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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1화 〉 231화­아브락사스 (231/239)

〈 231화 〉 231화­아브락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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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는 시시비비가 발생하여 서로 약간의 물리력이 동반되긴 했지만 나름 대화가 잘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나온 말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롯이 자신만을 향한 협박이 아니라 아무런 방어능력이 없는 부모님과 동생을 비롯해 자신의 주변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왜 당사자 간에 발생한 일에 대해 당사자들끼리 합의를 하자거나 해결을 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관련 없는 이들을 끌고 와서 협박을 하는 건지도 납득할 수 없었지만 저쪽이 가장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지금 우리를 협박하겠다는 건가?”

이전의 취업도 못하고 차원이동능력을 소유하지 못했던 자신이었다면 이런 협박을 받았을 때 개인적으로 굴욕감을 느끼고 분노를 하긴 했겠지만 상대방의 힘에 굴복하고 먼저 고개를 숙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차원이동능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아주 말귀를 못알아 먹는 건 아닌가봐? 미 정부의 자산은 있던 곳에 고이 모셔놓고 잘못을 사죄하면 정상참작은 해주지.”

스탠은 삿대질을 하면서 화를 내는 루아르의 모습이 분명 그럴 리가 없음에도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근처에서 휘발유를 가득 담은 말통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던 일로 해주겠다도 아니고 정상참작을 하겠다는 것은 처벌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미...미쳤어...미친 거야.'

“흠, 협박이라...참 오랜만인 것 같은데. 어떻게 나머지 3명도 똑같은 생각인가?”

“난 보류.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서로 감정적 대응을 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 같군.”

옆에 서 있던 케이터는 자신은 빠지겠다면서 양 손을 들어올리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루아르의 옆에서 한발짝 비켜섰다.

“케이터의 말도 맞는데 말이지. 이런 생각도 드네. 51구역의 인원과 시설이 고작 남자 하나와 여자 2명밖에 안되는 3명을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하는 거. 21세기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고작 칼과 쇠방망이와 활을 든 구시대의 무기를 든 민간인들로는 더더욱.”

헤터가 턱을 치켜 세우며 루아르의 옆에 나란히 섰다. 이 모습을 본 마치는 상대방이 대화를 할 의향이 있는데도 어릴 적에 지겹게 봐왔던 폭력을 보고 싶지 않다며 케이터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 친구들이 많이 놀랐나보군. 하지만 금방 생각이 바뀔 거야.”

루아르는 영국출신의 헤터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 것에 내심 살짝 놀랐지만 굳이 드러내지 않고 비상벨을 듣고 시설 내에 있는 출동한 무력집단의 뒤로 천천히 걸어가 섰다. 자신은 머리를 쓰는 사람이니까.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은 쌍방의 합의가 있었던 거야, 스탠.”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 것이라 생각했는지 오들오들 떨고 주저앉은 스탠의 어깨를 툭툭 친 엘리스가 스탠으로부터 멀찍이 서서 메이스를 들어올리는 순간 루아르와 헤터의 지시가 떨어졌고 방금 전까지 경비대가 고무탄을 쏘던 것과 다르게 5.56mm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엘리스가 총알 정도는 가볍게 막아주는 방어마법을 자신을 비롯한 세명에게 걸어놨기에 가까운 거리에서 쏟아지는 5.56mm탄 따위가 1800j 정도의 에너지로 세 사람의 몸을 뚫고 지나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상대방은 자신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는 방패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상대방을 해할 수 있는 무기가 있는 측과 상대방은 자신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기껏해야 방탄복 수준의 방어구밖에 착용하지 않은 집단의 대결의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아무리 숫자의 차이가 수십배의 차이가 난들 마스터와 엑스퍼트 그리고 인간을 뛰어넘은 한 존재의 앞에선 양떼 앞의 호랑이가 보일 법한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수없이 잔상을 남으면서 앞으로 돌격하는 엘리스와 정후 그리고 뒤에서 활을 통해 총과 다를 바 없는 살상력을 보이며 난사되는 화살의 조합이 보이는 파괴력은 경비대원들과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고무탄을 쏘던 경비대원들과의 대결에선 기껏해야 경비원들의 총이 망가지고 뼈가 부러지는 정도가 최대의 피해였다면 상대방을 죽이기에 충분한 실탄을 사격하는 무력집단이 받은 피해는 같을 수가 없었다.

“마...막아! 저것들을 막으란 말야!”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마치 레이저가 움직이듯 기이한 빛을 내뿜으며 정후의 칼이 지나가면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는 누군가의 손가락이 우수수 잘려나가거나 총기와 함께 팔목이 잘려나갔고 정후의 것과 별다를 바 없는 빛을 품은 메이스가 51구역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부딪히면 덤프트럭에 치인 사람이 날아가는 것처럼 몇 명씩 나가 떨어졌다. 그와 함께 뒤에서 대응을 하려고 하는 군인들에겐 겉보기에 얇기만 한 화살과 다르게 어깨나 팔, 다리에 마치 해머로 후려맞은 듯 몸이 딸려가는 파괴력을 보이는 유도탄같은 화살이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싸움이라고 할 수 없는 대립이 끝이 나고 300명 정도의 인원이 순식간에 기동성을 잃고 여기저기에서 피를 흘리거나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정후와 엘리스가 헤터와 루아르 앞에 무기를 들고 서기까지 걸린 시간은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자, 아까 뭐라고 했지? 우리가 어디 사는지 알고 있다고?”

“난 그쪽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알겠는데.”

“사신이 어서 빨리 퇴근하게 도와달래.”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군인들 때문에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던 경비대원들이 놀라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 어디 하나씩은 고장나 있긴 마찬가지라서 선뜻 도와줄 수도 없었고 고양이 앞에 놓인 쥐처럼 자신들도 모르게 숨을 꾹 참고 존재감을 숨기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이들이라곤 현대무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으로 재차 확인한 스탠과 케이터 그리고 마치뿐이었기에 헤터와 루아르는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뒷걸음질 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내가 아까 말했던 것 같은데 그쪽은 투아웃이었다고.”

차가운 눈빛을 한 정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금 전까지 보이던 오만함은 어디 갔는지 루아르는 딸꾹질을 하며 눈에는 눈물 범벅을 한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빌고 있었다.

“사...살려줘.”

“줘?는 반말이잖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루아르와 다르게 헤터는 자신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루아르의 옆에서 살짝 비켜서며 한발짝 떨어지려고 했지만 엘리스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미친 헤터라고 했던가? 왜 그쪽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빠지려고 그래?”

“예?”

“왜 너는 아닌 척 하냐고. 이 놈이 총 쏴서 우리 죽이라고 할 때 옆에서 같이 동조한 년이.”

“죄...죄송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눈치채긴 했지만 헤터는 루아르와는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했고 평소의 성격을 감안하면 지금 이 모습조차 헤터를 낳은 부모님도 자기 자식의 저런 모습은 처음본다고 할만큼 놀랄만한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이것이 정후와 엘리스에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얘는 아직 정신 못차렸네.”

엘리스의 목소리가 들리고 헤터의 몸통으로 메이스가 툭 닿았다.

“커어어엌.”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헤터가 몸통을 구기며 구역질을 하고 눈물 콧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헤터는 평생 처음 경험해보는 통증에 이러다 자신이 죽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이를 지켜보는 51구역의 사람들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자신들처럼 후려 맞은 것도 아니고 툭 갖다댄 걸로 저러는 인간이 자신들에게 지시를 내렸다니.

‘나처럼 맞았으면 그냥 바로 저승 가버렸겠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다르게 엘리스가 툭 친 곳은 복싱 기술 중 간장치기라고 하는 리버블로우를 응용한 것으로 단련된 복근을 가진 복싱선수들조차 맞는 순간 정신이 하얗게 되며 쓰러져 버리는 간에 직접적으로 충격을 전달하는 기술이었다. 운동하고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던 헤터가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총알이 날아가고 화약이 터지며 나는 냄새가 가득해졌던 공간은 여기저기서 다시금 비명과 신음소리만이 아니라 손가락과 팔이 잘린 사람들 혹은 화살이 꽂히거나 관통당한 사람들에게서 피가 흘러나오며 혈향이 가득해졌다.

정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이같은 모습을 죽 둘러보았다. 이전의 자신은 항상 도망치고 피하기만 했다. 취업이 되지 않는 현실에서 도망쳤고, 누구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아 자신이 커맨더로서 이끌던 이들이 자신에게 분노와 거부감을 보였을 때도 도망쳤다. 또,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지니게 된 화이트와의 싸움으로부터도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쳤던 것이 자신이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도망치는 것은 때론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뒤돌아보면 아니었다. 괴로운 현실에서 도망친 순간은 빠져나온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되짚어보면 그 패배감은 항상 자신의 곁에 남았다. 비록 돈을 벌게 되었고, 자신을 싫어하는 이들과 더이상 만날 일도 없었고,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상대방을 다시는 만나지 않아도 되었지만 자신에겐 도망쳤다는 생각과 함께 패배감이 뇌의 한구석을 타르처럼 달라붙어 쉽사리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이 패배감이 자신에게 달라붙은 뒤로 현대의 무기로는 자신을 감히 건드릴 수도 없는 힘을 지니게 되었음에도 지구로 돌아온 이후로 자신은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힘을 휘두른 적이 드물었다. 리미트처럼 달라붙어 족쇄가 된 이후로 마음 한구석은 자포자기한 것도 있는 것이었으리라.

세상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치열해졌으며 더욱 큰 힘을 갖게 될수록 더 강력한 적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적당히 위로 올라가지 않고 굳이 적들을 만들지 않으면 그동안 벌어들인 돈으로 적당히 즐기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 자신이 맞이한 것이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협박’이었다. 정후는 그 순간 깨달았다. 도망치는 것이 누군가에겐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지 몰랐으나 적어도 자신에겐 아니었다는 것을.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어.”

정후의 입에서 나온 작은 혼잣말을 들은 엘리스는 미소지었다. 아저씨는 아저씨의 고치를 뚫고 나오고 있었다. 엘리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온 문구를 떠올렸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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