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시도
“회장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MBS방송국입니다. 국가재난에 대한 한 말씀 부탁합니다!”
“자수성가라 하셨는데, 어떻게 국가급 자산을 획득하시게 된 건지, 경로를 알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경제에 대해 한 말씀 부탁합니다!”
밖으로 나가자 수십의 경호원들을 압박하는 기자들이 건물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녀차별 없이 마이크를 들이밀며 내 한마디를 듣고자 갖은 애를 썼다.
“죄송합니다.”
예상된 모습이기에 그리 놀랍지 않았다. 내려오면서 보고를 듣기도 했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거절표시를 보내고, 경호원들의 보호 아래 차량에 올라탔다. 경호원들이 기자들을 밀쳐 차량이 이동할 수 있도록 길목을 텄다.
“회장님! 국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기업이 경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회장님!!”
어떻게 소식을 듣고 왔는지, 저 멀리서 너저분한 옷을 입은 인사들이 피켓을 들며 도움을 요구했다.
아무래도 내 엄청난 재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를 찾았는지 모르겠다.
‘······’
어떤 사람은 자녀까지 데리고 와 구걸을 하기도 했다.
“잠시 멈추세요.”
천천히 움직이던 차량을 멈췄다.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눈여겨봤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절망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라, 희망의 빛을 잃어갔다.
‘아니야. 어설프게 도움을······’
[국밥 한 그릇 챙겨주게]
불현듯 어르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특정 인물을 지목하지 않았다.
그저 따뜻한 국밥 한 그릇만을 언급하며, 꿈속에서 사라지셨다.
‘음, 이걸 의미하는 걸까?’
과연 국밥의 의미는 무엇을 담고 있는 걸까?
멈춘 차량에서 눈을 감고 명상하듯 생각에 잠겼다.
‘휴··· 그래. 국밥 정도야.’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누구에게 주면 또 어떤가?
세상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어도 직장을 잃고 밖으로 나앉게 된 사람들의 배를 따스하게 채워줄 수는 있지 않을까?
잠시의 고민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기름, 연탄을 준비해 최소 추위에 고생하지 않도록 지원하세요. 그리고 전국에 노점상을 열어 국밥을 만들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상급식을 실시하세요. 1년간 아이들의 식비, 학비도 지원 부탁드리죠.”
내 자리에 함께 있는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모든 걸 최상으로 지원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래, 적어도 먹는 것 때문에, 자는 것 때문에 죽는 사람은 만들지 말자.
차가운 바닥에 누울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할지라도 따뜻한 마음을 잃어가게 하지 말자.
내가 그들의 태양이 될 수 없어도, 작은 도움의 손길은 줄 수 있지 않을까?
“가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계좌에 100만 원씩 지급할 정도의 자금적 능력은 된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 사람들의 상황이 뒤바뀔까?
희망을 품고 어려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한다면 다행이지만, 반대로 지금의 환경을 바꾸려 노력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만 바라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기준 이상의 도움은 주질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역시. 이 사태를 만든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게 좋겠지? 김영진 대통령과 약속을 잡아주세요.”
기업도 기업이지만, 국내경제가 거지꼴이 된 데에는 김영진의 멍청한 운영이 크게 한몫했다. 역사가 흐르기를 잠자코 기다리려 했지만, 역시 그건 내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경호원과 용병들 대거 고용하세요. 많을수록 좋습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로 하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시를 마치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그간 신경 쓸 일이 너무도 많았다. 당진까지 도착하는 동안 한숨 자자.
창가로 가져간 시선을 옮겨 정면으로 가져가 눈을 감았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기고 조용히 호흡을 하였다.
배가 팽창했다 수축하기를 반복하기를 수어 번.
이내 정신이 뚝 끊기고, 기억이 끊겼다.
쾅! 쾅! 쾅!
침울하게 죽어가는 경제 사정과 다르게 당진 제철소는 열띤 열기를 이글이글 불태우며 공사에 한창이었다.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을 보니 먹먹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공사 인부와 건설장비를 대폭 늘렸다.
총 3조 원이 추가로 당진 제철소에 투입됐다. 부지도 더욱 확대해 세계에서 가장 큰 철강회사로 거듭나고 있었다.
“사람들 표정이 좋네요.”
“이게 다 회장님께서 만들어 주신 환경 덕입니다. 밀린 월급도 받은 데다, 망할 걱정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되니, 저리 신난 것이지요.”
현장 책임자가 손을 싹싹 비비며, 내 비위를 맞추기 급급했다. 이게 또 직장생활의 현실이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현장 주변을 빠짐없이 살폈다.
“일을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모든 직원들에게 안전 철칙을 꼭 지키라 당부하세요. 안전모 안전고리는 필수로 사용하고 노후 로프는 다 버리세요. 첫째 둘째도 안전입니다. 만약, 이곳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크게 다치는 불상사가 터지면 징계위원회를 열어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겁니다.”
건설현장에서 대부분의 사고가 추락사고에서 발생한다. 뉴스에서 나오는 사고가 대부분이 그런 종류였다.
그렇기에 그 부분에 대해 강하게 강조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공사는 2년 내 완공될 겁니다.”
“그래요. 더 늦어도 좋으니까 이상 없이만 하세요.”
이상점이 있나 확인해 봤지만,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만족한 얼굴로 다시 한번 일에 대해 강조하며 구 한보그룹 빌딩으로 향했다.
“흠.”
대회의장에 한보그룹 임원진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몸을 움찔움찔 떤다.
그들의 모습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한보그룹에 대한 계열사 정리에 들어갑니다. 이의가 있는 사람은 제 말이 끝나고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회의는 한보그룹에 맞게 변신하는 날이다. 이제 내 말 한마디에 한보는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먼저 우리나라에는 더 이상 한보라는 상호는 없습니다. KJ로 상호를 변경하고 철강 부분은 승보철강과 한보 철강공업, 철강판매를 하나로 통합하겠습니다. 이는 철강 부분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제 뜻이 담겨있다 봐주셨음 합니다.”
비슷비슷한 업종의 구분을 짓는다는 건,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하나로 합병해 철강사업의 가치를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제약, 관광, 학원은 사업에서 철수 및 매각하겠습니다.”
이제 남은 건설과 에너지.
건설은 그룹에 하나 정도는 있어도 되고, 꾸준한 수익을 올리고 있기에 철강과 함께 운영하기도 하였다.
“에너지는 매각하고 대신 주유소 사업을 시작하죠.”
난 새로운 개념으로 다가서기로 하였다. 돈이야 크게 안 될지 몰라도 국내 주유소 시장을 다 내 걸로 만든다면?
미래는 유통시장이 엄청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주어진 통장 잔고도 두둑하고.
나쁘지 않은 선택지라 생각했다.
“그런 줄 알고, 해당 기업 전부 매각에 들어가세요. 이제 한보가 아닌 KJ그룹으로서 우리는 새롭게 시작할 겁니다.”
내 운영방침을 정해 키를 잡았다. 이제 남은 건 저들이 움직여 내 뜻에 맞게 노를 젓기만 하면 된다.
“자, 그럼. 그 전에. 조직개편을 시작하죠. 조직개편에 포함되지 않은 분은 퇴사 처리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한 시험으로 제가 언급한 내용을 여러분에게 과제로 드리죠. 가장 좋은 조건으로 업무를 수행한 분 순으로 직급과 연봉협상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않고 결과만 보겠습니다. 단, 불법행위자나 실무진에게 넘기면 각오하심이 좋을 겁니다. 그럼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그동안 조직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난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고, 그 기회를 잡는 사람이 KJ그룹의 승리자로 남게 될 것이다.
***
“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은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모여 오늘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갑작스러운 발표는 모두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이번에 인원이 대거 정리된다는 거겠지요.”
계열사들이 대거 매각대상에 오르면서, 남을 수 있는 인원이 대폭 감소할 실정에 처했다. 회장은 말했다. 자신들보고 직접 움직여 결과를 내라고.
“현 시국에 나가는 것도 마땅히 갈 곳도 없습니다. 더욱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분이 운영하는 곳입니다. 만약 이곳에서 쫓겨났다면, 우리를 써 주는 곳은 없을 겁니다.”
지금 기업들은 회장의 눈치를 보기 급급했다. 엄청난 자본력을 갖춘 그에게 밉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즉, 그의 한마디면 자신들 운명은 끝이란 의미였다.
“이렇게 된 거 우리 힘을 합칩시다. 내가 매각 부분을 맡을 테니, 김 이사는 주유소를 맡아요. 뭔 수를 써서라도 누구보다 재빨리 움직여야 할 겁니다.”
사내정치로 거리를 멀리했던 두 사람이지만, 어제의 적은 오늘의 아군이 되어 하나가 되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KJ그룹에 살아남고자 하였다.
***
한국에 PC방 붐이 불었다. 스타크래프트가 상륙하고, 블리자드 브랜드가 많은 학생들과 직장인들에게 알려지면서 시장을 빠르게 키워갔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느끼며 난 미국으로 향했다.
“음, 내게 스타벅스를 한국에서 맡아볼 생각이 없는지 물었나요?”
하워드 슐츠가 내게 꺼낸 제안이다. 내게 한국 시장에 스타벅스를 운영해 볼 것을 제안했다.
난 이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며 주판을 두들겼다.
“그렇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요청하기 보다 잘 알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 요청하는 게 가장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두들긴다. 이내 달팽이관을 타고 머릿속으로 침투해 빙글빙글 돌았다.
‘미래의 스타벅스는 엄청나지. 여대에 처음 설립하게 되고 그게 점점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주변으로 확대되지.’
여대라고 지목한 곳은 바로 이화여대. 여기가 1호점으로 지정되면서 국내 커피 시장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나쁘지 않을지도. 주유소에 스타벅스를 입점시켜도 좋을지도···’
도심 깊숙하게 파고든 스타벅스는 많은 인기를 누비게 될 거다. 그리고 흐름에 맞춰 주유에도 입점을 시킨다면, 꽤 쏠쏠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을 거 같다.
초반은 역사대로 흐르게 만들고, 차츰 내가 그리는 방향으로 움직여 보자.
“좋아요. 하워드 슐츠, 당신의 뜻에 따르죠.”
그도 알 것이다. 지금 국내 시장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래서 선뜻 어떤 기업과 협력을 맺기가 불안했을 터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내가 선택되었을 거고.
“제가 뽑은 사람들을 이곳에 보내죠. 이곳에 저희 직원들을 교육시켜 주세요. 그동안 전 한국으로 가, 스타벅스에 어울리는 건물을 준비하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전 회장님께서 보내실 교육생을 받을 준비를 하겠습니다.”
예기치 않은 사업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이 사업을 빠르게 성장시킬 방법을 열심히 그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