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전설예고
제일염색. 1970년대 설립해 단순 염색으로 시작, 날염 부분으로 확장한 기업.
직원 수는 50명에 연 매출은 200억 수준인 중소규모.
오늘도 이곳은 출고준비로 한창이었다.
“여기 한 팔레트 실으면 돼요!”
“오케이!”
직원의 말에 기사가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동그랗게 만들고 화물차 뒷문을 땄다.
손수 손으로 포장된 원단을 들어, 세로와 가로 방향으로 굴러가지 않도록 순차적으로 쌓아 나갔다.
“나가실 때 송장 쓰고 가는 거 잊지 마세요!”
“날 뭐로 보고. 걱정 말어. 아, 나 안 쓰는 원단 하나 주면 안 될까?”
“어디에 쓰게요?”
“딸 아이가 과제라고 구해 달라고 해서 말이야. 하하.”
기사가 머쓱한지 죄 없는 뒷덜미를 살살 긁었다.
“알았어요. 다 싣고 기다리세요. 현장 가면 불량 나서 빼둔 거 있을 테니 그거 가져다줄게요. 색상은 아무거나 괜찮죠?”
“땡큐. 역시 송 대리밖에 없어. 응. 아무거나 주면 돼.”
기사는 주머니에서 1만 원권 지폐를 꺼내 그의 주머니에 슬쩍 넣어 주었다.
남직원은 찔러주는 지폐의 감촉을 느끼며 옅게 미소를 지으며 현장으로 향했다.
“또 불량이네. 불량만 팔아도 부자 되겠다. 휴···”
확대경이 설치된 작업대로 흘러나오는 염색된 원단을 검사하던 여성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노랗게 염색된 원단 한 부분이 염료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채 생산됐다.
마치 구멍 뚫린 것처럼 보이는 하얀 부분.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 생산된 원단은 불량처리 됐다.
여성은 그 부위를 가위로 도려내 옆으로 파란 박스 안에 넣었다.
“혜영아, 원단 불량 난 거 좀 있지?”
그때 남직원이 입가에 미소를 실실 쪼개며 다가왔다.
여성의 이름은 이혜영. 뒤로 한껏 끌어올려 묶은 모습이 보호 본능을 일으켰다.
말티즈의 머리털을 저리 묶으면 딱 그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다.
“안 보여요, 옆에 잔뜩 쌓인 거?”
혜영은 슬쩍 시선을 옆으로 옮겨 턱으로 가리켰다.
“휘유~, 오늘도 많이 나왔네. 이거 가져간다.”
남직원은 박스를 힘껏 들어 어깨에 걸치고는 우측에 자리한 빈 박스를 발을 이용해 혜영의 옆으로 쓱 밀었다.
“현장 가면 말 좀 해줘요. 불량이 너무 많이 나와서 회사 망하게 생겼다고.”
“크크, 그게 어디 한두 번도 아니고. 훗.”
혜영의 말에 남직원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여간!”
그에 혜영은 고개를 홱 돌려 다시 시선을 작업대로 돌렸다.
“대리님! 부장님이 찾으세요! 급한 일이라고 빨리 회의실로 오래요-!!”
저 멀리 화물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나?”
“네!!”
“어, 이거 안 되는데. 바로 가져다주기로 했는데.”
“빨리 오라고 했어요.”
갑자기 자신을 찾는 직원의 목소리에 남직원은 곤란한 얼굴로 창 너머로 보이는 트럭 기사를 바라봤다.
물건을 다 싣고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너도 회의 가?”
“그럼, 저도 구매팀인데, 가죠. 빨리 가요.”
“아, 어쩔 수 없네. 혜영아, 미안한데, 부탁 좀 하자.”
남자의 보챔에 남직원은 미안한 시선으로 혜영을 응시했다.
“이거 수레 이용해서 밖에 있는 저 기사님에게 전해주라.”
“저 일하는 거 안 보여요?”
“정말, 미안. 내가 웬만해서 이런 부탁 안 하잖아. 한 번만. 응?”
“휴··· 알았어요. 이번만이에요?!”
“그래 고맙다. 내가 이따 음료수 살게. 땡큐!”
조금이라도 늦으면, 불독을 닮은 부장은 얼굴에 붙은 살들을 부들부들 떨며 으르렁거렸다.
남직원은 수레 위에 박스를 올려놓고 급히 사무실로 뛰었다.
“언니, 저 다녀올게요!”
혜영은 할 수 없다는 듯, 같이 일하는 고참 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레를 끌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일으키며 혜영의 손에 이끌렸다.
데굴데굴. 빙그르.
“제일염색. 여기 같은데??”
그 시각 제일염색 현관문 주변을 서성이는 남자가 있었다. 행동을 보아 제일염색 직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사각 안경에 잘 차려입은 양복은 면접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뭣 때문에 오셨수?”
계속 두리번거리는 낯선 남자를 발견한 중년남성이 다가와 물었다.
“죄송합니다. 사람 좀 찾고 있어서 말입니다.”
“사람?”
“네. 이곳에 다니는 여성분이 계시는데, 이름이 이혜영이라고··· 혹시 여기에 다니고 있는지요?”
“혜영이? 걘 왜 찾수?”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물으니, 중년남성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혹시, 나쁜 의도로 찾아온 사람이 아닌지 의심이 든 탓이다.
세상이 흉흉하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전 추억의 사람을 찾아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TV는 사랑을 싣고 아시죠?”
“음, 아!! 그거! 허허허.”
TV는 사랑을 싣고는 KBC에서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예능프로그램이다.
은사를 찾아주기도 하고, 추억의 인물을 찾아주는 제법 신선한 방송을 다루고 있었다.
중년남성도 즐겨보는 프로그램이었는지, 손바닥을 짝! 치고는 알은 척을 하였다.
“진작 말하지 그랬습니까? 난 또 못된 마음 먹고 따라다니는 변태로 봤지 뭐요. 하하.”
중년남성은 가슴을 활짝 펴고 웃어 젖혔다. 첫인상과는 많은 부분이 다른 중년인이었다.
“하면, 이곳에 이혜영 씨가 계십니까?”
“있다마다. 어, 마침 저기 저 나오네. 저 애가 이혜영이오. 참 예뻐. 일도 잘하고. 잠시 기다려 봐요. 내 불러···”
주변을 둘러보며 대화를 나누던 중년인은 시야로 수세를 끌며 화물차로 가고 있는 혜영을 발견하고, 그녀를 부르려 하였다.
그 순간 남성이 급하게 나서서 중년인의 입을 막았다.
“쉿! 안 됩니다. 주인공은 나중에 알아야 재미죠.”
“아, 이런. 내가 흥분해서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하하.”
“몇 가지만 묻겠습니다. 혹시, 혜영 씨 나이가 24살이 맞나요?”
“맞지. 나랑 딱 24살 차이 나거든.”
“오, 그럼 결혼은···”
“이거이거, 혜영이를 찾는 사람이 남자구만. 음하하. 남자친구도 없는데, 뭔 결혼. 뭐라더라 운명의 남자를 만나겠다나? 큭큭. 아주 순해 빠졌어.”
“아, 좋은 정보였습니다. 저희도 저분이 맞는지 좀 더 알아봐야 하기 때문에 당사자에게는 알리지 말아 주세요. 혹시 맞다면, 방송사에서 깜짝 방문하게 될 겁니다.”
“오, 내가 또 입이 무겁지. 걱정 말아요. 재밌네. 재밌어. 하하.”
중년인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껄껄 웃으며, 기사에게 박스를 넘기고 현장으로 들어가는 혜영을 바라봤다.
‘맞는 거 같은데. KJ 비서실에서 왜 저 여자를 찾는 걸까?’
중년인의 시선을 피해 남성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혜영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여성을 KJ그룹 비서실에서 찾는다? 무척 흥미가 동했다.
서서히 거리를 벌려 회사에서 빠져나왔다.
“사진은?”
“잘 찍었습니다.”
“그래, 그럼 가지.”
그는 다름 아닌 KJ그룹 비서실장 이호영의 요청을 듣고 이혜영을 찾아 나선 심부름꾼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몰래, 신호에 맞춰 이혜영의 사진을 찍은 걸 확인하고는 신속하게 자리를 이탈했다.
***
“알아냈습니다.”
외환위기 프로젝트 미팅이 끝나고 잠시간 몇몇 이들과 티타임을 가지고 올라오던 때, 대기해 있던 이호영 비서실장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무척 밝았다.
“방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심장이 두근거렸다.
묻고 싶은 건 많지만 꾹 참았다.
“제일염색에 재직 중이며, 아직 미혼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건 현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맞는지 확인 바랍니다.”
“이건, ···”
이건 내가 시키지 않은 행동. 역시 일에 있어 꽤 센스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가 건넨 사진을 가져와 안에 담긴 인물을 멍하니 바라봤다.
‘혜영아···’
앳되며 귀여운 얼굴, 기억 속에 각인돼 잊을 수 없던 그 얼굴이 사진 속에 담겨있었다.
비록 옆모습이지만, 절대 모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욕심으로 사업이 망하면서 막대한 빚을 떠안게 돼,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혼을 선택했다.
그리고 병신 같은 선택을 한 나.
정말 후회가 되는 순간이다. 다시 그때로 갈 수 있다면, 지금의 성공된 삶은 버릴 수 있었다.
“고생했어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죠. 이만 나가 보세요.”
손을 흔들어 축객령을 내렸다. 내 시선은 사진에 고정한 채.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아내와 난 어떤 연결고리도 없다. 무턱대고 만나 달라고 한다면, 미친놈이나 변태 소리를 듣기 딱 좋았다.
“생각을 해보자. 수가 있을 거야.”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느덧 해는 저물어 회색빛으로 물들어갔다.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지 소로스가 회의장을 벗어나며 JP모건 더 글라스 워너 회장에게 슬쩍 접근해 물었다.
“모를 일입니다.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지껄이다니. 완전 미친놈이 따로 없어요.”
거대 두 그룹이 철수하면 미국 정부가 과연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더 글라스 워너 회장은 그의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너무 비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그를 이해하려 하니 두통이 밀려왔다.
“같은 생각입니다. 겨우 돈 몇 푼 번 걸 가지고 미국과 상대하려 하다니 말입니다.”
“한데, 신기하다는 말입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사고를 가지고,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내 그만한 수익을 냈는지.”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알아보니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어떤 전문 교육도 받지 않고, 얻어낸 성가는 무척 놀라웠다.
운?
운으로 그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게 참 없을 거란 어이없는 생각까지 머릿속에 나돌았다.
“실력은 인정합니다. 1년 사이 세계를 아우르는 재벌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딱 그 정도가 다입니다. 그자 혼자서는 우리를 어쩌지 못합니다.”
“그렇지요. 소국이 대국을 이길 수 없어요. 미국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실 생각입니까?”
“음.”
조지 소로스의 질문에 더 글라스 워너 회장은 소파 팔걸이에 팔을 고정한 채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솔직히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을 어쩌지 못할 거란 생각은 같지만, 그의 실력은 진짜이기에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1년 만에 세계적인 그룹 세 곳을 인수하기 쉬운가?
그의 머릿속은 실익을 따지며 계산기를 두들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말은 그리했지만, 그로 인해 한국 시장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변하기는 했어. 그리고 한국의 기업들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했지.’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으로 바꿔보니, 한국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부분은 한국의 외국자본 진입이 쉽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한국의 외환위기 상황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는 전부 김정수 회장 덕.
그의 영향 아래 한국경제가 안정화가 되어갔다.
‘여기서 IMF를 끌어들인다 해 봐야 우리가 이득 볼 건, 그리 많지 않아. 오히려··· 돕는 게 이득인가.’
조지 소로스가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든, 더 글라스 워너 회장은 천천히 계산을 끝마치고 있었다.
이윽고.
“생각이 바뀌었네요. 건방지지만, 그의 말이 맞아요. 그리고 골드만삭스 늙은이는 이미 김 회장에게 붙은 것도 같고 말입니다. 난 투자자지. 정치가가 아니니. 내 자산만 불러 준다면,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군요.”
그의 발언에 조지 소로스 회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까지 펼쳐오던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만 편을 들어준다면,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했건만.
“그러니 당신도 헛된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 늙은이와 함께하려는 자들이 꽤 돼요. 우리 중 한 명만 언급해도 한국으로 달러가 상당수 모이게 될 겁니다. 주인공이 바뀌었으니, 내용도 바꾸는 게 맞겠지요. 한국에 투자하는 방향으로 가볼 생각입니다. 한 가지 조건을 한국이 들어준다면.”
긴 시간 계산 끝에 결과를 냈다.
이제 그와 협상할 일만 남았다.
“모두 모여서 의견을 모아야겠습니다. 그럼 난 이만 일어나지요.”
할 이야기가 다 끝났다는 듯, 더 글라스 워너 회장은 눕다시피 한 몸을 일으켰다. 곧 문이 열리고 수행원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조지 소로스 회장.
“······”
그의 얼굴에 심하게 일그러진 채, 펴질 줄 몰랐다.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