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광학필름
“이 약 냄새는 몇 번을 맡아도 적응이 안 돼.”
“하하, 어쩌겠어. 우리가 선택한 길인데.”
익숙하면서도 낯선 두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둘은 무언가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의 체형은 홀쭉이와 퉁퉁이.
표현이 딱 적절하다.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풋.
괜스레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이 지긋지긋한 생활도.”
“그니까, 이제 빚 독촉도 안 받고, 우리도 이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거야.”
둘의 모습이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마치 수능을 모두 치르고 대학에 갈 일만 남은 학생들의 모습과 똑 닮았다.
둘의 나이대는 한 40대 정도? 그런데 하는 모습 어린아이와 크게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이제 시작해 보자고.”
홀쭉이 연구원이 이상하게 생긴 기계 앞에 서서 원단이 돌아가는 걸 유심히 관찰했다. 신호에 맞춰 퉁퉁이 연구원이 점액질로 되어 있는 액체를 커다란 롤러 위에 부었다.
뭘 하고 있는 걸까?
더 가까이서 보려고 하니 시야가 확대됐다.
‘신기하네.’
분명 액체로 보였는데, 빛을 통과하자 원단과 맞물려 굳어서 롤을 빠져나갔다.
그것을 홀쭉이가 등을 이용해 이동하는 원단을 확인하고, 후다닥 달려가 기계를 세웠다.
가위로 찌익 도려내 그걸 빛을 투시했다.
‘아...’
그때 해일처럼 밀려오는 기억이 머릿속을 꼭꼭 채웠다. 이미지로만 기록돼 있던 기억이 세분화되어 해당 기술에 대한 정보를 본래의 내 것인 것처럼 자리잡혀 갔다.
LCD. 광학필름.
추후 얇은 모니터를 만드는 데 필요한 핵심기술이 내 머릿속에 정립됐다.
보호시트, 상하부 프리짐시트, 확산시트, 도광판, 반사시트, 몰드 프레임, 램프, 램프반사시트.
모든 기술이 머릿속에 확 정리되었다.
‘몇 번을 경험해 보지만, 정말 신기하단 말이지. 단순히 타인의 기억을 받을 뿐인데, 수십 년은 연구해야 얻어지는 지식이 단 한순간에 내 게 되어버리니까.’
그제야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들이 이해가 되었다.
2000년대쯤 들어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LCD모니터, TV 기술이 저만큼 진척돼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불이다! 불이야!”
잠시 한눈판 사이에 연구실이 화마에 휩싸였다.
‘아, 안 돼!’
저들을 구하려 손을 뻗으려 했지만,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 이럴 수가...’
불길은 순식간에 둘을 집어삼켰다. 유리창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바르게 사라졌다. 그자를 잡고 싶었지만,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커다란 충격 속에 다시 눈을 감았다.
“... 장님! 회... 님!”
으...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머리가 깨질 거 같다. 귓구멍은 왜 이리 멍멍한지.
누군가의 반복된 음성이 연달아 귀청을 때렸다.
“회장님! 회장님!”
“다행입니다. 갑자기 쓰러지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
눈을 떴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 제가 잠이 들었던가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대화를 하다 갑자기 쓰러져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정말 어떻게 되시는 줄 알았습니다.”
빌 게이츠에 이어 라나까지.
아무래도 그 꿈과 앞전에 발생된 기억이 어떤 관계가 있었나 보다.
처음으로 겪어본 것이기에 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요즘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체력이 허해졌나 봅니다. 그깟 술에 무너지다니. 하하. 정말 창피하네요.”
둘의 이야기들 들으니 모든 상황이 파악됐다. 나는 둘의 말에 민망한 표정을 지으면 볼을 살살 긁었다.
건강상에 문제는 없다. 마침 술도 마셨겠다, 주량 탓을 하며 지금의 상황을 넘기고자 하였다.
“휴, 전에 드신 걸 보면 잘 드신다 했는데, 와인 체질이 아니신가 봅니다. 세 잔도 다 비우지 못하고 훅 가시다니. 앞으로 소주로 준비하겠습니다.”
빌 게이츠가 한시름 낫다는 얼굴로 한국 소주를 언급했다.
첫 만남에서는 나를 죽을 둥 바라보던 빌 게이즈 대표였는데, 사람이 많이 유해졌다.
모든 스트레스를 내가 감당하고 있어서일까? 사업이 잘 풀려서일까? 전과 많은 부분에서 성격이 바뀌었다.
“대표님 걱정도 받고, 저 많이 출세했네요. 그렇지 않아요? 라나 대표님.”
“하하. 많이 바뀌었지요. 조용하던 사람이 말도 많아지고, 이건 비밀이었는데 저랑 둘이 있을 때는 농도 섞습니다.”
“오, 그래요?”
새로운 발견인데? 이거 조금 섭섭해지려 하네. 내게도 좀 보여주지.
“큼, 바뀐 게 아닙니다. 적응했을 뿐입니다.”
“하하,”
역시 변하기는 했다. 저런 말도 할 줄 알고.
예전엔 무뚝뚝하고 무게만 잔뜩 잡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좀 인간미가 느껴진다.
“그 모습 자주 보고 싶네요. 지금 모습 매우 보기 좋아요.”
“......”
이 사람 부끄럼도 탈 줄 안다.
그에 대한 평가가 확 달라졌다.
“전 내일 한국으로 넘어갈 겁니다.”
한국으로 넘어가 확인해 볼 일이 생겼다. 이곳에서 무언가를 하기에 많은 부분이 걸렸다.
생각해 볼 것도 많고.
“벌써 가십니까? 컨디션도 좋지 않으신데, 이곳에서 쉬시다 가시지요. 건물 하나 내어드리겠습니다.”
빌 게이츠 대표의 진심이 느껴진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 결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한국에서 추가적인 사업도 생겼고. 다음에 방문하면 그때 푹 쉬다 가겠습니다.”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빌려주는 박력. 나도 손님용 건물을 지어야겠다.
영화관과 수영장, 도서관만 생각했지 손님방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저, 회장님. 이참에 전용기 하나 마련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회장님께서 재가해 주시면 저희가 알아보고 한국으로 보내겠습니다.”
음, 이거 좋은 생각인데.
비행기 하나 산다고, 잔고가 비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있어 보여.’
“좋아요. 그건 라나 대표님께 맡기죠. 더 나눌 대화가 없다면, 전 이만 잠자리에 들어야겠네요. 내일 일찍 출발하려면.”
“알겠습니다. 가장 좋은 비행기로 마련하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두 사람이 나가자 방 안은 조용하게 변했다.
잠시 심호흡을 한 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에 빠졌다.
“그건 절대 사고가 아니야. 계획된 범행이야. 대체 누가 둘을 죽였을까? 왜? 무슨 이유에서.”
기억 속의 두 사람은 사고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난 보고 말았다. 창문 너머로 급하게 사라지는 남자를.
“이것도 조사해 보자.”
차차 조사해 보기로 하였다. 나와 기억을 공유하게 된 두 천재의 억울한 죽음.
이 또한 내가 풀 숙제라 생각했다.
“음 그러고 보니...”
올리버 스미스 묘에 들러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것도 좀 뒤로 미뤄야겠다.
“스미스, 미안해요. 한국에 넘어가면 할 일이 너무 많네요. 그 일이 끝나면. 그때 갈게요.”
장칠성과 그레이 헤먼드. 두 사람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기에, 두 사람에겐 마음속으로 감사함을 표할 뿐이다.
두두두—
새벽녘, 헬리콥터 프로펠러가 거세게 돌기 시작했다. 주변으로 모래바람을 튀겨내며 기체가 서서히 떠올랐다.
아래로 빌 게이츠와 라나가 고개를 숙이며 배웅했다.
***
“가셨던 일은 잘 해결됐습니까?”
하루의 반을 날아 귀국한 한국. 나는 시차 적응을 위해 하루를 내리 쉬고 이튿날 회사로 출근했다.
어질어질한 정신을 이끌고 도착하니, 이호영 실장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여차저차 잘 해결됐네요. 자동차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그를 보자마자 업무에 대한 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으로 넘어가기 전 지시한 일들에 대해 물었다.
조금 미안한 감이 든다.
“자동차 초안이 완성됐습니다. 그리고 로고도 새로이 뽑아 봤습니다. 이 중에 골라주시면 됩니다.”
내가 물을 걸 알았는지, 결재판을 바로 내밀었다. 결재판이 무척 두툼하다.
“센스 있네요.”
“늘 장착해 다녀야 회장님께 좋은 점수를 받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렇네요. 추후 인사고과에 반영하지요.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이 정도로 고생하는데, 괜찮은 자리로 보내는 것도 괜찮으리라 봤다. 그가 다른 곳으로 가야 밑의 직원이 위로 치고 올라오는 순환적 진급체계가 완성될 테니.
너무 고인 물이 되는 것도 좋지 않다.
“그래요. 그럼 이것도 빠르게 처리해 주세요. 디스플레이 업종으로 LCD 관련 연구진들을 최대한 많이 모아주세요.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 개발자와 전산 개발자를 뽑으시고, 우리가 들고 있는 물류회사를 빠르게 통합시키세요. 전 이 물류회사를 일본 중국 미국 유럽 등지에 지점을 설립해 운영할 겁니다. 끝으로 자동화기술팀도 확보하세요.”
머릿속으로 생각나는 사업군들이 너무도 많다. 나는 이 사업의 본사를 한국에 배치할 참이다.
지금도 일자리가 없다고 사람들은 난리들이다. 미래에는 인구수가 늘어나는 만큼 그 증상은 더욱 심해질 터다.
그래서 나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사업군들 대부분을 한국에 본사를 둘 참이다.
인텔의 컴퓨터 생산시설 일부도 한국에 차렸다.
덕분에 육성, 엔지와 경쟁 관계가 되었다.
“언제까지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6월까지 해주세요. 올해 내에는 사업을 시작할 거니까요.”
시간이 없다. 미래기술들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개발해 특허등록 후 빠르게 시장에 진입할 생각이다.
모든 사업군에 내가 참여를 하여야 하기에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1차 목표 양산율은 50%. 이 정도만 하더라도 세계시장은 KJ가 따 놓은 당상이다.
“그럼, 나도 시작해 보자.”
비서실장이 나가고, 책상 위를 채우고 있는 결재서류를 옆으로 싹 밀어버리고 결재판을 펼쳤다.
자동차 초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잠시 뒤로 미루고, 로고를 보자.”
로고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건 기업들에 있어서 아주 큰 착각.
정장을 입을 때 넥타이나 허리띠가 포인트로 자리하듯, 자동차 디자인에 있어서 로고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건 자동차 전체일지 모르겠지만, 로고가 옥에 티가 될 수 있었다.
“기연 자동차 로고 진짜 별로였지.”
암만 좋은 차를 만들면 뭐 하나?
로고 하나로 자동차의 가치나 이미지가 확 죽어버린다.
“음.”
먼저 눈에 들어온 로고는 궁서체로 만든 ‘KJ’였다.
“이건 패스. 굳이 KJ그룹을 홍보한답시고 만드는 틀에 박힌 건 빼자.”
기업들의 크나큰 실수. 틀에 박힌 생각이다. 육성이라고 해서 ‘Y’를 쓴다거나, 기연이라 해서 ‘K’로 시작하는 이니셜을 집어넣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가장 위험한 게 인식이었고, 생각의 늪에 걸린 틀이었다.
난 이 모든 걸 벗기고, 새로운 것을 찾고자 했다.
“대부분이 이니셜 모음집이네.”
대부분이 ‘KJ’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O’ 가 있고 없고 차이가 대부분이었다.
굳이 뭔가 안에 ‘KJ’를 넣으려 애를 쓴 티가 난다.
“아무래도 인식 교육이 필요하겠어. 이래서는 다른 회사에 크게 다를 게 없지. 어? 이건.”
직원들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생각에 큰 실망을 하고 있을 때, 눈길을 확 끄는 로고가 있었다.
내 눈은 순간 해당 로고에 확 잡혔다.
‘ΞΞ’
위로 긴 선이 빨간색.
아래로 긴 선이 파란색.
중간은 검은색.
이건 마치 태극기를 연상시켰다.
많은 뜻이 담겨 있을 법한 로고.
그런 생각이 뇌리 속을 꽉 채우는 순간.
“그래, 이거야. 이걸로 정했어.’
KJ자동차의 로고를 정할 수 있었다. 총 백여 장에서 진주를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