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이이제이
“왜, 연락이 없을까요? 정말로 이대로 아무 일도 안 하고 버티는 건 아닌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상대측에서는 어떤 연락도 없었다. 언론은 KJ그룹의 자동차 인수를 조명하며 영웅처럼 떠받드는데, 너무도 잠잠했다.
“정말로 10년이고, 20년이고 가려는 거 아닐까요?”
걱정스러웠는지 우려를 표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간 의기투합하며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의 눈빛이 죽어갔다.
부위원장도 그들 중 한 사람. 이대로 가다가 다 같이 죽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소리 하려거든, 나가서 바람이 쐬고 와.”
부위원장의 헛소리에 위원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을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가 불안해하는 이 시기에, 기를 꺾는 말을 해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
부위원장은 그늘이 내려앉은 표정을 얼굴에 드리운 채, 힘 빠진 모습으로 자리를 피했다.
“쯧쯧, 저것도 부위원장이라고.”
그의 모습에 위원장은 혀를 쯧쯧 차며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부위원장님이라고 그러고 싶겠어요. 답답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처자식은 있는데, 돈은 벌어서 가져다주지 못하고. 최근 대출도 한 거 같더라고요.”
“누구는 안 힘들어. 혼자만 고생해. 이게 다 다 같이 살자고 하는 일 아냐! 그렇지 않아도 짜증 나 죽겠는데.”
위원장은 화가 극도로 치미는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주변에서 말려도 보지만, 애꿎은 사람만 욕먹고 밖으로 퇴장했다.
“성격 정말 더럽다니까.”
“그러게. 요즘 더 그런 거 같아. 예전엔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자리가 사람을 버린 건지. 이제 정말 내가 잘하고 있는 짓인지 모르겠다.”
다독여 주지 못하는 위원장의 실망스러운 모습.
기연 자동차 노조는 조금씩 붕괴되는 현상을 맞이하고 있었다.
***
“요즘 기연 노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부위원장과 위원장 사이에 약간의 다툼이 있었는지, 둘로 파가 나눠졌다 합니다.”
노조 측에 심어 놓은 사람으로부터 들려온 보고다.
“금방 무너질 사람들이 왜 그랬대요.”
사람은 희망이 보이면 힘을 합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낀다. 자신들의 행동이 맞는지 의심을 하게 된다.
KJ그룹이 나서면서 이를 봐줄 사람은 없다. 여론은 KJ그룹의 편을 섰다.
“그렇다면 이번에 제대로 갈라서게 만들어 보죠.”
그들과 대화한 녹음파일은 귀중한 증거자료가 되어 줄 것이다. 그건 최후의 한 방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걸로 하고, 이들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기로 결정을 내렸다.
“호, 이이제이군요.”
“어떤 연락도 없는 상황에 부위원장만 빼고 은밀한 시간을 가지게 된다면, 어떨까요?”
“재밌는 일이 벌어지겠네요.”
“네. 지금 부위원장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돈이 필요한 상황이라죠. 돈다발을 주며 한마디만 하세요. 잘 부탁한다고. 우리에게 힘을 실어 달라고.”
“그러다 우연히 지나가는 부위원장의 귀에 들리게 한다면, 딱 좋겠네요.”
“그렇죠.”
“아주 멋진 계획이십니다.”
“확실히 둘 사이를 갈라놓고 경쟁하게 만듭시다. 그 후 상황을 보며 녹음파일을 공개하든지, 하고요.”
우리는 조금 더 디테일 있게 계획을 잡고, 며칠 후 실행에 옮겼다.
휘이이—
눈발이 흩날리며 세상을 하얀 어둠으로 만드는 저녁.
“왜 날 불렀소.”
기연 자동차 위원장과 처음 보는 남자와 자리를 가졌다. 위원장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새겨졌다. 너무도 뜬금없는 만남이었던 탓이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회장님은 이번 일을 완만하게 해결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에게 힘을 실어 주셨음 합니다.”
“어떤 회장을 말하는 거요.”
“다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잘 부탁합니다.”
남자는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손에 들린 쇼핑백을 들어 올렸다.
“이건 작은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쇼핑백를 쥐여주었다. 꽤 무게가 있는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뭐요?”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그저 성의 표시입니다.”
“……”
“연락은 며칠 뒤 이쪽에서 갈 겁니다. “
“……?”
“또 찾아뵙겠습니다.”
“이봐,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하고 가야 할 아니야.”
위원장은 대뜸 쇼핑백을 건네고 사라지는 남자를 보며 소리를 쳤지만, 남자는 모습을 감췄다.
“박카스인가. 허 참.”
손에 들린 쇼핑백을 잠깐 확인하고는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위원장은 보지 못했다. 남자가 흘리고 간 찢어진 종이를.
“……”
3분 정도 흐른 시간, 어둡게 내려앉은 밤하늘 아래 이호영 실장이 잠깐 시선을 옮기던 장소에서 한 인영이 등장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비친 모습은 기연 자동차 노조 부위원장이었다.
“이 개 같은 새끼……”
부위원장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하얀 눈 위로 보이는 메모지. 아니 메모지라 생각했던 종이.
-미래자동차…
그건 메모지가 아닌 명함이었다. 그것도 이름은 확인하기 힘든 명함이었지만,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비로소 확실해졌다.
그의 거만한 태도와 여유.
아무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만난 이유. 그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누가 보더라도 막대한 돈다발이 든 쇼핑백.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애초에 KJ와 협상할 생각이 없었어… 절대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돼.”
위기의식을 느낀 부위원장의 목소리에 각오가 다져졌다.
“형태야. 애들에게 연락해. 다 모이라고.”
“네. 부위원장님.”
잠시 후, 함께 걸어 들어온 남자에게 지시를 내렸다.
남자는 곧장 등을 돌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향했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
“네? 그게 정말이에요?”
“어제 만나는 걸 우연히 봤어.”
“네, 어제 부위원장님께 면담을 드리러 갔다, 몰래 나가는 위원장님을 보고 이상해 따라가게 됐는데… 그곳에 KJ 비서실장이 있었습니다.”
부위원장에 말에 같이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누가 보더라도 극심한 배신감에 빠진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설마 설마 하던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맺혔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위원장님이 그러려고…”
“이걸 보고도 그래.”
“이게 뭔데요?”
-미래자동차…
“이게 어쨌는데요?”
“그 자리에 떨구고 갔더라. 돈다발에 정신 팔려서.”
“네에?!! 돈다발요?”
“네. 저도 봤어요. 꽤 큰 쇼핑백이었어요. 그 정도면 1억 정도 들어가 있을 거예요.”
부위원장의 말에 남자가 힘을 실었다.
“그러고 보니, 위원장님이 밖에서 뭔가 들고 온 걸 본 거 같네. 어두워서 잘은 안 보였지만, 맞는 거 같아. 너도 봤잖아.”
“맞아. 꽤 컸지. 아마?”
“허, 위원장 그렇게 안 봤는데. 어떻게 사람이…”
“뭘 안 그래. 성격 더러운 거 다들 알잖아. 그 사람 뒤에 연줄 없었음 위원장 가지도 못했어.”
방안은 순식간에 위원장을 욕하는 분위기로 변했다.
“이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그러다 사람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현재 내부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알게 모르게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파벌이 나눠진 상태였다.
그런데 미래자동차와 손을 잡은 위원장의 소식이 주변에 깔리면, 과연 부위원장 측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절대 그럴 일 없어. 그 인간 성격으로 그 돈을 나눌 양반이 아니야. 내일 회의를 열어 증거를 잡으면 돼. 그걸로 위원장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고 우리가 KJ와 협상한다.”
통장 잔고는 마이너스가 된 지 오래. 어떻게든 하루빨리 일을 시작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였다.
부위원장은 이를 바득 갈며, 위원장이 있을 방향을 노려봤다.
***
“어쩐지 너무 무겁다 했어. 박카스를 이렇게 넣어뒀으니.”
방으로 들어온 위원장은 쇼핑백 안을 확인했다. 설마 돈일까 싶어 위에 박스를 열어봤지만, 위에도 아래에도 박카스 병만 가득했다.
맨 아래에 자리한 박스만 내버려 두고 모두 꺼내어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사람들 다 모였습니다.”
“그래, 가지.”
나머지 박카스 한 박스는 서랍장 안에 넣어두고 밖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따르는 남자의 눈빛에 심상치 않게 변했다. 그의 걸음은 서서히 느려지며 위원장과 거리를 벌렸다.
“전 잠시 화장실 좀.”
“에잉. 미리미리 다녀. 다녀오게.”
“네.”
남자는 위원장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간을 끌다 위원장실로 다시 발걸음을 하였다.
“위원장님이 나한테까지 숨기고 그런 짓을 벌일 일이 없어. 다 같이 고생하는 사이인데.”
남자는 주문을 외우듯, 연신 되뇌며 걸음을 재촉했다.
“……”
하나 그것도 잠시.
“시발 새끼가 진짜…”
남자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사람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눈가에 불길을 뿜었다. 그의 손에는 위원장이 서랍장에 숨긴(?) 박카스 박스 안으로 1만 원권 지폐가 한가득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메모지 한 장도.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잔금을 치르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걸 보는 순간 참았던 분노가 밖으로 표출될 뻔했으나, 남자는 꾹 참았다. 남자는 그걸 가지고 사람들이 모인 장소로 향했다.
“무슨 일로 모이라 했나?”
안으로 들어선 위원장은 사람들 사이에 자리한 부위원장을 응시했다.
내내 조용히 있던 사람이 회의를 여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원장님,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 없습니까?”
“자네가 회의를 소집해 놓고 할 말이라니. 무슨 말?”
“계속 시치미를 떼시네요. 어제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볼일이 있어 나갔다 왔네. 한데, 그것과 이 회의와 뭔 상관이지?”
“허, 계속 발뺌을 하시겠다 이 겁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위원장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갑자기 이들이 왜 이러는지 알 턱이 없기에, 그의 표정은 의문에 휩싸였다.
“이건 뭘까요? 이래도 발뺌하실 겁니까?”
-미래자동차…
어제 주운 명함을 내밀었다.
“허, 지금 날 의심하는 건가?”
“그럼 왜 말을 못 하십니까? 어제 뭘 했는지.”
“심지어 날 미행했다?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이거 크게 실망이군. 역시 자네를 부위원장으로 올리는 게 아니었는…”
벌컥.
“앉혀서는 안 됐을 사람은 당신입니다.”
문을 벌컥 열고 화장실 간다며 거짓말을 했던 남자가 등장해 위원장의 말을 잘랐다.
그는 박카스 박스를 들며 외쳤다.
“그래도 믿었는데, 이런 개 짓을…”
곧 거꾸로 든 박카스 박스 안에서 만 원권 지폐가 우르르 쏟아졌다.
“그거 뭐야? 왜 거기에 돈이 들어 있어?! 아니야. 난 아니라고!”
위원장은 쏟아진 돈다발을 보며 주문처럼 반복적으로 읊었다. 저게 저기서 나올 일 없다고.
반복적으로 외쳤다.
“당신은 위원장 실격입니다. 우리가 대표로 나서 KJ와 협상하겠습니다.”
부위원장은 사람들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위원장을 감쌌다.
“진짜 설마 설마 했는데, 어쩐지 협상 자리에서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다 했는데. 시발.”
“어이가 없네.”
“우린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끼며 저마다 위원장을 욕했다. 곧 위원장은 그들에게 구속된 채, 밖으로 끌려갔다.
“난 아니라고! 이건 음모야! 이거 안 놔! 놔! 이 새끼야!”
멀어지는 위원장은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여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협의가 끝날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하세요. 그리고 KJ에 연락해 뭐든 뜻에 따르겠다 하고, 자리를 만드세요.”
그동안 고심해 오던 문제가 풀렸다.
“이 돈은 모두 공평하게 나눕시다. 모두 어려울 텐데.”
부위원장은 바닥에 있는 돈을 주워 사람들과 n/1로 나누기로 하였다.
“…… 위원장 쪽에 붙은 사람들은 버리고, 우리가 살아남는 겁니다.”
그리고 최종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저의를 알게 된 사람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