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 216화허트 로커
* * *
한편 정후의 침대에 나란히 누운 섀넌과 엘리스도 귀가 밝아 집중만 한다면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대화소리를 듣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정후 아저씨는 걱정 많이 했나봐.”
“아빠라며?”
“그게....마음으로는 아빠가 맞는데. 겉으로 표현하려면 좀 그런 게 있어.”
“그렇게 말하는 거 보면 넌 정후랑 비슷한 구석이 있어. 확실히 딸내미 맞네.”
“휴. 다행이다. 어머니 되실 분이 인정하니 마음이 놓이네.”
엘리스의 너스레에 섀넌의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맺힌다.
“나도 내일 일은 모르겠다. 평생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다 큰 딸이 이렇게 생길줄이야.”
“그렇지?”
섀넌은 인연이란 게, 인생이란 게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자신보다 오래 산 딸이 생기고, 전혀 다른 세상에 살던 지구의 남자와 인연이 이어지고, 지구인으로서의 기억을 가지고 앞으로 결혼할 사람의 침대에 누워 잠을 자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형, 있잖아...”
“뭐가?”
지후는 이상했지만 그동안 쉽사리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꺼냈다. 왜 다른 사람들은 오질 않은 것인지 섀넌이 지구인의 기억을 갖게 된 것인지, 엘리스는 어떻게 육체가 생겨난 것인지 등등 정후와 만나고 정후가 이야기해주지 않아 알 수 없었던 내용들을.
“사실은 말이야...”
형의 입을 통해 더스트에서의 비사(?史)를 모두 듣고난 뒤 정후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지후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
“후우, 돌아가긴 해야 하는데...”
“돌아가서 뭘 어쩌려고! 다른 사람들도 손가락 하나 까딱 못했다며.”
“다른 사람들이 죽은 건 아니잖아.”
“죽은 게 아니라고 해도 형도 그 가상공간에 처박아놓은 걸 엘리스가 구제해주지 않았으면 영원히 있었을 거 아니야.”
“아무 것도 안하고 내버려 둘 순 없어.”
“아니야, 그러지마 형. 내가 형제가 많은 것도 아니잖아. 아니, 형제가 많다고 해도 형이 그렇게 가는 건 걱정돼.”
“인마, 당장 가겠다는 것도 아니야.”
“아무튼 절대 다시 돌아갈 생각같은 거 하지마.”
“다른 사람들은 버려?”
“형, 마스터도 좋은 사람이란 거 알고 다른 사람들도 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아. 근데 그게 내 핏줄인 형을 잃어도 좋다는 이유가 될 순 없어.”
정후는 지후가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이렇게 크게 반발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화이트가 지닌 힘을 그랜드 마스터도 이겨낼 수 없었다는 건데 이제 겨우 마스터밖에 안되는 형이 무슨 수로 화이트를 이겨 먹고 해방을 시키겠다는 거야. 그리고 형이 왜 그걸 책임져야 하는데?”
“여기에서 하는 사업도 그럼 다 멈춰야 돼.”
“사업? 때려쳐. 돈? 벌만큼 벌지 않았어? 사업이 하고 싶다면 여기 엘리스도 있고, 섀넌도 같이 있잖아. 여기에서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정 안되면 법인 차려서 부동산 몇 개 사서 건물주로 편하게 살아도 되는 거 아니야? 먹고 사는 걱정 안해도 되니까 간이 배밖으로 막 나왔어? 형이 거기 가서 혹시라도 돌아오지 못하면 난 엄마랑 아버지한테 뭐라고 말씀드려? 형이 다른 세상에 가서 죽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나?”
“내가 간다고 해서 꼭 못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지금 미리 말할게. 가지마. 설령 형이 다시 살아돌아온다고 해도 형이 지금과 같은 형일 거라고 어떻게 보장해?”
지후는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이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힘든 사례들을 끄집어내며 나를 설득했다.
“위험한 상황에 오랫동안 노출되면서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것에 몸이 익숙해지면 형은 다시 일상으로 못 돌아와. 미군들이 왜 PTSD를 경험하고 각종 사고를 일으키겠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쟁을 경험하고 난 뒤 ‘허트 로커’에 갇히고 나서 뒤늦게 깨닫는다면 늦어.”
“알았다. 알았어. 진정해.”
정후의 대답이 건성으로 들렸는지 지후는 형의 양 팔을 붙잡으며 형의 눈을 바라봤다.
“내 눈 똑바로 보고 약속해줘. 다시는 거기에 안 가겠다고.”
지후가 원하는 대로 정후는 선뜻 알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저 빈말로라도 알겠다고 하면 되었을텐데도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대답해! 안 간다고. 지금 당장 부모님한테 말할까? 형이 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찾아 떠나려고 한다고?”
“아...알았다고.”
“안 간다는 약속하는 거지?”
“그...그래, 약속할게.”
지후는 마치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처럼 새끼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야, 우리가 무슨 애도 아니고.”
정후의 너스레에도 지후는 새끼 손가락을 들이밀며 걸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정후는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들어 지후의 새끼 손가락에 걸었다.
“약속했어. 약속 어기려고 들면 부모님한테 말할 거야.”
지후는 그 이후로 은밀하게 정후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봤다. 그리고 그 같은 모습이 엘리스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삼촌, 왜 저래?”
“아...그게....”
엘리스도 알아야 할 것 같아 정후가 지후와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삼촌 마음도 이해는 가네.”
“엘리스, 그래도 언젠가 돌아가야 해.”
“아저씨, 지금 이곳에선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미래의 일이야. 아저씨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세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미래가 바뀔 일도 없어. 꼭 돌아가야 할까?”
엘리스까지 진지하게 그냥 여기서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냐며 자신을 설득하려고 했다.
“너까지 왜 이래.”
“거기 돌아간다는 건 예전과 다르게 이제는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야 할 수도 있는 거고, 아저씨가 다쳐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거야. 섀넌은 어떻게 할 거야? 여기에 놓고 갈 거야? 섀넌도 그렇게 생각한대? 꼭 돌아간다는 것이 아저씨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야.”
“돌아가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아.”
“아니, 여기서도 바꿀 수 있고. 이미 바꾸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엘리스는 얼마 전에 말해줬던 자신이 이 세상에 인공지능으로서 진행시켰던 일들을 정후에게 다시 상기시켜줬다.
“미래의 모든 이정표를 아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움직임으로 인해 세상이 꼭 그렇게 흘러가지도 않겠지만 아저씨에겐 내가 있어. 미래의 기술력을 지니고 있고, 이 세상엔 없는 능력을 지닌 내가 있다고. 언젠가 화성으로 갈 인류를 위해 여기에서 환경오염을 덜 시키고 이상기후를 막기 위한 시도들을 해볼 수 있단 말이야. 굳이 돌아가지 않아도 여기에서 진행시킬 수 있어. 아예 화이트가 탄생하지 않는 미래를 만드는 건 어때? 미래가 정해진 것 같아도 아저씨의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어.”
“하지만 거기에 우리가 만든 세븐시티가 있고, 진행시켜온 일들이 있잖아.”
엘리스는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정후의 팔을 붙잡았다.
“아저씨, 사업을 하다보면 가끔 실패할 수도 있는 거야. 평범한 사람들은 한번의 사업실패만으로도 인생이 고꾸라지고 어려워지기도 하지만 아저씨는 달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그냥 부도가 났고 새로 사업을 펼칠 마음만 먹으면 돼.”
“니가 말했잖아. 섀넌은 어떻게 하고?”
엘리스는 잠시 정후를 쳐다보더니 잡고 있던 팔을 놓고선 섀넌을 불러왔다.
“섀넌, 섀넌도 더스트로 돌아갔으면 해? 아저씨는 언젠가 우리가 돌아가야 한다고 하네.”
갑작스럽게 불려왔음에도 섀넌은 바로 대답했다.
“난...우리가 여기 있었으면 해.”
“섀넌, 거기에 어머니도 있고 친구들도 있잖아.”
섀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왼손으로 정후의 손을 붙잡았다.
“당신이 있는 이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그랜드 마스터도 대마법사도 함부로 어쩔 수 없는 강력한 존재인 화이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뭘 어쩔 수 있겠어. 그리고 뭘 할 건데?”
“막아야지.”
“막고나서 그 다음은? 환경오염이 없는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면 화이트의 방법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잖아.”
“당신 어머니가 걱정되지도 않아?”
섀넌은 슬픈 눈빛으로 자신의 배쪽으로 오른손을 가져다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엘프 여왕은 어머니이기 이전에 지도자야. 지구인으로서 당신이 어머니에게서 받은 그런 깊은 모성애가 담긴 사랑을 난 받아본 적이 없어. 어머니에게 난 유전자를 이어나가고 엘프들을 지킬 여러 선택들 중 하나였을 뿐이야. 산영으로서의 기억이 좋은 건 그래서야. 누군가 날 조건 없이 무한한 사랑으로 대해준 기억을 가질 수 있게 되어서 좋아. 그리고 엘프 여왕의 사고방식대로면 오히려 내가 이곳에서 엘프의 유전자를 남긴다는 것에 더 좋아하실걸?”
“하지만...”
정후가 쉽게 설득되지 않자 섀넌이 고개를 들고는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물어봤다.
“정후, 만약에 말야. 당신이 아버지가 되어도 모두를 여기에 둔 채 거기로 떠날 수 있겠어?”
“내가 아버지가 된다고? 그런 가정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어.”
엘리스가 정후의 말을 듣고 뭔가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섀넌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직은...아직은 말하지 말아줘.’
“급한 것도 아닌데 천천히들 생각해. 왜 이렇게들 급해?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오늘 트래킹하러 가자고 한 거 기억 안나?”
엘리스가 웃으면서 두 사람의 어깨에 팔을 턱하고 걸쳤다.
“구봉도에 가자고 하셨나?”
“그래, 갔다 오는 길에 칼국수랑 파전에 막걸리도 한잔 걸치기로 했잖아.”
“넌, 애가 말하는 게 꼭 아저씨같을 때가 있어.”
“그래서 땀 흘리고 나서 한잔 안할 거야? 캬아아. 기대된다. 기대 돼.”
“트래킹하러 가자는데 술만 생각하면서 입을 다시는 게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두 대의 차로 나눠 도착한 구봉도의 해솔길은 꽤나 걷기에 좋은 트래킹 코스였다. 얼마간 오르막을 걷고 나면 얼마간 내리막이 나오고 한동안은 완만한 평지가 이어져서 나이가 드신 부모님이 걷기에는 살짝 구슬땀이 맺혔을뿐 힘들어할 정도는 아니었다.
“와와! 정말 시원하네!”
“그러게.”
“에어컨 틀어놓은 것보다 더 시원하다.”
낙조전망대라고 해서 바닷가에 설치되어 있는 트래킹 코스의 끄트머리에 도착하자 가을임에도 더운 날씨였지만 시원한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바람을 맞이한 순간 과거 처음 트리니티의 단원들과 함께 바다에서 지내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잠시 멍해 있는데 섀넌이 마주 잡고 있던 손을 꼭하니 쥐길래 정신을 차리고 섀넌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람결에 머리가 휘날리는 섀넌의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아주 눈에서 꿀이 쏟아져. 쏟아져.”
“삼촌 말이 맞네. 할머니,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듯. 저렇게 사이가 좋은데.”
“뭐? 좋은 소식?”
정후는 은근한 기대를 품는 엄마의 눈빛에 두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직 결혼도 안했거든?”
“아들~ 요즘은 결혼하기 전에 애 가지고 결혼은 나중에 하는 애들도 많다더라. 내 친구들 딸내미랑 아들내미들 손주들 사진 단톡방에 올라오면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
“여보, 왜 애한테 벌써부터 부담을 줘.”
역시 아버지밖에 없었나 싶어 아버지에게 나이스를 외치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한술 더 떴다.
“산영이같은 며느리를 닮았다면 난 손녀도 좋다. 칙칙한 아들놈들만 보기 지겨웠는데 엘리스가 옆에서 이렇게 애교를 떠는 걸 보니 아주 어린 손녀가 피울 재롱 생각만 해도 좋구나.”
“아버지까지...”
평소같았으면 섀넌도 부끄러워하거나 뭔가 아니라고 말할텐데 발갛게 얼굴만 물들이기만 했다. 그러나 그 모습조차도 정후에겐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