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좌초
집으로 돌아왔다. 열흘만 나가도 고향이 얼마나 보고 싶은지 모른다. 몇 달 몇 년간 해외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은 고향이 얼마나 그리울까?
나가면 고생한다더니, 먹는 걸로 고생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다음엔 김치를 싸 들고 가든가 해야지.”
내게 있어 해외는 딱 처음만 좋았다. 그 후는 지옥의 연속이라 할 수 있겠다.
살아생전 김치가 그렇게 그리워질 날이 올 줄이야.
외국이 싫어지려 한다. 환상도 깨졌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까?”
투정도 잠시, 내 생각의 주제가 바뀌었다. ‘돈’으로.
지금 버뮤다 군도에 있는 케이 컴퍼니. 그곳에 내 재산 전부가 들어가 있었다. 한국에서 당첨된 복권수익만 빼고.
“음.”
1995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생각했다.
삼풍 백화점이 붕괴된 그 이후를.
삼풍 백화점은 단 한 명의 사상자 없이 붕괴됐다. 연일 뉴스는 해당 기사를 쏟아 내느라 바빴다.
이준 회장은 300억 원이 넘는 돈을 뱉어야 하였고, 삼풍그룹은 명맥만 간신히 유지 중이다.
곧 망할 거라 사람들은 내다봤다.
“아, 이때부터였지. 국제유가가 매년 2달러씩 떨어졌던 시기가.”
원인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가장 큰 요인으로 떠오르는 건 내년 초 UN이 이라크의 석유금수조치를 해제한다는 부분이었다.
지금은 1995년 7월.
얼마 남지 않았다.
“1월에 들어서면 파생상품을 생각하면 될 거고. 그로 인해 이득 볼 기업들을 떠올려 보자.”
자, 유가가 떨어지면 수혜를 보는 업종이 어디일까?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항공주가 좋겠어.”
국제유가가 떨어지면 역시 혜택을 누리는 곳은 운송업종이다. 기름값이 떨어지는 만큼 운반비가 적게 들 터이고, 그건 이익으로 돌아설 거다. 중국과 동남아 등 항공수요도 증가해 수익도 향상될 터.
“내 자금도 일부 운송업에 투자하자. 그리고…”
내년에 주가지수선물 시장이 개설된다. 유가증권, 시가배당제가 도입돼 우량주를 골라 투자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지라 봤다.
“정보통신 사업과 기업인수합병 관련 주도 나쁘지 않지. 과거로 오니 좋구나.”
전생에선 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살았다.
경제는 꾸준히 성장한다. 증시 경제지표를 보면 알 수 있다.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모를 뿐이지, 꾸준한 상승선을 탔다.
“재테크의 필요성을 너무 늦게 알았어.”
그저 예금을 통해 안정된 자산을 유지할 생각만 했지, 투자는 무서워서 하지 못했다.
주변에 잃었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탓이 컸다.
그러다 휴짓조각 주식을 가지고 다니다 탈탈 털리기도 했고.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재테크를 했던 사람과 예금만 해 놓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자산 차이가 급속도로 차이가 나게 돼.”
나보다 돈을 가지고 있지 않던 사람들이 내 자산을 짧은 시간에 추월한 걸 봤을 때는 배가 아프기도 했다. 그때 재테크의 중요성을 확 깨달은 바 있었다.
기업가치주를 중심으로 하여 투자를 한다면, 손해 볼 확률이 적었다. 그럼에도 손해를 보는 이가 있기는 했지만…
“외환위기로 기업들이 망하면서, 한강으로 뛰어든 사람들도 많았지…”
기업이 망하니 주식은 똥 닦는 휴지보다 못한 가치가 되었다.
연달아 도산하는 기업은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심어 주었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은 한강으로 향했다.
한강은 요단강으로 변해 사람들을 반겼다.
“… 그중 한 명이 나였고. 다시는 그때처럼 멍청하게 살지 않아.”
씁쓸한 기억이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그럼 내 돈을 불려 줄 첫 일은 뭐가 있을까?”
심해 깊숙이 박혀 있는 기억들을 하나둘 끄집어냈다. 그중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정보들을 종이에 빠르게 써내려 갔다.
-기름유출.
“이건?!”
그러다 하나의 기억에서 생각이 멈췄다.
머릿속으로 올라오는 정보를 종이에 적었다.
-유조선 좌초, 원유 61만 배럴.
-5천 톤 원유유출. 전남 여천군 소리도 북동쪽 1.5km…
“이거다!”
찾았다. 가장 쓸 만하고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을.
나는 빠르게 사건을 정리한 후 계획을 짜내려 갔다.
마치 머릿속에 사양이 높은 컴퓨터가 장착돼있는 것처럼, 나의 손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좋아. 정보통신사업, 제철, 전력에 투자하고, 손보에 공매도를 걸자.”
계획이 대략 짜여졌다.
이제 움직이는 일만이 남았다.
***
뿜뿜—
뱃고동 소리가 울리며, 유조선이 바다를 가른다.
61만 배럴을 싣고 한국으로 향하는 거대한 유조선은 힘차게 물살을 쭉 긋고 전진했다.
“선장님 곧 소리도에 접어듭니다.”
긴 항해로 지친 선원들이 남자의 목소리에 지친 얼굴을 활짝 폈다.
이제 땅을 밟을 수 있다 생각하니 노곤하던 몸이 확 풀어지는 기분이다.
“육지만 보면 설레니, 허허. 마치 애인이라도 보러 가는 기분이야.”
“하하. 주책입니다. 선장님.”
곧 육지에 다다른다 생각해서일까? 모든 선원들은 무척 들떠 있었다.
그간 먹지 못했던,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갔다.
쿵—!!
그때였다. 배가 무언가에 강하게 부딪혀 크게 흔들렸다.
“무, 무슨 일이야?!”
잠시 마음을 놓고 있던 선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암초에 걸린 거 같습니다. 무, 물이 들어옵니다.”
“어서 구조신호를 보내! 어서!”
콰아아—!!
이어서 거대한 폭발 소리가 들려왔다. 창 너머로 보니, 검은 연기가 하늘 위를 뒤덮고 있었다.
“기, 기관실이 파손되면서 모든 기능이 상실됐습니다.”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강한 바람으로 배가 경로에서 이탈했습니다.”
연달아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모든 기능을 상실한 배는 작동이 멈추면서, 강한 바람에 떠밀려 5마일 정도 서쪽에 위치한 소리도 부근에서 좌초했다.
우왕좌왕하던 선원들은 선장의 지시를 받아, 신속히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통하지 않았다. 배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배에서 탈출하는 일이 전부였다.
-씨프린스호 전남 여천군 소리도 1.5km 지점에서 암초에 걸려 좌초.
-선원들은 소리도로 피신한 상태이며, 20명 중 1명은 실종돼 해경이 수색에 나섰습니다. 벙커씨유와 원유가 유출돼 양식장 피해가 우려됩니다.
“이걸 좋아할 수도 없고. 참 난감하네.”
TV 화면에 바다 위로 둥둥 떠 있는 검은 기름이 보인다. 어민들의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으로 보였다.
미래를 알고 있었지만, 이를 설명할 길이 없어 내버려 두었는데.
막상 TV로 접하니 미안한 감정이 강하게 들었다.
“이번에 벌어들인 돈으로 어민들에게 보상하자.”
마음이 아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저들에게 약간의 돈을 주어, 아픈 마음을 달래어 주자.
-XX해운에 전남 여수시 주민들 피해보상 신고 잇따라…
-XX해운은 4천4백억 원 상당의 해양, 인명피해보상이 가능한 세 가지 보험에 가입돼 있습니다. 금일 한국 보험사인 XX해운 직원을 파견해 피해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국내를 떠나 세계의 언론들은 씨프린스호 좌초에 관심이 모아졌다. 외국 기자들도 모여 해당 사실을 각국에 알렸다.
미국, 중국, 일본 할 것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원유유출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가운데, 세 가지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인선으로 사고지점에 끌어내는 방안, 원유만을 이동하는 방안, 원유를 사고현장에서 태워 없애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여기서 유력한 선택지는 씨프린스호 기관실 손상으로 바지선을 이용해 수중 펌프를 이용해 옮기는 쪽으로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해운사는 해양오염을 막기 위한 긴급대책회의에 들어갔다.
하지만, 뚜렷한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너무도 많은 기름이 유출됐고, 피해 범위가 너무도 컸다.
심지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풍주의보까지 떴다.
-유출된 벙커C유를 제거하기 위하여 15톤의 유출제를 한 번에 공중에 투하할 수 있는 수송기가 캐나다에서 도착할 예정입니다.
유출제는 기름 찌꺼기를 바다 아래로 가라앉게 만드는 화학성분제다.
“아, 안 돼! 저건.”
멀리 존재했던 기억이 성큼 다가왔다.
하나의 기억이 머릿속을 떠다니다, 정착했다.
-“기름이 없어지는 건 줄 알았지, 가라앉아 남는 건 줄 몰랐지. 어휴. 조개며 소라며 껍데기만 있지 속은 녹아서 없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냐.”
-“어종이 확 줄었어요. 피해가 더 커질 줄 몰랐죠. 어선이 50척에서 30척으로 줄고, 마을 사람들은 다 떠났어요.”
-“황금어장은 이제 옛말이죠. 예전이야 어선 한 척에 5천만 원어치 올렸지… 지금은…에휴.”
소리도 주민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들의 피해, 울음, 절망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하, 내가 나선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음… 휴. 할 수 없지.”
이건 완전 오지랖이 확실하다. 내게 어떤 이득도 없는 그런 일.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들의 아픔이 내 가슴에 강렬하게 각인됐다.
“기사님, 여수까지 더블.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통장에 돈이 두둑이 있는 데다, 공매도로 벌어들인 수익 쏠쏠하다. 택시를 타고 여수까지 질리도록 왕복할 돈은 충분.
난 급한 걸음으로 여수로 향했다.
“꽉 붙들고 계세요. 손님!”
돈의 힘은 기사의 심장을 강하게 만들어 줬다. 엑셀이 깊이 눌리며, 총알처럼 앞으로 쏘아져 갔다.
그래서 총알택시인가 보다.
“도착했습니다. 손님.”
“나머지는 팁입니다. 빨리 와줘서 감사합니다.”
요금은 물어보지 않았다. 수표 몇 장 건네고, 택시에서 내렸다.
-XX해운은 보상하라!
-어민생계 위협, 살길을 마련하라!
도착하니 마을이 어수선하다.
나무판자에 써진 글씨들을 보며 마을 중심부로 향했다.
“곧 유처리제를 수송선에 실어 뿌릴 겁니다. 배를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도 유처리제 나눠드릴 테니 도움 부탁드립니다.”
공무원으로 보이는 자가 마을 사람들 중심에 서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마을 중심부로 접근할까 하다, 발길을 돌렸다.
“내가 나서기에는 좀 그렇고. 변호사를 끼자.”
막상 저들 사이에 나서려 생각하니, 걸음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결국 발길을 돌려 변호사가 있을 시내로 향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여서 그런지, 무척 피곤하다.
40대 중순으로 보이는 남자가 점잖게 일어나 다가왔다.
나는 휘청이려는 몸뚱이를 간신히 부여잡고 자리를 잡았다.
“대리인을 부탁하러 왔습니다. 수고비로 계약금 천만 원, 성공수당으로 2천 드리죠,”
난 그를 보고는 대뜸 대리인을 요구하며, 액수를 불렀다. 그만큼 지금 상황은 무척 시급했다.
다른 생각을 더 이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훗날 발생할 문제는 그때 가서 풀면 그만이다.
“살인 청탁과 같은 불법적인 요소가 아닌 정당한 의뢰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의 이름은 박민철.
그와의 인연이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지만, 꽤 느낌이 좋은 사람이었다.
“걱정 마시길. 의뢰는 무척 정당하고, 변호사님께도 상당히 좋은 의뢰라 봅니다.”
자리를 잡은 그를 보며, 내 설명은 이어졌다. 소리도에서 발생한 사건을 시작해 지금 공무원이 벌일 일들을 쭉 이야기했다.
“그래서 제 의뢰는 마을주민들을 선동해 유처리제 사용을 막아 주세요.”
“대안이 있으십니까?”
무척 궁금할 터다. 유처리제 없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네.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절 도울 만한 인부를 소개 부탁드립니다. 입이 무겁고 일 잘하시는 분들로.”
적어도 유처리제보다는 날 것이다.
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그 정보대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