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 239화빛과 그림자(3)
* * *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돼.”
“테라포밍 기술은 행성 이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기술인데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이냐.”
“말했잖아. ‘데모버젼’이라고.”
“데모버젼?”
“체험판같은 거라고 보면 돼. 이게 어떤 거다 하고 찍먹만 할 수 있게 설정해놓은 거라 기능은 확인 가능해도 그 이상은 뽑아낼 수 없어.”
“분해해서 역설계할 수도 있잖아.”
“내가 거기까지 생각 안했을까봐?”
엘리스는 언제 꺼냈는지 냉장고에서 파인트 사이즈 하겐다X를 꺼내 떠먹기 시작했다. 섀넌과 나는 자연스럽게 스푼을 챙겨 함께 자리 잡았다.
“어떻게 했는데, 엘리스?”
“언니, 들어봐봐. 내가 바보는 아니잖아.”
“그렇지. 헙. 음, 맛있다. 근데 이거 무슨 맛이야?”
“다크 초콜릿 가나슈& 아몬드 맛. 맛이 중요한 게 아니고. 분해하기 어렵게 밀봉을 시켜놨는데 그래도 분해를 하려고 한다? 분해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내부에서 발화하도록 설정해놨기 때문에 눈앞에서 화르륵하고 없어지는 거지.”
“킥킥킥. 연구원들은 어이없겠네. 이건 무슨 오버테크놀러지인가 싶어서 까보고 싶었을텐데.”
“그럼 치프는 어떻게 해야겠어?”
“제프한테 가서 ‘죄송합니다. 연구하던 게...불타서 알아서 없어졌습니다.’ 하고 했겠지.”
“그렇지? 크크큭. 아, 천천히 먹어!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어, 듣고 있어.”
우린 어느새 제프 머스크에게 줬던 테라포밍 기계는 잊어버리고 서로 남은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각자 한손으로 아이스크림을 꼭 부여잡고는 경쟁적으로 바닥까지 파헤쳤다. 후식까지 먹고선 간만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는데 엘리스가 나에게 폰을 들고와서 건네주었다.
“왜? 누구한테 전화왔는데? 제프?”
“제프는 아니고. 한번 받아봐. 재밌을거야.”
여보세요? 누구시죠?
전화하는 사람이 이정후 맞나?
전화를 받고 들려오는 음성은 한국어가 아니라 약간 중국억양이 느껴지는 영어였다. 마이크 부분을 막고선 엘리스에게 물었다.
“뭐야, 국제전화야? 이거 스미싱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니까 계속 통화해.”
“쓰읍. 누군지 말도 안하는데... 말투도 드럽게 싸가지 없어.”
“그 인간이 좀 그렇긴 하지.”
나는 엘리스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엘리스의 어서 받으란 손짓에 억지로 마이크 부분을 다시 오픈했다.
이봐! 전화하는 사람 어디 갔나? 이 몸께서 귀중한 시간을 내서 통화하는데 말이야.
듣고 있습니다만. 전화하시는 분 매너야말로 그렇게 좋으신 것 같지 않네요. 제 어머니는 전화를 걸면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무슨 용무로 전화를 했는지 먼저 밝히라고 했는데 그쪽 부모님은 그런 건 가르쳐주시지 않았나봐요.
뭣이?
하하, 겁이 없는 인간이라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군. 내가 누군지 알려주지. 황해 그룹의 회장 시저우룬이다.
시저우룬? 엘리스, 시저우룬이 누구야?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스피커만 막은 채로 옆에 엘리스가 있었음에도 영어를 사용하여 큰 목소리로 물었다.
“삼합회 회주.”
“삼합회 회주같은 게 아니라 황해 그룹 회장이라는데?”
“아저씨, 뻔하잖아. 위장용이지.”
“쓰읍, 깡패 새끼랑 하고 싶은 말 없는데.”
막은 스피커임에도 발작하듯 소리치는 중국어가 들려올 지경이었다.
이봐, 영어로 해. 중국어로 뭐라고 떠들어도 이쪽은 못 알아먹는다고. 중국어는 글로벌 스탠다드가 아니잖아.
한차례 더 발작이 있더니 그래도 회주라고 짬밥을 뒷구멍으로 먹은 것은 아닌지 순식간에 침착해졌다.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닌가?’
방금 전까지 화내던 사람의 음성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서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분노를 슬며시 드러냈다.
내 앞에 있었으면 그따위로 떠들지 못했을 것 같은데. 아무튼 이 몸은 이럴려고 전화한 게 아니야. [방쯔].
마지막 단어를 옆에서 들은 엘리스가 굳이 욕이라는 걸 확인해줬다. 나는 슬슬 열이 올라 일부러 더 긁었다.
그래, 그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
후우...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하지.
‘이 인간, 대부를 너무 열심히 봐서 심취한 건가.’
여태껏 보여준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를 깐 시저우룬은 이탈리아 마피아 흉내를 내면서 거드름을 피웠다.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세상엔 룰이라는 게 있어. 여러 사람이 모여서 살다 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지켜야 하는 암묵적인 룰 말이야. 근데 자꾸 그쪽이 그걸 어기는군. 적을 많이 만들어서 좋을 게 뭐가 있겠나.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 사내답지 못하게 무슨 여자 앞에서 처음 고백하는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뭐 이렇게 수줍어 하고 그래?
으드득. 자네의 기업이 가진 기술에 우리가 자본을 대도록 하지. 이 대국에서 더스트 사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우리의 [꽌씨]를 활용해서 지원해주겠다.
꿀을 바르는 척 어찌어찌 떠들고는 있지만 내게는 독이 잔뜩 스며든 당의정(???)으로 느껴졌다.
어이구, 이거 너무 고마워서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것만 같아
소국의 기업이 아무리 잘나봤자 중국이라는 대국에 와서 자리를 잡기 쉽지는 않을 거야.
근데 이거 어쩌나?
뭐?
난 이게 꼭 스미싱같아. 그쪽 중궈들이 열심히 사는 우리 한국인들을 뒷통수치는 스미싱. 난 황사머니? 별로 안 필요해. 그런 거 없어도 잘 살아. 아니, 오히려 지금 내 친환경 기술이 필요한 건 그쪽 중국이잖아. 재생에너지 100%하곤 한참 거리가 먼 덕분에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밀려나게 생긴 건. 더구나 요즘은 인건비로도 동남아 국가들에 밀린다지? 급한 건 그쪽 아닌가? 거래의 균형추를 심하게 잘못 잡은 것 같은데.
주저리주저리 뚫린 주둥아리라고 잘도 떠드는구나. 내 앞에 있었다면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조아린 채 오줌을 지릴 주제에.
별로 더 이상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끊도록 하지. 더 할 말 있나?
마지막 기회를 놓친 거다. 나중에 지금을 후회하지 말도록. 다음에 얼굴을 볼 때도 그렇게 당당할지 기대해보마.
행운을 빌지. 그리고 사기는 니들끼리나 치고 살아. 엄한 한국인들 끌고 들어가지 말고.
뭣! 이 [가오리방쯔]가!
뚝
“인마, 부들부들하면 부들거리는 쪽이 지는 거야. 적 입장에선 최고의 찬사라고.”
욕이 터져나올 순간에 일부러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한마디 후기를 남기자 엘리스가 키득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웃기는 인간이지?”
“거래의 기본도 안 된 인간인가. 뭘 얻어가고 싶으면 지불해야할 값어치 정도는 제대로 계산부터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동안은 전화만 걸어도 알아서 기는 놈들만 만났을테니까. 당하고도 밀접한 인간들이 무력까지 쥐었는데 뭐가 무섭겠어.”
“그런가? 근데 이 인간 꼭 암살자라도 보낼 것처럼 떠들더라.”
“흐음, 그럼 그게 이건가?”
“응?”
“하아, 갑자기 여긴 뭐하러 온 거야. 정후야.”
“엄마, 그동안 고생 많으셨잖아요. 아들이 어머니 푹 쉬시라고 풀패키지로 쏘는 겁니다.”
“에휴, 뭐...좋긴 좋다만.”
“아들이 챙겨주면 고맙지 뭘 그렇게 거부하고 그래. 아들, 나는 여기 진짜 마음에 든다.”
“그쵸?”
바다가 탁 트인 곳에 지어진 별장에서 바라보는 뷰는 부모님 눈에도 퍽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두 분이 그렇게 정경을 감상하시게 하고 슬쩍 빠져 나오자 지후가 말을 걸었다.
“형, 뭔데 이렇게 급하게 여기로 오라고 한 거야.”
“잠깐만 여기에 있어.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래.”
“위험한 거야? 내가 뭘 도우면 될까?”
“아니야. 그런 거. 너까지 도울 일도 아니야. 그냥 잔잔바리.”
“그래?”
지후는 차분하게 말하는 정후의 눈빛에서 10대 때나 봤던 분노가 담긴 광기를 슬쩍 읽었기에 형에게 걸린 인간들에게 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건드릴 게 없어서 우리 형을 건드리는구나. 그것도 소드 마스터인 양반을.’
무엇이든 베어버리고 마치 에너지 입자포를 쏘는 것처럼 날려대는 형의 강환의 파괴력은 이 세상에서 엘리스와 섀넌을 제외하면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강기로 만든 막은 미군의 살인드론에서 발사된 헬파이어 미사일로부터도 안전할 거라는 게 엘리스의 평이었으니 지구 상에서 형에게 해를 입힐 인간이 과연 있을까 싶었다.
자신에게 부모님을 부탁하고 떠나는 형의 뒷모습에서 활활 타오르는 열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여긴 괜찮나? 괜찮으니까 여기에 있으라고 한 거겠지?”
가족들을 아다만티움으로 골조를 세우고 패닉룸을 만든 뒤 그 위에 엘리스의 마법을 덕지덕지 덧발라 핵미사일로부터도 안전한 방공호와 다를 바 없는 공간에 모셔놓은 나는 엘리스와 함께 다른 공간에 있었다.
“여기에 있으면 온다고?”
“대놓고 SNS에 올려놓기까지 했으니 알아서 네비 찍고 오지 않겠어?”
엘리스는 개인의 정보를 자발적으로 인터넷 상에 남겨놓는 SNS는 사진을 통해 그 사람이 어디에 갔는지 혹은 무얼 좋아하는지 등등에 관한 많은 개인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고 했다.
“본인이 연예인이라든가 인플루언서라 스스로를 알림으로써 영향력을 넓히고 수익을 만들 게 아니라면 굳이 자잘한 정보같은 걸 SNS에 노출할 필요는 없지. 기업 입장에선 얼마나 좋겠어. 고객께서 친절하게 스스로 개인이 어떤 기호를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아서 떠들어주는 SNS라는 게. 국가 입장에서는 이만한 소스도 없어요. 스마트폰 하나만 추적하면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담겨서 일하기가 얼마나 수월한데.”
“그래서 니 말 듣고 나도 요즘은 SNS는 기업 이미지 메이킹 용으로만 쓰잖아.”
오너의 SNS 활동이 오너 리스크로도 작동할 수 있는 사례가 많아 문제가 되는 경우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에겐 엘리스가 있는 덕분에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우리 회사 더스트는 그런 오너 리스크같은 게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날 통화를 마친 후 엘리스는 나를 추적해서 찾아오는 집단들이 있음을 밝혔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 우선적으로 대피시키기로 하고 준비된 공간으로 유도하게 하자는 것이 엘리스의 계획이었다.
“이거 꼭 미끼가 된 기분이라 별로 좋지는 않은데.”
“헤에...아저씨가 미끼라고? 요즘은 흰 긴수염 고래를 미끼로 쓰나?”
“내가 그렇게 크진 않잖아. 내가 최강도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동물인 흰 긴수염 고래는 최대 몸길이만 무려 33미터 이상에 무게는 200톤 이상이나 나가 인간이 만든 무기 말고는 해할 상대가 없는 최강자였다. 나는 엘리스의 말에 순순히 동의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그랜드 마스터에 다다랐다고는 하지만 엘리스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다고 한들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는 게 최대지.’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엘리스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가장 아끼는 나의 딸이었고 그녀도 나를 진심으로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두려움은 느끼지 않았다.
“아저씨, 슬슬 다 온 것 같은데? 언니, 준비됐어?”
“흐음, 초대장도 안 돌렸는데. 무례하게 파티에 참석하다니. 못 배운 녀석들이다. 그치?”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아직도 못 깨달은 인간이 있나봐.”
우리 셋은 정장으로 빼입고 각자가 주로 쓰는 무기를 들고선 별장의 입구를 향해 다다르고 있는 용병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로 해서 못 알아먹으면.”
“몸으로 이해를 시켜줘야지.”
내가 엘리스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 엘리스와 섀넌이 킥킥거리며 아저씨가 말하니 좀 이상하게 들린다고 웃어댔다.
“왜?”
“뉘앙스가...좀. 야하네.”
“섀넌!”
“음, 난 아닌데? 언니.”
“이 배신자.”
“음란마귀는 음란한 사람 마음 속에 있는 거야. 언니.”
우리가 일부러 뻔히 보이는 공간에 있었음에도 불청객들은 별장의 정문으로 들어오기 전에 연기가 터져 나오는 선물로 서프라이즈를 제공하려고 했다.
“내 타입의 선물은 아니네.”
거대한 메이스를 양손에 하나씩 든 엘리스가 말을 마치고 내 옆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