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제일염색
끼이익—
제일염색 앞, 출입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섰다.
주차 마크가 표기된 장소에 차를 세워 두고 차량에서 내려섰다.
“미래원단? 처음 들어보는 곳인데? 어떻게 오셨어요?”
정현우 대리.
아직도 그가 대리인지 모를 일이지만, 꽤 반가운 얼굴이다.
“아, 원단 중에 불량원단을 시중에 파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불량원단을 싸게 구입할 수 있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하하.”
“불량원단요?”
“네. 원단은 따지지 않습니다. 자투리나 주는 대로 다 가져가겠습니다.”
옷을 작업복으로 입어서 그런지 날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다.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나는 조금 더 자신감 있게 다가섰다.
주머니에 꾸깃꾸깃 넣어둔, 녹색 지폐 여러 장이 담긴 봉투를 정현우 대리에게 넘겼다. 주변에 보는 사람이 있나 없나, 살피는 건 잊지 않았다.
관례 아닌 관례.
거래를 보다 수월하게 이끌기 위한 뇌물이었다.
“뭐 이런 걸 다. 원단은 안 따지신다고요?”
두툼한 맛을 느껴 좋았는지, 얼굴색이 대번에 바뀐다.
“네.”
“양은요?”
“2주에 한 번 꼴로 1톤에 다 실을 수 있을 정도면 됩니다.”
본래는 인기색상을 중점으로 구해 시장에 내놓았지만, 사업이 우선순위는 아니기에 그런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결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유, 당연히 현금결제죠. 바로 지불하고 떠나겠습니다.”
기업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악성재고 털고 현금으로 결제하고.
“기다리세요. 위에 보고를 좀 해야 해서.”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외모도 나쁘지 않고, 꽤 성실한 사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걸 바라보다, 시선을 위로 옮겨 한 지점에 고정했다.
“저기서 일하고 있겠지.”
아내가 하던 일은 염색이 완료된 원단을 눈으로 검사하는 일로 양품을 포장실로 보내는 마무리 공정을 맡았다.
“승인됐네요. 곧 꺼내 올게요.”
건물로 들어갔던 정현우 대리가 나와 큰 목소리로 외치고는 창고로 향했다. 저것도 꽤나 익숙한 장소다.
친해졌을 때, 나도 함께 거들었다.
“천천히 다녀오세요.”
나는 다시 시선을 위로 향했다.
당장 달려가서 얼굴을 보고 싶은 욕심이 막 올라왔다.
“직급이 어떻게 되세요?”
팔레트 위에 올려진 원단을 싣고 지게차를 끌고 오는 정현우 대리가 질문을 던졌다.
슬쩍 수줍게 웃으며 사전에 준비한 명함을 건넸다.
“대표입니다.”
“와, 대단하네요.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그가 놀란 얼굴로 바라본다. 실상 이 나이에 사업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뭘요. 다 대출로 시작한 사업인데요.”
큰 거부감을 없애고자, 약간의 거짓말을 섞었다.
“그래도 그게 쉬운 일인가요?”
“하하. 많이 좀 도와주세요.”
“제가 도울 일이 있나요.”
“좋은 원단을 주면 그게 돕는 거죠.”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팔레트 위에 있던 원단이 데굴데굴 굴러 1톤 트럭 화물칸을 채웠다.
그 잠깐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사라졌다.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타이밍을 재고 있던 난,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에 눈치를 살피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말하세요.”
“회사 구경 좀 시켜 주실 수 있을까요? 현장까지 들어갈 생각은 없고 검사실이나 창고만이라도 좋습니다. 어떤 원단들을 생산하는지 궁금해서요.”
변명이 궁색해진다.
“뭐 그러세요. 딱히 외부인을 막고 있지는 않으니까.”
화물기사들이 오면 종종 창고도 오고 간다.
이유는 실을 원단을 보기 위함이다.
“감사합니다.”
정현우 대리의 배려에 어렵사리 건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정현우 대리는 주변을 돌면서 회사 거래처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드디어!’
그의 설명을 들으며 걸음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여기가 포장실하고 검사실이 있는 곳이에요. 여기서 최종검사하고 포장돼 나가요.”
다 아는 사실이지만, 처음 본 사람처럼 행동하며 연신 감탄사를 난발했다.
이 정도의 리액션만 해줘도 사람의 기분은 업 되어, 많은 말들을 해준다.
“혜영아.”
“……”
이혜영. 드디어 아내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됐다.
오늘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죽기 전 그 모습과 단 한 곳도 달라진 모습은 없었다.
그대로였다.
“오빠, 또 노가리 깔래!”
“야, 노가리라니. 누가 알면 진짜 놀고 있는 줄 알겠다.”
“놀고 있는 거 맞잖아. 빨리 가서 일 안 해!”
그리운 목소리.
내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내디뎌졌다.
하지만, 내 걸음은 그만 멈춰지고 말았다. 시야로 들어오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 모습은 쉬이 상상조차 하기 싫었던, 모습이었다.
“어휴, 진짜. 너 그러다 식장에 가서도 내게 잔소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 잘못하면 해야지.”
“으, 하여간. 알았어. 그만. 아차차. 죄송해요. 완전 잔소리꾼이라. 하하.”
“… 결혼하시나 보네요?”
“하하. 네. 그렇게 됐어요.”
“… 사귄 지 오래되었나 보네요.”
“그렇게 오래는 아닌데, 5개월 정도 됐네요. 비밀연애하다 놓치면 안 되겠다 싶어 결혼하자 고백했죠. 그런 와중에 제 아이도 생겼지 뭡니까. 하하.”
“……”
아…
정보원이 몰랐을 수도 있다.
거기다 아이까지.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가슴이 너무도 아리다. 아내에게 잘못한 걸 사죄하고, 이제 평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자 하였는데.
“축하합니다.”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어냈다.
“이거 초면에 많은 걸 보여주네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말에 씁쓸함을 감추기 급급했다.
정현우 대리의 얼굴에 행복감이 묻어났으나, 난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한 생각을 하면 안 되기에… 지어지지 않는 미소를 억지로 입가에 걸쳤다.
“수고하세요. 좋은 구경이었습니다.”
“네. 안전운전하세요.”
부르릉.
트럭의 떨림이 내 심장을 대변해 준다.
쿵쾅쿵쾅.
이제 과거의 사랑이 되어버린 아내가 일하는 층으로 시선을 주다, 이내 접고 액셀을 밟았다.
회색 연기를 뱉으며 아스팔트를 긁었다.
“행복해. 혜영아.”
우울한 마음을 심장에 품고 동대문으로 향했다.
“KH 회장님이 이런 곳에서 신분을 숨기고 일하고 계실 줄 몰랐네요. 하하.”
보름 정도 지나, 기자가 찾아왔다.
혜영의 소식을 알고 바로 사업을 접고 원래 자리로 돌아갈까 하다, 마음의 정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좀 더 있기로 하던 중 시장을 지나치던 기자에게 걸리고 말았다.
몇 번을 마주친 정현우 대리도 모르는데, 기자의 눈썰미는 속이기 힘들었나 보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간 너무 조용하셔서 뭐 하시나 했더니, 서민들 사이에 껴서 이런 궂은일을 직접 체험하고 계시다니.”
딱히 그의 생각을 정정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정확히는 연애사업을 위한 목적을 두고 설립했다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이곳도 정리할 겁니다. 저 대신 일할 사람도 찾았고 말입니다.”
“이거 기사로 내도 되겠습니까?”
“……”
기사로 내고 싶은 욕심이 두 눈동자에서 느껴진다.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래, 아무렴 어때. 얻어걸린 기회, 회사 이미지 발전에 활용하자.’
이내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맘대로 하세요. 대신 사람이 몰리지 않게, 일주일 뒤 내보내 주세요. 가게 정리가 그쯤 끝나니까.”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덕분에 제가 큰 거 하나 물었습니다.”
기자들의 붙임성이란, 언제 봤다고 저리 친하게 구는지.
나는 손짓을 하며 더는 말할 생각이 없음을 알렸다.
기자는 그런 내 모습에 싱글싱글 웃으며, 사진을 여러 장 찍는가 싶더니, 내 눈짓에 후다닥 모습을 감췄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임시직을 맡고 있는 황보성 과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모든 사실을 말해 주었기에, 짓는 표정이다.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괜찮죠. 오늘 중 여기 싹 정리해야 하니까 서두르세요.”
나는 애써 무시하고 주변을 정리했다. 원단은 폭탄세일 가격표를 붙여 재고소진에 동력을 더했다.
***
-KJ그룹 김정수 회장은 참된 경영인이 아닐 수 없다. 동대문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김정수 회장을 소개하려 한다. 우연히 지나가던 기자는 어디서 많이 본 사람과 조우하게 된다. 원단을 바쁘게 나르며 추운 날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사람은 놀랍게도 세계 그룹, 재벌 1위에 올라선 김정수 회장이었다.
-김정수 회장은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여느 재벌 가문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수백조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그가 천을 팔며 생활하였다. 힘든 일을 하면서도 웃는 그의 미소가 아름답다고 느낀 건 기자의 착각만은 아니라 본다.
-우리나라에 이런 재벌이 나온다면, 더욱 살기 좋은 나라가 되지 않을까? 본인은 생각한다.
“어?! 오빠 이 사람 그 사람 맞지?”
열흘이 지나 해당 기사는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중 제일염색 점심시간을 이용해 신문을 보던 두 남녀는 눈을 부릅떠 기사를 내려보고 있었다.
시선이 굳어 다른 곳으로 이동되지 않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말도 안 돼. 아…”
그 주인공은 정현우와 이혜영이었다.
그러다 정현우는 몹시도 아까운 눈빛을 보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하는 거였는데. 휴… 어쩐지 무지 낯이 익다 싶더라니. 에휴. 그 기회를 놓치다니.”
평생 올까 싶은 기회를 걷어 차버린 자신의 둔한 행동과 눈썰미가 원망스러웠다.
언제 또 그런 재벌을 만나 대화를 해보겠는가?
그나마 다행이란 건 모질게 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말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치?”
“그르게. 쩝. 하마터면 우리 결혼식에 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네.”
“에잇, 그만 생각해. 더 생각해서 뭐해.”
그러길 잠시.
이혜영은 시계를 확인하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네. 어차피 천외천 인물인데. 친해져 봤자지. 그만 일하러 가자.”
“그래. 우리만 행복하면 된 거지.”
이혜영은 정현우의 팔을 꼭 잡고 앞으로 내달렸다. 그녀의 환한 미소는 결코 아쉬워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의 순간을 즐기는 아주 평범하고 행복한 얼굴이었다.
***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회사에 들러 멀리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눈동자에 담았다.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이만, 가죠.”
“네.”
차량을 출발 켰다. 차량은 서서히 움직여 제일염색을 빠져나갔다.
다시 열흘이 지난 시점.
“여성분과 남성분에게 1000만 원씩 보내세요.”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둘의 결혼식이 거행됐다. 난 둘에게 천만 원을 보내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비록 갈 수 없지만, 마음만큼은 둘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지난날의 실수를 용서받기를 바랐다.
1998년 3월.
난 아내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아내와의 추억도 함께.
꽃샘바람이 오늘따라 춥게 느껴졌다.
-TSMC 인수의 건.
-다음과 같이 TSMC 인수를 하고자 하오니 재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시선은 곧 계속 보류해 두었던 TSMC 인수 품의서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