히 운이 따랐다 생각합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인물이라 다행이다.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대한민국 0.1%의 조찬모임이라 해서 뭐 대단한 건 없었네요. 여느 집에서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다르다면 돈이 더 나간다 정도겠네요.”
정말 뭐 대단한 거라도 있는 줄 알았다. 이호영 비서실장이 그런 말들을 늘어놓으니, 자극적인 호기심까지 생겨버리고.
그래서 왔는데, 그냥 일찍 일어나서 밥 먹고 서로 간 탐색하는 자리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자리인 셈이다.
집에 가고 싶다.
나는 둘이 대화하라 놔두고 배고픈 배를 달래고자 조찬으로 나온 음식들로 시선을 돌렸다. 영양가 없는 대화에 굳이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는 없다 봤다.
우적우적. 우걱우걱.
“……”
“……”
둘의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먹는 데 개도 안 건드린다. 밥 먹는데 대화하는 건 사양이다.
20분 정도 지났을 무렵.
휴, 살겠다.
“육성호텔 요리 솜씨가 뛰어나네요. 잘 먹었습니다.”
불필요한 시간을 줄이는 데 성공했다. 호텔의 식사는 맛있었고, 배 안으로 더는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든든히 먹었다.
“최고의 요리사를 섭외해 운영 중이지요. 식사도 끝낸 거 같으니, 본 대화로 넘어갔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배를 두들기며 자리에서 슬슬 일어나려 할 때, 이건호 회장이 입술을 떼며 동작을 멈추게 하였다.
다른 곳으로 흐르던 정신이 그에게 향했다.
“조찬모임이 어떤 이유로 만들어진 줄 아십니까?”
분위기가 달라졌다. 다소 가볍고 불필요하던 시간이 정지되고, 계산기를 시간 단위로 맞추는 움직임으로 변했다.
“설명 바라지요.”
“독특한 사람이군요. 우리의 모임은 제 아버지 때 만들어져 한국경제를 이끄는 모임으로 발전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도우며 기업을 이끄는 데 방향을 맞추기 시작했지요. 경쟁은 하되 윈윈할 수 있는 관계. 그것이 이 조찬모임에 주된 목적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경영권이나 승계, 필요 없는 계열사들을 정리하는 뭐 그런 것들이 있겠지요.”
그래서 승계 시기에 서로 뛰어들지 않았구나. 지분 밀어주고, 풀린 매물 방치하고.
의심만 하던 사항이 어느 정도 맞춰졌다.
“그 뜻은 제 도움이 필요하다 뭐 그런 걸로 해석하면 될까요?”
“하하. 뭐 그렇긴 합니다. 요즘 회장님께서 반도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걸 알고 있습니다. 그 반도체 말입니다. 우리 육성에 맡기시고 전자기기만 만들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리해준다면 KJ에 한하여 단가를 대폭 낮춰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TSMC 인수 건에 관련된 내용이 외부로 흘러나간 모양이다. 협력만 하고 인수는 하지 않기로 했는데. 표정을 보니 긴장하는 모습이 육안으로 고스란히 잡혔다.
“하하. 그런다면 육성전자 사업부를 우리에게 넘기는 겁니까? 그럼, 육성전자를 1차 협력사로 받아들여 할인된 가격에 모시죠.”
어디서 수작을.
내가 아무리 국내 시장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지만, 호구가 될 생각은 없다. 기부와 호구는 엄연히 다르다. 이들에게 1억이 없어진다고 인생이 어떻게 변하지 않는다. 반면 일반인들에게 1억은 쉽게 넘볼 수 없는 막대한 돈이다.
평생을 바쳐도 1억을 모으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 사람들을 위해 돈을 쓸지언정, 대기업의 호구는 사양.
“농담이 짓궂습니다. 허허.”
내 말이 농담처럼 들렸나?
이 어이없는 양반 보게.
“진심입니다. 내가 얻을 것도 없는 걸 해서 뭐 하겠습니까? 제가 이 어이없는 제안을 받을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그랬다면 단단히 잘못 알고 계신 거 같은데, 말입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KJ가 반도체를 접는다면, 전자를 주세요. 그래야 서로 조건이 맞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한계를 느끼게 한다. 어디서 남의 사업에 감 놔라 배 놔라 배짱을 부리는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설사 이런 조건을 내게 들이댈 것이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걸 내게 줘야 할 터.
한데 한다는 말이…
그런데 LCD 정보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반도체보다 그 부분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데.
그러고 보니 미래그룹 정진규 회장은 왜 또 저리 표정이 좋지 않은지. 저 사람도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습인데, 참고 있다.
“아무래도 제가 어울리지 않은 자리에 참석한 거 같네요. 이런 유형의 모임은 전 바라지 않습니다. KJ와 협력을 하고 싶다면, 앞으로 비서실로 연락 바랍니다. 이만.”
“기, 김 회장!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내 참을성은 딱 여기까지.
더는 이들과 마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돌아섰다.
“이 실장님, 밖에 차 대기하라 하세요. 지금 갑니다.”
“알겠습니다.”
뒤에서 날 선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홀을 나섰다. 더는 저들과 좋은 관계로 나가기 힘들 성싶다.
“이 실장님. 미국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미래그룹이 내게 원하는 게 뭔지 알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