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새로운 자동차 그룹
[어찌 이리 변하였는가?]
“어, 어르신? 아,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으로 인해 후회 없는 삶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어르신을 보게 됐다.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
한데 어딘가 무척 슬퍼 보인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겐가?]
“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말에 대답을 해주는 게 아닌 나를 책망하는 분위기가 어르신의 음성에 담겼다. 인자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말이네. 자네의 그 따뜻한 국밥이 참 좋았다네. 생각 없이 건넸을지 모르나, 난 좋았네. 어디 사람이 그러기 쉬운가? 말없이 지나가고, 누구 하나 챙기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더럽고 볼품없는 나를 챙겼지. 난 알고 있었네. 자네에게 있어 내게 준 한 끼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었는지를.]
“그리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보게. 진정 내가 말한 의미를 모르겠나? 지금의 자네에게 있어 국밥 한 그릇 값이야 별거 아닐 거야.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지. 그걸 내게 준 것일세. 난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았고.]
“…네. 네. 그런데, 왜 그런 얼굴로 저를 보십니까?”
[나는 말일세. 자네를 변하지 않는 꾸준한 사람으로 봤다네. 사람을 위해주는 그 착한 마음이 참 좋았네. 사람들은 늘 그랬지. 착하면 손해를 본다고. 아니야. 아니야. 그건 그저 변명에 불과해. 착한 일에는 손해가 따르지 않아. 거기에서 이익을 찾으려 하다 보니 조금만 손실을 봐도 그걸 손해라 하지. 그렇다면 그 착한 일은 뭐가 되겠는가? 이익을 좇아 움직인 개새끼나 다름없지 않겠나?]
“……”
아무래도 입을 닫고 있어야 할 분위기다.
어르신은 내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신다.
그것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 제법 거칠다. 대체 그게 뭘까? 내가 잘못한 부분이.
[그렇다 한들 꼭 손해만 보라는 말은 아니네. 그저 자신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려 하지 말게. 그 사람들도 다 먹고살자고 한 일. 각자 사는 방법이 있는 게지. 남을 아프게 하는 자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나, 가족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과연 악인일까?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겠고,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람이겠지.]
“……”
어르신이 무엇 때문에 저리 말씀하시는지 알 것 같다.
내 안에 있는 천재들의 기억이 한 지점에 도달하게 도움을 주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 거 같습니다. 저 또한 사람. 권력욕에 취해 제가 뭐라도 된다는 듯 행동하였네요. 죄송합니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꼭 손해를 보란 말이 아니야, 그저 한 번씩 불쌍한 이들을 돌아봐 주게. 늙은이의 마지막 부탁일세.]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기연 자동차 사태. 내가 하려는 행동은 모두 나를 위한 것.
그저 그들의 생각과 환경을 이해 못 하고, TV에서 봐오던 진실만을 진실로 받아들이려 했다.
[내 말을 귀담아들어 줘 고맙네. 무조건 착해지라는 말은 아니니, 자네가 피해를 보지 않은 선에서 불쌍한 이들을 굽어살펴 주게. 그때의 그 국밥처럼, 따뜻한 마음만이라도 전해주면 되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큰 가르침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초심을 잃었다. 내가 하고자 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잘 가게. 이제 볼 일은 없음이니…]
환하게 밝히던 환경이 차츰 어둡게 변했다.
짜르르르르를—!!
“…… 꿈… 이구나.”
암전이 되어가던 시야 속으로 하얀 햇살이 눈가에 비쳤다.
까까— 까마귀라 짐작되는 새가 푸드득 날아오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알겠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신이 맑아진다.
내 잊었던 한 부분을 되찾은 기분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창가 앞에 섰다.
시선을 태양이 있는 방향으로 옮겨, 나직이 속삭였다.
***
어느 때와 다를 게 없는데, 오늘따라 세상이 달라 보인다.
시야가 확 트인 느낌, 내 자신이 한 단계 성장한 기분을 맛봤다.
“부위원장 측에서 연락 온 걸 보니, 우리 계획이 잘 맞아떨어졌나 보네요.”
“그렇습니다. 멋들어지게 성공했습니다. 덕분에 위원장 무리와 부위원장 무리로 나뉘면서 노조의 힘이 약해졌습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 그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면 좋은 일이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 쪽이 이득을 취하면 한 쪽이 손해를 보는 구조.
자본주의사회의 가장 큰 약점이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정권, 독재정치도 따져보면 마찬가지지. 권력의 중심이 돈으로 바뀌었을 뿐.’
이 실장의 보고를 들으며 생각에 빠졌다.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위원장과도 자리를 만드세요.”
“네-? 방금 뭐라고…”
“위원장과 대화를 해 볼 생각입니다. 어차피 사람들이 일하는 세상입니다. 트러블은 일어날 수밖에 없지요. 단지 규모의 차이일 뿐. 부위원장이 새로운 위원장으로 올라선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같은 행동을 하겠죠. 전 그걸 방비하고자 이참에 둘을 경쟁시켜 회사를 안정적으로 키워 볼 생각입니다.”
오는 길에 생각을 참 많이 해봤다. 내가 정말 올바르게 가는 걸까?
지금의 상황을 가장 좋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오래가지 않아 답이 나왔다.
경쟁 속에 서로가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음. 알겠습니다.”
이 비서실장은 내키지 않은 모습이다. 당연할 거다. 힘겹게 작전을 짜 노조의 힘을 죽였는데, 이제 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 전에 부위원장을 만나봐야겠지요. 가죠. 만나러.”
***
“어마어마하네요. 진짜.”
“그러게. 왜 KJ그룹을 최고로 치는지 알겠어.”
KJ그룹 본사가 있는 안산까지 와 본 건 처음이다. TV로 봤을 때는 시골에 별거 없는 동네라 여겼는데, KJ그룹 빌딩을 중심으로 수많은 건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걸 KJ 효과라 말해도 좋을 정도로, 안산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기연 자동차 부위원장은 주변을 둘러보며 큼지막하게 적힌 ‘KJ빌딩’ 아래에 위치한 통로로 들어갔다.
회전문이 빙글빙글 돌며 둘을 삼켰다.
“이리 앉으세요.”
회의장에서 부위원장을 기다리며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앞쪽에 위치한 사람이 지난번에 본 부위원장이었다.
그는 풀 죽은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입니다.”
확실히 부위원장은 위원장과는 반대된 성향을 띤 인물이다.
그의 소극적인 모습을 잠시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별일 아닙니다. 그저 의견 다툼으로 제가 오게 된 겁니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 창피했는지, 숨기는 모습.
나도 그 사실을 굳이 잡고 늘어질 생각은 없었기에 가볍게 넘겼다.
“그래요. 제 조건을 전부 수용하기로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어떤 조건이든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뭐, 좋습니다. 임금은 내년 실적을 보고 후년에 5% 올리고, 대대적인 인원 감축에 들어가겠습니다. 당장 공장 규모는 줄이지 않을 겁니다. 실적이 줄면 과감히 정리하고, 그전까지 현 상황을 유지하지요. 앞으로 우리 회사는 노조는 없습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 네.”
“깔끔하니 좋네요. 모두의 서명은 받아 오셨나요?”
“여기 있습니다. 모두 회장님 뜻에 따르겠다 서명했습니다.”
친필 서명과 직인 찍힌 종이가 내게 넘겨졌다.
종이가 꽤 두툼하다.
“앞으로 당신이 이들을 이끌어 회사 성장에 큰 보탬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만 일어나죠.”
더 앉아 있어 봐야 의미는 없었다. 일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가 빠져나가고 한참 뒤.
“날 불렀다 들었소.”
거참, 저런 말투는 참.
위원장의 성격이 얼마나 고집스러운지 알겠다.
“난 그룹의 오너입니다. 동네 마실 친구도, 주민도 아닙니다. 말에 신경을 써 주심 좋겠습니다.”
시작부터 불편하다.
더 불편해지기 전에 그의 말투를 정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내가 예의를 차릴 정도는 아니라 봅니다만. 좋습니다. 그래서 날 찾은 이유가 뭡니까?”
그래. 이 정도에서 넘기자.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면 그게 또 이상한 거지.
“노조에서 쫓겨났다죠?”
“흥, 날 놀릴 셈으로 불렀나 봅니다. 속 시원하겠군요.”
제대로 삐뚤어진 사람.
어쩌다 저런 시선과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씁쓸함이 자리에서 떠돌아다니며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복수를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복수? 뭔 복수. 웃기는 소리. 난 이제 은퇴할 생각이요. 동생들이야 어찌 됐든, 난 이제 더는 관여하지 않을 거외다.”
성격은 삐뚤어도 자기의 뜻은 확실하다.
확실히 부위원장보다 이쪽의 그릇이 크기는 컸다.
“뭐 좋아요. 이것 때문에 부른 건 아니니. 방금 전 부위원장이 전권을 가지고 내 모든 제안에 동의하고 나갔습니다. 노조 자체도 없앴습니다.”
“… 내 일 아니니 상관하지 않습니다.”
미세하게 그의 기가 죽은 것이 느껴졌다.
꽤 충격이 컸나 보다.
“표정을 보니 아닌 거 같은데,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고 결정하세요. 솔직히 내게 있어 노조는 악입니다. 회사를 운영하는 데 힘겹게 만드는 암덩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장애가 발생하지요. 인건비는 매년 오르는데, 수익이 줄어드는 상황. 그런 상황에 노조는 계속해 임금을 올려 달라 합니다. 과연 누가 좋아할까요? 그런 논리면 회사가 어려워질 때 임금도 그만큼 줄이는 게 맞다 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난 신경을 끄고 계속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그 소리는 같이 죽자는 소리밖에 안 됩니다. 뭐 이런 거죠. 위원장님의 정해진 월급이 100만 원입니다. 한데, 일이 생겨 월급이 50만 원이 된 겁니다. 그런 상황에 자녀분이 나이 한 살 더 먹었다며 10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올려 달라 고집을 부리고, 고정지출, 생활비는 더 증가했습니다. 저금도 못 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죠. 위원장님이라면 용돈, 올려 주시겠습니까?”
“……”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이번 건 대답하기 어려웠으리라. 지금까지 노조가 억지를 부리며 해오던 고집들이다.
그가 무언가 느끼길 바라는 마음으로 현실적인 비유를 하였다.
기연 자동차가 무너진 판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고집은 정말 다 같이 죽자는 소리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그런 겁니다. 이번에는 노조는 움직이지 말고, 기업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다 함께 움직였어야 맞았다는 말입니다.”
그랬다면, 난 그런 일은 벌이지 않았겠지.
“그 일 제가 벌인 겁니다.”
“… 알고 있었습니다.”
모를 수 없지. 의심에서 내가 찾았을 때 확신으로 바뀌었을 거다.
난 그의 표정을 확인하다, 두세 번의 생각을 더 걸쳐, 내가 생각한 바를 꺼내 들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그래서 당신에게 뜬금없는 제안을 하려 합니다. 연민이라 생각해도 좋고, 미안함에 그런 거라 생각해도 좋으며, 시험이라 봐도 좋습니다. 현장 중심으로 바라보려는 그 시야를 회사 전체로 봐 달라는 의미에서 생산팀장으로 올려볼까 합니다. 그 자리에서 특별한 성과가 없다면 더 올라가기는 힘들 겁니다.”
내가 생각해 낸 방법.
그건 위원장을 관리직으로 끌어올려 노조위원장에서 봐오던 부분을 관리자 입장에서 현장을 바라보며, 기존 노조 인원들을 관리하기를 바랐다.
“받아들이겠다면, 당신 측 사람들 전부를 수용하겠습니다.”
서로의 사이는 무너졌지만, 경쟁이라는 좋은 요소가 생겼다.
부위원장은 현장 총책임자로, 위원장을 생산관리팀장으로.
이것이 내가 생각한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다. 이왕 바꾸는 거 확실하게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