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개발 그리고 개발
“자동차 디자인들이 별로야. 이건 과거의 차를 분장시킨 꼴밖에 안 돼.”
로고가 정해졌으니, 디자인으로 넘어갔다.
한데,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게 과거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갇힌 모습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전부 내가 알던 차들이야. 망한 차들.”
그 와중에 기억에 있는 차도 있었다. 눈에 차지 않았다.
“내가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인가? 그것도 아니면,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시장은 기연 자동차를 원하지 않는다. 나도 기연 자동차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연 자동차는 이 세상에 없다.
KJ자동차가 있을 뿐.
“이대로면 디자이너들을 전부 해고하고 새로이 뽑을 수밖에 없어.”
기존에 있는 사람들은 구시대 디자인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 했다. 조금만 더 생각을 비틀면 될 거라 보이는데, 그게 쉽지 않은가 보다.
생각대로 모두를 해고하자니, 그건 또 내키지 않는다. 일 못 한다고 무조건 해고하면 변화는 있어도 발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역시 피터슈라이어를 영입하는 수밖에 없겠어. 그 외 사람들도.”
머릿속에 꽂힌 인물. 기연자동차를 디자인 하나로 살린 인물.
아우디 디자인을 맡고 지금은 폭스바켄에서 디자이너를 일하고 있는 인물.
골프4세대를 탄생시킨 인물이 바로 그다.
“민희 씨.”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미래자동차에는 미안하게 됐다. 그들로 인해 미래자동차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한국의 대표 자동차사로 발전하게 되는데.
내가 중간에 가로채니, 역사는 바뀌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오케이 한다는 조건이지만.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미래자동차가 성공했는데, 내가 못 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돈이면 안 되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부르셨습니까.”
남민희 대리가 들어왔다.
“이 사람들 조사해서 내게 올리세요.”
-폭스바겐 피터 슈라이어
-루크 동커볼케
-피에르 르클레어
-필리포 페라니
-카림 하비브
-서주호
- ...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인물들을 나열해, 남민희 대리에게 주었다.
“이번 주 내로 부탁해요. 그리고 앞으로 KJ자동차 로고는 이걸로 사용한다 통보하세요. 이걸 그려낸 직원에게 포상으로 2천만 원 지급하시고, 승진명단에 올리세요.”
어떤 직원인지는 모른다. 신입인지 대리인지 과장인지.
하지만, 그런 건 따지지 않기로 했다. KJ자동차가 평생 가져갈 로고를 개발한 점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한 점을 높이 샀다.
KJ자동차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 생각했기에 확실히 밀어주고자 했다.
“네.”
남민희는 건넨 종이를 받아들고 회장실을 벗어났다.
일단 당장 중요한 일들은 처리했다. 이제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정리해 개발할 일만 남았다.
***
-부서: 디자이너
-성명: 이주호
-포상금: 2천만 원.
-특진: 사원 -> 대리
“말도 안 돼요!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4년, 5년 일한 사람도 아직 대리를 달지 못한 사람도 있는데, 입사 1년도 안 된 이주호 사원이 대리라니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회사를 가더라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몇몇 이들이 올라와 이번 인사조치에 반기를 들었다.
“포상금 2천만 원이면 됐지.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요?! 생각을 해 보세요. 이제 회사에 적응한 친구를 대리로 앉힌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지.”
현 자동차 직급 체계는 사원(5급) 사원(4급)으로 나뉘어 있다. 그 위가 대리다.
그런데 5급 사원에 지나지 않는 사람을 바로 대리로 승격시켜 버렸다.
이제 간신히 자리를 잡아가는 사람을 대리에 앉힌다고?
“위에서 내려온 걸 왜 여기서 따져. 따지려면 위에다 따져. 난 모르는 일이니까.”
직원들의 거센 반발에 팀장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어떤 누구도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 대리 다는 데 얼마나 걸린 줄 아세요? 아직 배울 게 많은 사람을 대리로 앉힌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요. 나이도 제가 훨씬 위인데 연봉마저 같아요.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맞습니다. 이러면 직급체계가 흔들리고, 회사에 자리한 시스템이 붕괴될 수 있어요.”
너도나도 이번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 사람들이 진짜. 이걸 내가 정했어? 왜 다들 내게 와서 이 난리야!”
결국 팀장도 참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한두 번은 받아줄 수 있다.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딱 여기까지. 분명히 그만하라 지시를 내렸는데, 멈추지 않는다면 그건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팀장님!”
“휴, 내 이 말까지 하지 않으려 했는데. 위에서 뭐라는 줄 알아?”
유야무야 넘기려던 문제가 해결될 거 같지 않자, 끝까지 숨기려던 지시사항 중 일부를 공개하기로 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고 반발하는 직원들이 있다면 사직서 제출하라더군. 어차피 위에 디자인 그려낸 것도 전부 반려 당하고 할 일도 없으니, 그만둘 사람은 이번 주까지 사직서 제출해.”
“......”
“......”
그 말이 나온 순간, 이들은 입을 닫았다.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들 알아들은 거 같으니, 이만 가봐.”
팀장은 손짓을 하며 재차 축객령을 내렸다.
자리에 모여 있던 이들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 대리, 좋겠네. 포상도 빵빵하게 받고, 동기들보다 몇 년 일찍 대리도 달고.”
“그러게. 이제 대리도 달았으니, 혼자 일할 수 있겠네. 나한테 보고서 올리지 말고 바로 과장님한테 올려. 대리가 대리한테 결재받는 것도 웃기잖아. 안 그래?”
“..... 가암사합니다.”
선배들의 축하 말이 오갔지만, 이건 누가 보더라도 축하 말이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멸, 시샘 등의 부정적 감정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이건 세 살배기 아이들도 느낄 수 있는 그런 류였다.
‘일이 왜 이리 꼬인 거야.’
로고개발을 할 때만 해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사라졌다.
“포상금도 많이 받았는데, 제가 한턱...”
“나 보고 후배가 내는 걸 먹으라고? 아. 이제 대리지. 아니야. 난 생각 없네. 지수 씨 우리 오늘 한잔할까? 내가 살게.”
“......”
이건 명백한 거절이었다.
이주호는 입술을 깨물고는 시선을 돌려 컴퓨터 화면으로 가져갔다.
‘하아... 내가 그만둬야 하나. 포상금 반납하고...’
이번 일로 원치 않게 직장 내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
이주호 대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화면에 고정했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곳에는 위에 보고하지 않은 자동차 초안이 있었다.
***
“음, 이건 이렇게 배치하고, 저건 이렇게...”
LCD 광학필름 설비에 대한 구상을 끝내고 설계에 들어갔다.
간단한 레이아웃을 시작으로 설비구상, 공정 프리즘시트 등을 컴퓨터에 기록하고 도면을 출력해 육안으로 꼼꼼히 살폈다.
이 짓이 장장 7일이 걸렸다.
그럼에도 부족한 부분이 수시로 눈에 들어와, 머리에 두통을 선사했다.
“휴, 이거 생각보다 엄청 어렵네. 일단 설비를 제작하고 제품을 생산해 봐야 좀 가닥이 잡히겠어.”
설계는 100% 끝냈다 생각은 하지만, 직접 설비를 제작해 제품을 직접 생산해 테스트를 해봐야 알 거 같았다.
이론은 확실하게 정리됐으니, 이제 실전만이 남았다.
“이런 것들이 완벽해지면, 재귀반사필름 제작도 가능하고, 스마트폰이란 곳에도 활용할 수 있게 될 거야.”
광학필름이란 제품은 미래산업의 핵심 부품으로 떠올라 KJ의 가치를 한껏 끌어올려 줄 것이다.
이는 핸드폰 시장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리라.
“핸드폰 시장은 모토롤라를 인수해 시작하면 되겠지.”
광학필름 하나로 정말 많은 사업군을 생각하게 된다. 머리가 비상해지니, 생각나는 건 참 많다.
이러다 이 세상 기술을 KJ가 다 갖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회장님, 연구진과 개발자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물류통합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시간을 가지고 시스템을 만들어 가면 될 걸로 보입니다.”
이호영 비서실장이 들어와 보고하는 소리다.
하던 일을 멈추고 이호영 비서실장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타이밍이 좋네요. 내일 바로 강당으로 모두 집결시키세요. 포털사이트 개발자는 오전으로 잡고 LCD개발자는 2시로 잡으세요.”
연구소는 대충 마련했다. 인터넷은 KJ빌딩 빈 공간을 활용하기로 했고, LCD개발은 인수한 공장 중 인력감축으로 비게 된 공장 일부를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한데 회장님. 자동차에 좀 문제가 생긴 거 같습니다. 이상한 소문이 들려옵니다.”
“이상한 소문요?”
이제 좀 쉬어야지 하고 있었는데, 비서실장이 이상한 소리를 해댄다.
자투리 시간에 달콤한 잠에 취하려 하였는데, 아무래도 그건 미뤄둬야 할 거 같다.
예감이 말해 준다. 절대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고.
“그렇습니다. 요전에 회장님께서 내린 자동차 인사조치가 있지 않았습니까?”
“음, 그렇죠. 그런데요?”
“그게 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로고를 그린 사람이 입사 1년 차인데, 막대한 포상금과 대리로 특진해 집단 따돌림을 받고 있다 합니다.”
“...?!”
이건 또 뭔 소리래?
내가 내린 조치로 한 사람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그게 정말입니까?”
“네, 각 계열사마다 비서실 사람을 심어둔 상태입니다.”
이거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다. 내가 내린 결정을 직원들이 반발하고 일어섰다 생각하니 기도 차고, 어이도 없고, 없던 화가 일었다.
“아무래도 자동차사에 방문을 해야겠네요. 차 준비하세요.”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적은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이다.
그들의 행동 하나로 잘 나가던 회사가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지 움직이면서 생각했다. 자극제가 되어 더 열심히 하라고 내린 조치가,
***
“이 대리, 대리를 달았는데, 보고서가 이게 뭐야. 사원도 아니고. 자네 동기가 이것보단 낫겠어. 이걸 보고서라고 내게 올린 거야?”
KJ자동차 디자이너실.
최근 사원에서 대리로 진급한 이주호 대리는 고된 시간을 보냈다. 사원시절에는 그냥 넘어가던 일이, 지금은 조금만 틀어져도 크게 회자되어 욕을 먹었다.
정확히는 작은 일도 크게 부풀려져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죄송합니다. 수정해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대리뿐만 아니라 과장까지 이주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높은 학력과 괜찮은 커리어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고작 로고 하나가 회장의 눈에 띄어 고속승진을 하였다. 본래 다음 승진은 자신이 아끼는 후배로 채우려 하였는데, 그의 존재 자체가 이제는 너무도 거슬렸다.
부장도 가만히 있고,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그를 회사에서 내쫓는 것뿐.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하게 만들도록 유도했다.
“됐어. 가 봐. 수정한다고 더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이거 차 대리가 손 좀 보고 다시 올려. 그래도 선배인데, 후배가 못하면 선배가 대신 해줘야지.”
“... 아니. 휴. 알겠습니다.”
“잘해봐. 혹시 알아. 차 대리도 운이 좋으면 바로 과장 달지. 난 차장 달고.”
“......”
노골적인 그의 표현에 이주호는 씁쓸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서랍장을 열어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봉투에 ‘사직서’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