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최후통첩
“날 놀리는 겁니까?”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해 가며,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꿈틀대기도 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파르르 떨기도 했다.
“이게 놀리는 걸로 보입니까? 위원장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습니다. 전 그걸 뜯어고치고 모두가 함께 살아갈 환경을 만들기 위해 자리를 권했을 뿐이고.”
그에 대한 정보는 조사했다. 관리직으로 일하다 그만두고 현장에서 유야무야 일하다 위원장에 오르게 된 생뚱맞은 인물.
그래서 그에게 기회 아닌 기회를 줘 사고방식을 뜯어 고쳐볼 참이었다.
“내게 그딴 짓을 하고도, 착한 척에, 남을 위한 척이라. 위선자군.”
겉으로 착한 척하지만, 실상은 악한 인물.
아니라 말하고 싶지만, 분명 그에게 있어 난 악한 이가 맞을 것이다.
온갖 술수를 꾸며 그를 함정에 빠트려 끌어내렸으니까, 그런 상황에 난 그에게 자리를 권하고 있다. 신종 사이코패스가 나였나 보다.
“적어도 당신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나로 인해 이득을 봤지요. 100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의 피해는 이로운 일이 아닐까요? 당신들도 먹고살기 위해, 아니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하청업체의 고혈을 빨아먹지 않았습니까? 일명 갑질이라고 하죠. 내 돈으로 일군 것도 아닌, 남의 돈으로 얻어낸 되도 않는 권력으로 말입니다. 밖에 혼자 있으면 어떤 힘도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면서. 안 그래요?”
어르신의 참된 교육으로 혼탁한 마음을 정화시켰다 생각했는데, 다시 화딱지가 팍하고 올라왔다. 내 머리가 마임부우의 머리처럼 구멍이 뚫려 있었다면, 김이 새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딴 어이없는 말을 하지?”
“거기까지. 더 했다가 2차전이 될 거 같군요. 확실하게 갑시다. 내 제안을 받겠습니까?”
“날 더 우롱하려 들지 마. 전 직원을 수용? 웃기지도 않는군. 내가 잡혀갈 때 웃던 녀석들이 그 새끼들이야. 내가 뭘 위해 그 새끼들 좋은 짓을 해줘.”
이건 나도 좀 동감이기는 한데.
“그래서 대답은?”
“더는 보지 맙시다. 이제 더는 관여도 하지 않을 테니. 퇴직금이나 제때 챙겨주면 그걸로 만족하겠소.”
위원장의 마지막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럼 기존 계획대로 가자.
“어르신, 난 서로가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 했습니다. 그러니 더는 내게 뭐라 하지 마세요.”
어르신이 그랬다.
손해 안 보는 선에서 최대한 마음을 열어보라고.
그와 내 인연은 여기까지인지도 모르겠다. 추후 회사가 성장하면 부족한 인원을 그때 충원하는 방향으로 가자.
-국내 첫 노조 없는 기업 탄생. 김정수 회장 첫 자동차사를 가지게 된 부푼 감성을 말하다. “많은 역경과 고난을 거쳐 지금에 이른 기연 자동차를 KJ가 품게 되었습니다. 많은 우려 속에 인수한 기연 자동차는 앞으로 KJ자동차로 새롭게 출발하게 될 것이며, 국내 감성에 맞는 최고의 품질의 자동차를 선보이겠습니다.”
“누구 아들인지 참 잘 나왔네. 안 그래요, 정수 아빠.”
메인을 차지한 커다란 사진 속에 자신을 쏙 빼다 박은 아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지예는 포근한 미소를 입가에 품으며, 사진을 내려봤다.
“날 닮았음 그만하게 나와야지.”
그때 들어오는 반격.
“누구 닮았다고요?”
“누구기는 누구야. 지금 바라보고 있으면서.”
“어째서 정수가 당신을 닮았어요. 날 닮았지?”
“내 씨 아냐. 당연히 날 닮았지.”
“어머? 누가 알면 정수를 본인이 낳은 줄 알겠어요?”
“그러, 내가 낳았지. 누가 낳아. 자고로 농사를 하더라도 씨가 중요한 거야.”
“거름은 필요 없대요? 이 사람 말하는 것 좀 봐.”
“커흠.”
김보균은 아내의 말에 시선을 쓱 옆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민망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지예의 얼굴에 샘이 가득하다.
“…임자. 어디 소라도 키워? 상 위에 죄다 풀대기만 있어? 이 정도면 소 열 마리는 포식하다 죽겠는디?”
상추, 김치, 생수에 밥.
상 위에 올라가 있는 전부였다.
“…… 흥.”
자고로 여자의 심기를 건드리면 무섭다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지 모른다.
날 선 그녀의 시선에 보균은 말없이 상추에 밥을 얹어 입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소심한 한마디를 던졌다.
“고추장이라도 내와 봐.”
***
-김정수 회장, 미납대금 및 대출 ‘0’으로 만들어. KJ그룹의 믿어지지 않은 행보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지금껏 부채를 ‘0’으로 만든 기업은 없다. 작은 가게조차 붙어 있는 게 부채다. 한데, 김정수 회장은 부채는 기업의 성장에 발목을 잡게 하는 행위라며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전격 사업에 착수했다.
노조와의 합의를 깔끔히 해결하고 바로 나선 부분이 모든 부채를 ‘0’으로 만든 것이다. 돈이 없다면 부채가 좋을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 자동차 기업에 있어 부채는 독이나 다름없다 여겼다.
“이거 참. 이건 실력으로 키운 기업이 아니라 내 돈으로 키운 기업이 되어 버렸네.”
돈 먹는 기업. 그게 그렇게 되어 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은 로고도 뜯어고치고, 모든 차량들을 싼값에 내놓았다. 그리고 모든 차량들을 단종을 시키고, 새로운 디자인을 뽑으라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이거 하다 보니 재밌는데.”
해커 그레이 헤먼드의 기억을 가지고 바이러스를 잡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한참 앞서 나가는 기술력들이 화면에 일목요연하게 나열됐다.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든 부분이었으나,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대충 훑어봐도 뭐가 뭔지 파악이 되었다.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이렇게 해 보면. 괜찮겠어.”
이게 완성이 되면 컴퓨터 자체에서 판단해 바이러스 경고 메시지를 보내게 될 거다. 의심스러운 파일이 있으니, 클릭하지 말라고.
전체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모든 건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접근해, 파일을 열 수밖에 없다.
1차적으로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내, 최대한 피해를 막는 데 주력했다.
“이걸 완성하면 다모에 있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거야. 나머지는 차츰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하고.”
처음부터 잘 만들 생각은 없다. 부족한 점과 불필요한 부분을 사용하며 발전해 나갈 뿐이다.
“으차차차.”
사업을 병행하며 프로그램을 만진 지도 몇 달이 됐는지 모른다.
이번 건 윈도우98 출시 때, 필수로 깔리게 될 거다.
-김영진 대통령 셋째 아들 X모씨가 한보그룹 비리와 연루돼 긴급체포 됐습니다. 신고인은 김영진 대통령으로 자신의 아들의 죄를 대신 사과한다는 메시지를 남기면서 충분한 죗값을 치르고 나올 수 있도록 지도 바란다고…
“와, 이분 대단하네. 미래와 완전 다른 움직임이네.”
내게는 큰 도움이 된 사람이기에, 아들 비리 문제는 그냥 넘겨줄까 했었다. 조용도 했고.
한데, 김영진 대통령은 오랜 기다림 끝에 칼을 뽑았다.
스스로 자신의 아들을 신고해, 검찰로 보내 버렸다.
쉽지 않을 선택이었을 거라 보며, 이 순간만큼은 김영진 대통령을 다시 보게 됐다.
“회장님.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한데,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죠. 뭐, 문제 될 게 있나요?”
대진 자동차와 쌍마 자동차 인수과정은 순조롭다 생각했지만, 나의 성향을 본 노조원들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다.
그래서 대진과 쌍마 인수는 포기하고 기연 자동차 하나만을 품에 안기로 결론 내렸다.
“없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불량원단을 직접 납품받아 동대문에서 장사를 하시겠다니…”
“문제없어요. 혹시 압니까? 섬유업에 자연스럽게 진출하게 될지.”
자동차 사업에 진출한 마당에 원단 사업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도요타가 섬유 관련 업종에서 자동차사로 성장했으니까.
나라고 못 할 게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전에 해 본 경험도 있고, 내가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한 가장 자연스러운 만남이기도 해요.”
불량원단을 판매하는 일.
예전 그 시절로 돌아가, 그때를 기억하며 자연스러운 만남을 이끌고자 했다.
이것이 아내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내가 끝까지 챙겨주지 못한 아내. 이번 생만큼은 아내와 내 가족을 위해 힘겨워도 포기하지 않고 살고자 했다.
꼭 기다려 주기를.
꼭 행복한 나날을 보장해 줄 수 있기를.
내 심장에 새겼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럼 사람 한 명 정도는 데려가심이 어떠십니까? 회장님의 정체를 모르는 자보다 아는 사람이 더 편할 겁니다.”
실장은 나 혼자 일을 한다 생각하니 내심 불안한 모양이다. 내 고집대로 하기보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기에 듣기로 하였다.
“그럼 두 명만 준비해 주세요. 입 무겁고, 적응력이 좋은 사람으로. 당분간 이 회사는 실장에게 맡기죠. 굵직한 일 아니면, 알아서 판단해 조치를 취하세요.”
“… 건투를 빕니다. 회장님.”
지난날을 추억한 내 일자리가 결정됐다.
아내를 만나기 위해, 인생을 걸었다.
***
“요기 앞에 새로 점퍼를 낸 미래원단이에요.”
며칠이 지나, 동대문 귀퉁이에 제법 큰 원단가게를 개업했다.
구멍가게로 운영하려던 걸, 이호영 비서실장이 확 틀어 버렸다.
요즘 충성심이 부쩍 오른 비서실장이다.
“어쩜, 젊은 사장이 실하게 생겼네. 잘 먹을게요. 호호.”
나는 개업 떡을 돌리며, 주변 상인들과 친분을 다졌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좀 부탁드려요.”
“부탁은 무슨. 배고플 때 말해요. 맛있게 해서 배달해 줄게.”
“감사합니다. 어머님.”
식당, 세탁소 등등 모든 가게를 돌며 얼굴을 알렸다.
-미래원단.
전생과 전혀 다른 상호와 규모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 봤다. 새 술은 새 잔에.
현생은 새롭게 시작한 만큼 미래를 위해 달려 보기로 하였다.
“영업 다녀올게요. 가게 잘 보고 있어요.”
“아이고, 회장… 아차차. 사장님. 저희가 다녀오겠습니다.”
1톤 트럭 위로 몸을 싣는 내 모습에 두 직원이 화들짝 놀라며 달려왔다.
당황한 나머지 말실수를 하였으나, 웃으며 넘겼다. 아직 적응이 안 됐으리라.
“그러지 마세요.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뻔히 들었으면서. 남의 연애사업 망치면 벌 받아요.”
“큼…”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십쇼.”
황균성이라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허리를 넙죽 숙였다.
“너무 그렇게 하지 마시고. 이 시장 상황에 맞게 저를 편하게 대해주세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의 말에 한 차례 더 빙긋 웃고는 트럭 문을 닫았다. 개업을 한 이상 아내와 연애만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트럭의 승차감을 느끼며, 서서히 차량을 앞으로 몰아갔다.
사이드 미러로 걱정이 가득한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제일염색으로 향했다.
“자, 이제 시작이다.”
1998년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도로를 달렸다.
나의 심장이 거세게 뛰며 그녈 향해 외치고 있었다.
보고 싶다. 혜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