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세계적인 갑질의 전설을 쓰다
“……”
KJ그룹 비서실로 들어온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알 사람만 아는 그저 그런 대기업 비서실장으로 지내다, 부도를 맞이해 KJ그룹에 서류전형에 통과하고 입사하는 데 성공했다.
반년이 지난 때, 정말로 난 운 좋은 남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 남들에게 말 못 할 비밀들이 많은 KJ그룹.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일들이 판타지처럼 펼쳐졌다.
“하하하.”
그리고 내게도 판타지가 찾아왔다. 바보처럼 멍했던 정신이 되돌아오며 입가가 실실 쪼개졌다.
파도를 타며 흐느적거리는 입술을 가누기 쉽지 않았다.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한 번쯤 상상해 오던 일이었는데.”
국내 어떤 기업인이 그들에게 이런 짓거리를 할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흥분감이 심장을 경유해 혈액을 뜨겁게 달궜다.
“대 KJ그룹 비서실장 이호영입니다.”
목소리에 힘을 꽉 주고 중 저음으로 낮게 깔았다.
“공문은 확인하셨습니까?”
내가 전화한 곳은 세계 금융그룹 중 하나인 골드만삭스.
상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한국 시각 기준으로 다음 주 목요일 오후 1시 30분까지 베어링스 은행 한국지사로 참석 바랍니다.”
상대의 목소리가 떨려온다. 이 짜릿한 기분.
쥑인다!
“참석 여부는 자유입니다만, 회장님께서 빠짐없이 참여를 원하십니다. 불참 시 어떻게 될지 저는 모릅니다. 자세한 사항은 한국에 오셔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참석 여부는 다모 메일로 부탁합니다. 그럼.”
첫 통화가 끝났다.
일방적인 통화종료.
“후후.”
이제 앞으로 30통 남았다.
이 짜릿함을 즐겨보자.
***
띠리리—
띠리리—
창가에 자리한 책상 위로 배치된 팩스기가 작은 소음을 내며 종이를 밀어냈다.
“실장님, KJ 한국 본사에서 공문 왔어요!”
긴 다리를 따라 큼지막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실장이라 칭한 남성에게 다가갔다.
고혹적인 눈매를 깜박이며, 종이를 건넸다.
“KJ?!”
남자는 종이를 받아 들고 펜 끝 부위로 머리를 긁으며 내용을 확인했다.
-세계금융을 짊어진 여러분들을 대한민국 KJ그룹 한국 본사로 초대합니다.
-주최자: KJ그룹
-목적: 대한민국 투자유치
-참석자: 골드만삭스, AIG, 시티, JP모건, …(해당 그룹 총 책임자: 회장 아래 참석 불가)
-일자: 1997년 9월 11일 (목)*한국시간기준*
-참석 여부는 자유이나, 모두 참석하는 걸 추천합니다.
-골드만삭스는 필히 참석 요망.
“… 완전 미쳤군. 이따위 걸 공문으로 보내다니.”
골드만삭스 비서실장 엔드류 링컨은 종이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입사 이래 이런 어이없는 공문은 처음 받아봤다.
“뭔 내용인데 그래요?”
종이의 내용을 확인하지 못한 여성은 궁금함에 고개를 쑥 내밀어 빠르게 글을 읽어갔다.
“헐, 돈 좀 벌었다고 신생기업이 미쳤네요. 우리에게 이런 걸 보내다니…”
따르릉.
화를 내려던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골드만삭스 비서실 엔드류 링컨입니다.”
엔드류 링컨은 잠시 화를 내리누르고 수화기를 들었다.
“……확인했습니다.”
한동안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엔드류 링컨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끝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미친 새끼가!”
공문에 대해 따지려던 때, 본인 할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은 정말 처음이다. 누가 있어 골드만삭스 비서실에 전화해 이렇게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대통령도 이렇게 자신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뭐예요? 끊었어요?”
“하, 이건 정말이지 대특종감이야. 세상에 이런 미친 새끼는 다시 없을 거야.”
전화기를 노려보다 시선을 돌려 종이를 노려봤다. 심히 고민되었다. 한국에서 보내온 이 공문을 위로 올릴지 말지를 두고 갈등에 빠졌다.
“실장님, 설마 이걸 회장님께 올린 건 아니죠?”
“……”
“저라면 그냥 찢어 버리겠어요. 이건 완전히 우리를 무시하는 행위라고요!”
여성은 몹시도 분한지 비서실장보다 더욱 흥분해, 화를 참지 못했다.
“둘 거기서 뭐 하나? 무슨 일인데, 사무실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어?”
“……”
“…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외출을 하던 중년남성이 다가와 물었다. 중년인의 시선은 이내 엔드류 링컨 손에 들린 종이로 향했다.
“그게 뭔데, 이리 난리야. 줘 보게.”
“아, 이 이건 아무것도…”
재빨리 종이를 숨기려 했지만, 중년인의 손이 더 빨랐다. 중년인은 둘의 표정을 살피다 종이를 내려봤다.
“…… 허. 당돌하군.”
중년인은 황당하게 바라보던 시선을 고쳐, 날 선 시선을 보냈다.
허허로이 웃던 그의 표정은 사라지고 성난 호랑이의 얼굴만이 자리했다.
“한국으로 가지. 어떤 놈인지 궁금하던 차였는데, 잘됐어.”
자신의 밥그릇을 건드려 궁금하던 차였다. 세계를 시끄럽게 만드는 인물.
이번 기회에 KJ그룹의 주인을 만나보기로 하였다.
“회장님! 이런 거에 휘말리시면 안 됩니다.”
중년인은 골드만삭스 실소유주. 존 코진 회장이었다.
아차 싶던 비서실장이 벌떡 일어나 그를 만류하고 나섰다.
“한 번 말한 걸 두 번 이상 말하게 하지 말게.”
하나, 존 코진은 단호했다.
회장으로서의 포스가 방 안을 채웠다.
엔드류 링컨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절대 꺼내기 싫었던 말을 꺼냈다.
세계에 뻗친 대 금융그룹의 시선이 한국에 집중됐다. 그리고 세계가 놀랄 만한 일이 97년 9월에 벌어졌다.
***
1924년 10월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출발해, 약 73년의 역사를 가진 기업.
자본금 1500원으로 소주를 생산해 판매했다. ‘금련’ ‘낙동강’을 판매하며 세를 조금씩 확장해 재계 50대 기업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국민들의 술로 통일된 진영 소주.
그 명맥이 끊기게 생긴 와중에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저 소식이 참말인가? KJ에서 우리 소주를 인수하겠다는 게?!”
-KJ그룹 김정수 회장이 진영을 포함한 부도 위기에 처한 그룹을 전격 인수키로 하였습니다. 현장으로 나가 있는 취재진에게 연결하겠습니다. 김재익 특파원.
-네, 여기는 KJ그룹이 본사로 사용하고 있는 베어링스 은행 한국지사가 자리한 KJ빌딩 앞입니다. KJ그룹 김정수 회장은 제일은행과 산업은행 등과 협의 진행 중에 있습니다. 총 자금은 10조 원대 규모로 모든 결제대금을 달러로…
진영그룹 회장 임효원은 TV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부터 협의가 되어지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골드만삭스와의 법정 소송전에서 패해 모든 걸 내려놓고 세상과 연을 끊고 두문불출하였는데, 오랜만에 켠 TV에서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KJ그룹이라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재계에서도 꽤 유명하게 다뤄진 화젯거리다.
“어쩌면…”
어떤 성향을 띤 인물인지 몰라 그룹사 회장들은 모두 조심하는 분위기였는데.
TV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성군이 따로 없었다. 길게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이 TV 화면에 중간중간 포착됐다.
무상급식, 하루 두 끼 공급!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현하는 그의 모습은 가히 성군이라 할 수 있었다.
기업 사냥꾼, 폭탄 등등의 떠돌던 말들은 완전히 거짓된 이야기였다.
“저 사람이라면, 김정수 회장이라면…”
무너졌던 희망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임효원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수척해진 그의 모습과 다르게 몸에서 생기가 넘쳐났다.
마치 희망이 싹이 트기라도 하듯이.
곧 그는 집을 나서서 택시를 잡았다.
똑똑—
“회장님.”
노크 소리가 들리고 비서실 홍일점 남민희 대리가 서류철을 들고 들어왔다.
“결재할 서류는 여기에 놔둬요.”
그녀의 손에 들린 결재판을 가리켜 말했다.
“그게 아니라, 밖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오늘 오기로 한 사람이 있던가요?”
기억을 되돌려 보지만, 오늘 오기로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있다면 비서실에서 내게 말을 해줬을 터다.
“진영그룹 임효원 회장이 회장님을 만나길 청하고 있습니다. 만나기 전까지는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원치 않으시면 경비…”
“아니에요. 들이세요. 마침 만나보려던 참에 잘됐네요. 직접 가는 수고를 덜어서.”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고, 진영그룹 회장을 방으로 들이라 지시했다.
“미안한데, 국밥 남은 거 있으면 방으로 가져와 주겠어요. 두 그릇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본사 앞은 국밥 노점상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다.
피난민들을 받아들이는 곳은 아닌지 의심마저 들 정도로 여기저기 천막이 쫙 깔려 있는 상태였다. 국밥은 천막에서 가져올 터다.
‘내가 그의 기분을 알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거야.’
과거로 돌아오기 전, 자신도 경험했던 일이다. 배는 고프지만, 밥은 입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생각나는 건 오로지 술. 그 외는 필요 없었다.
술이 없으면 잠을 못 잤고, 취하지 않으면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탓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한다면, 목 안에 가뭄이 들었다.
턱 하고 막혀왔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어느 누구보다 밑바닥에 있는 사람과 밑으로 추락한 사람들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알았다.
“저……”
열린 문틈으로 남자가 고개를 내민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앉으세요.”
사람들은 말한다. 과한 욕심으로 벌어진 대참사라고.
저들로 인해 국가가 망하고 기업이 망했다고.
그래도 그 와중에 눈앞에 남자는 잘못된 운영을 바꾸고 고치려 했었다.
중간에 낀 골드만삭스만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진영그룹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알짜배기 진영 소주를 뺏기지 않았을 터인데.
힘 빠진 걸음으로 걸어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는 모습이 참으로 처량하다.
한때는 수백 수천의 직원들을 거느리던 사람이었는데.
정말이지 사람의 인생은 끝까지 가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허허.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그저 꼭 도움을 청하고 싶어 염치없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 예상대로 몇 날 며칠 동안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의 앞에 따뜻한 차를 건네었다.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일단 대화 전에 따뜻한 차로 속을 보하세요.”
똑똑—
국밥이 도착했나 보다.
문을 열고 남 비서가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국밥 두 그릇을 내려놓았다.
“마침 잘됐네요. 저도 식전이라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같이 드시죠.”
실은 한 시간 전 밥을 먹어 배가 불러왔지만, 난 거짓말했다. 그가 부담을 느낄까 싶어 배고픈 척 연기했다.
“아, 아니. 전 됐…”
“밥 혼자 먹으면 맛없어요. 진짜 솜씨 좋은 분이 한 요리라 참 맛납니다. 어서 드셔보세요. 정말 꿀맛이니까. 대화는 다 먹고 하죠.”
급하게 먹는 연기를 펼치다 입천장이 얼얼했지만, 티 내지 않고 먹는 데 집중했다.
날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모른 척 넘겼다. 1분 정도 지났나? 맞은편에서 허겁지겁 국밥을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타리를 한입 베어 물고 국밥을 흡입하다시피 했다.
드르륵, 드르륵. 어느새 국밥 그릇은 바닥을 보였다. 우리는 든든해진 배를 어루만졌다.
“밥도 다 먹었으니, 이제 미팅을 시작하죠. 단, 진영그룹을 달라는 말은 들어주지 않을 겁니다. 그 부분만 빼면, 들어드리죠.”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이건 이거였다.
난 대화에 앞서 그에게서 나올 말 중 하나를 사전에 막았다.
역시나, 당황하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