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재벌 강림하다-20화 (20/145)

20화

#한보사태

“그렇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케빈 츠지하라 회장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왔다.

내게는 할아버지뻘인 분이 고개를 숙이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렸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란 습관이 이성을 앞섰다.

“약속한 내용은 잊지 않으셨겠지요.”

“물론이지요. 워너 브라더스 지분 10%를 드리지요.”

10%, 생각보다 많다.

겉치레로 5% 정도를 주지 않을까 했는데, 케빈 츠지하라 회장.

내 머릿속에 제법 멋진 사람으로 각인이 됐다.

계약은 길게 끌 거 없이 빠르게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사실 그렇게 복잡하고 난잡한 사항은 없었다. 전에 우리가 했던 계약에 대한 추가 사항을 넣고, 95년 당시의 워너 브라더스의 가치로 셈을 치렀다.

해리포터 영화가 역사보다 조금 앞으로 당겨졌다.

앞으로 내가 벌어들일 돈과 바뀔 미래가 몹시도 기대가 됐다. 이제 나만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터다.

***

마이클 타이슨이 WBA 브루스 셀던 챔피언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TV를 통해 흘러나온다. 1회 KO승.

가히 핵 주먹이라 불리는 인물이 아니었다.

10월이 지나 11월로 넘어가는 날.

100년을 자랑하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 다우존스 공업평균지수가 사상 처음으로 6천선을 돌파하며 기록을 갱신했다.

전날 대비 42포인트 오른 6,020선에 마감됐다.

“폐장 전에 6천 기록을 세우지 못했는데, 역사가 또 바뀌었네. 아무래도 내가 미래에 영향을 끼친 모양이야.”

본 역사는 폐장기준으로 6천선은 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은 넉넉하게 6천선을 넘는 기염을 토하며, 연신 기사를 쏟아냈다.

-66년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축구가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공동개최하는 걸로 결정됐습니다.

96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을 무렵, TV에서 2002년 월드컵 소식을 알려왔다.

한일간의 승부가 제2라운드로 접어들었다며 떠들어댔다.

“어찌한다. 한국에 달러를 좀 넣어 둘까?”

TV를 보는 둥 마는 둥, 외환위기 시점을 머릿속에 담아 정리를 해봤다.

대한민국은 97년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변화한다. 외환위기, IMF.

IMF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사람들은 먼 미래에 가서도 외환위기가 아닌 IMF가 왔다고 이야기를 했다.

나도 처음엔 IMF를 외환위기로 착각했을 정도다.

“아니야. 당분간은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자. 지금 했다간 내 돈은 엄한 곳에 사용하게 될 테니.”

97년 1월, 외환위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한 기업에서 발생한다. 막대한 부채를 떠안고, 역사를 감추는 한보그룹.

난 그 역사를 잠자코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기로 하였다.

-한보 그룹위기에 처하다. 외국증권사 직원을 불러 경찰이 수사에 나서, BZW 직원 두 명을 불러 루머에 대한 조사에 나섰습니다.

한보사태에 대한 루머가 떠돌기 시작했다. 그건 사실을 알면서도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얼굴에 철판을 두르고 은행장을 한자리에 모았다.

“다 좋다고 하는 사업 아닙니까? 당진 제철만 완공하면 그간의 부채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중앙에 자리해 연설을 늘어놓았다.

더는 자금을 지원해 줄 수 없다는 그들의 통보에 정태수 회장이 직접 나선 것이다.

“이 회사에 쏟은 자금은 3조요. 3조. 좀만 더 하면 되는데, 그걸 못 기다려요? 내가 부도내면? 그럼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정태수 회장은 모인 은행장들에게 한심한 눈빛을 보냈다.

소심한 사람들이 은행장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래서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정태수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그들을 설득에 나섰다.

“철강이 망하면 다 같이 망하는 겁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준 돈이 얼마인데, 끝까지 함께 해야지요.”

현 정부에 걸쳐 각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정태수의 돈이 흘러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을 뿌리며 은행장들의 면면을 노려봤다.

시선이 지나치며 마주할 때마다 은행장들의 몸이 움찔 떨렸다.

찔린 구석이 있으니,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끙끙 앓기만 했다.

“휴, 좋습니다. 하지만 이번이 정말 마지막입니다. 이 이상 끌고 가면 은행도 위험합니다. 그땐 정말 다 같이 망하는 겁니다.”

결국 자리에 모인 은행장들은 정태수 회장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합의를 봤다. 조건은 주식추가담보 요구를 조건부로 당진 제철소가 완공될 때까지 지원을 약속했다.

지난해 4천억을 지원한 데 추가로 1천 2억 원을 내주었다.

한보철강에 대한 금융권 여신은 4조 원에 달했다. 여기서 얼마나 더 증가할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한보철강 자금난 풀리나?!

-한보철강은 작년 12월 말 금융권에 돌아온 어음 18억 원을 막지 못해 1차 부도 위기에 몰리게 됐으나, 각 은행에서 손실을 줄이기 위한 처방으로 부도를 모면했다. 한편 채권단은 이를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총부채 5조 원에 추가로…

“은행이 멍청한 건지. 쩝.”

뉴스에서 떠드는 소리에 혀가 쯧쯧 차졌다.

뭔 희망을 품고 저리 돈을 퍼 준 건지. 당최 이해되지 않은 짓거리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까? 단 이틀도 가지 못하고 한보그룹의 역사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때가 내가 움직일 타이밍이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나라 재벌기업 14위에 이르는 기업이다. 내가 들고 있는 기업과 비교하자면 개미의 때도 안 될 규모이지만, 한국에서의 사정은 달랐다.

저 회사가 무너지면. 국내 기업은 도미노 부도로 이어진다.

금고에 돈이 없던 은행은 돈을 회수하게 되는데, 고작 1억 2억을 갚지 못해 부도에 직면한다.

“여보세요. 접니다. 케이.”

수화기를 들어 영국에 있는 베어링스 그룹 대표실로 연락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제임스 제임스 맥어보이 대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50억 달러 준비해서 한국으로 오세요.”

2차로 마이크로 소프트, 3차로 인텔에 연락해 자금을 모으라 지시했다.

총 자금은 120억 달러.

약 10조 원 규모의 자금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이틀이 지난 1997년 1월 23일.

정태수의 주식포기각서 제출 거부와 동시에 한보철강은 부도처리 됐다.

XX은행의 어음 15억을 막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쉬이이—

“모두 잘 왔어요. 한국은 처음이죠?”

며칠 뒤, 영국과 미국에서 마이크 소프트, 인텔, 베어링스 은행 총 책임자들이 내 말 한마디에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한국으로 날아왔다.

셋을 포함한 수행 요원들이 내게 인사를 했다.

주변에서는 무슨 일인가 싶어 웅성거렸으나, 이들을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힐끗힐끗하는 시선을 느꼈지만, 그냥 넘어갔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지냈다 쇼핑에 나설 거예요.”

“쇼핑…?!”

내 쇼핑이라는 말에 셋 다 멍청한 시선을 보냈다.

120억 달러를 챙겨왔더니, 이 돈으로 쇼핑을 한다고 하니, 표정들이 참으로 재밌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세요. 제가 할 건 어디까지나 기업 쇼핑이니까요. 아마 저렴하게 건지게 될 겁니다.”

“요즘 회장님 별명이 뭔지 아십니까?”

빌 게이츠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제임스 맥어보이 대표가 내가 붙어 조용히 속삭였다.

“저요? 제 별명이 있었나요?”

공항 게이트 앞에 한 대 뽑은 버스가 대기 중이다.

의자를 소파로 바꿔 캠핑카 분위기를 낸, 내 전용 차였다.

역시 작은 차보다 큰 차가 좋다.

난 버스 위로 올라타며 물었다.

“기업사냥꾼이라 불립니다. 폭탄이라고도 불리지요. 호, 이게 회장님 전용차인가 보군요. 역시 스케일이 남다르십니다.”

“음.”

기업사냥꾼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한데, 뒤에 붙은 폭탄이 썩 와 닿지 않았다.

“이대로 팔아도 돈 좀 벌겠군요.”

그것도 모르고 제임스 맥어보이는 버스의 인테리어를 살피며 흡족한 얼굴로 자리 한켠을 차지했다.

‘뭐, 내가 한 짓이 있으니. 받아들이자.’

난 이들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향했다.

“여기가 회장님댁인가요? 엄청 검소하게 사십니다.”

검소하게 보일지 모르나, 아파트 한 동이 내 집이다. 난 최상층에 살고 그 아래층으로는 경호원들이 지내고 있다. 저들도 가족이 있는데, 24시간 나를 지키고 있게 하기 뭐해 아파트 한 동을 사고 경호원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혼자 사는 데 불편하지는 않아요. 살 만합니다. 오느라 출출할 텐데 식사하죠.”

“오!”

“기대됩니다.”

“음.”

내 식사 소식에 꽤 출출했는지, 셋 다 좋아한다.

“전 짜장을 먹죠. 대표님들도 고르세요.”

“……”

“……”

“……”

내 한마디에 셋 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하-아—

한숨이 방 안의 공기를 탁하게 만들며 전염되듯이 주변으로 퍼져갔다.

하아.

함께 자리한 사람들까지 길게 한숨을 밖으로 내보냈다.

“무려 5조가 넘어요. 이대로 가다 간 피해금이 더 불어날 겁니다.”

자신의 돈이 아니라고 막 쓰기 시작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

그 결과는 은행의 금고를 탈탈 털어 빈 통으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가 벌인 일을 누구를 탓하겠냐 하지만, 한보가 무너지면 정말로 모은 게 끝장입니다. 한보에 들어간 돈이 우리만이 아닙니다.”

부도 처리된 한보철강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기업과 개인투자자들의 피해는 곧 은행의 피해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회수할 대출자금이 사라지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 이상 내려가면 투자자들의 원금은 모두 사라지는 샘.

은행 또한 자금난에 시달려, 파산을 면치 못하게 된다.

“어쩔 수 없군요. 법정관리신청밖에 수가 없어 보입니다.”

“별수 없지요. 돌아오는 기업들 만기 또한 연장 없이 회수를 해야겠습니다.”

은행장들은 올해 어음만기에 대해 미루지 않기로 협의하는 한편, 한보그룹에 대한 법정관리신청을 하기로 내부적으로 합의를 봤다.

“항간에 한보철강에 대한 특혜논란이 있는데, 이에 대한 답변 부탁합니다!”

밖으로 나서자, 기자들이 쫙 깔렸다. 은행장들은 불편한 시선을 보내며 시선을 회피했다. 수행원들의 도움을 받아 기자들 틈을 비집고 차량에 몸을 실었다.

기자들은 차량이 움직이자, 차량에서 거리를 벌렸다.

“한보 측에서 주식포기를 수용키로 하겠다 합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주변을 에워쌌다. 찌푸린 표정으로 멀어져가는 차량을 지켜보던 기자들은 막 들려온 목소리에 걸음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동안 거절하던 주식포기각서를 제출하기로 한 것이다.

주변은 순식간에 정리돼, 그 많던 기자들이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한보철강은 누가 인수할 것인가?

-부채가 4조 원 대로 추정되고 있는 가운데, 지급보증으로 얽혀 있는 계열사들이 일괄 인수될 경우 규모가 커질 것으로 판단돼, 인수할 만한 기업이 매우 한정적이다. 육성, 엔지, 미래, 대진, 포철 정도가 전부다.

다음 관심사는 한보그룹을 누가 인수하느냐로 옮겨졌다. 하지만, 지금 시기에 한보그룹을 인수할 만한 기업은 찾아보기 힘들 터다.

육성은 반도체에 쏟아붓는 자금으로 상당한 부담을 느낄 거고, 포철은 한보철강에 고로제철소라는 점에서 수익성을 기대할 수 없다 판단해 한발 물러난다.

엔지그룹은 적자기업을 정리 중에 있어, 수익성이 떨어질 걸로 보이는 한보철강 인수작업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자, 그럼 나밖에 없지. 자 들어가죠.”

시끄러운 23일이 지나고, 난 미국과 영국의 재벌을 이끌고 제일은행 건물로 들어갔다. 기자들이 포진해 우리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냈지만, 싹 무시했다.

“제가 연락한 김정수입니다. 한보그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러 왔습니다.”

국내 사업의 시작을 한보로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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