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 215화추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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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그 뭐시기 그냐...요즘 애들은 전 부치고 이런 거 안 좋아한다던데...”
“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자기들이 하자고 해서 하는 거잖아요.”
아버지와 지후 그리고 섀넌과 엘리스가 거실에 앉아 꼬지, 동태전, 동그랑땡 등을 부치고 있는 이 풍경이 정후의 엄마에겐 너무나 낯설게만 느껴졌다. 원래 우리집은 명절이라고 전부치고 그러는 집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들 다하니까 우리도 명절 분위기나 낼까해서 대충 우리 가족 먹을 양을 넉넉히 하는 편이었지. 딱히 명절이니까 전을 부쳐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가법이 있는 집안은 아니었다.
“아들! 가서 흑맥주 좀 가져와라!”
가장 신이 난 것은 아버지셨다. 명절에는 역시 기름에 구워지는 계란 냄새가 나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시끌벅적해야 명절답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라서 그런지 비록 외국인으로 보이는 섀넌과 엘리스가 와서 전을 부치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아니, 오히려 같이 둘러앉아 전을 부치면서 맥주를 주고받고 계셨다.
“며느라! 정말 반갑다. 내 며늘아기가 이렇게 아리따운 여성분일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는데.”
“아니에요, 아버님.”
“사실 산영이 처음 봤을 때 말은 어떻게 나눠야 되나 정말 걱정 많이했다. 내가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서...부인도 걱정 많이했지?”
“그럼, 내 며느리가 외국인인 건 전혀 상관 없는데 아무래도 아들이랑 같이 살 여자가 말도 잘 안 통하면...솔직히 갑갑했을 거야.”
서로 통성명을 하는 과정에서 섀넌은 자신의 이름을 부모님께서 잘 발음하지 못하자 산영이라고 불러주셨으면 좋겠다며 한국말로 답했다. 그러자 엘리스와 섀넌을 만난 순간 놀라서 경직되어 있던 어머니, 아버지 표정이 사르르 녹는 장면은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코믹한 순간이었다.
“어쩜 이렇게 한국말을 잘하니.”
“아...제가 한국어 공부를 좀 해가지구요.”
“산영이가 말하는 거 이렇게 눈 감고 들으면 완전 한국 사람이야. 한국 사람.”
엄마가 전을 부치다 말고 살포시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뜨며 빙그레 웃으니 가족들 사이에서 웃음꽃이 피었다.
“형, 부모님이 이렇게 좋아하실지 몰랐다. 그치?”
“그러게. 칙칙한 두 아들놈이랑 같이 보내는 명절이 아니라 상큼한 두 여자가 함께 해서 그러나 아주 날아가실 것처럼 좋아하시네.”
엘리스가 본인의 나이를 20살이라고 말해서인지 정작 두 아들은 소외된 채 넷이서 잔을 주고 받는 장면이 여느 집안의 풍경과는 달랐다.
“이렇게 다 큰 예쁜 손녀가 나타나주니 난 참 복이 많은 놈이다. 그렇지 않소, 여보?”
“내 아들이지만 어떻게 수양딸을 들일 생각을 했나 몰라.”
“거, 자식들은 겉 낳았지 속 낳은 거 아니라는 우리 어머니 말씀이 딱 맞아.”
“남의 집 아들들처럼 아들 새끼들이라고 있는 것들이 한~번을 여자친구라고 집안에 데려오질 않아서 살짝 걱정되었는데 이렇게 아예 며느릿감이랑 손녀를 데려다 줄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그래요, 어머니? 왠지 정후 씨는 인기 많았을 것 같은데.”
“아이고, 난 그 어머니 소리 못 듣고 죽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들으니 여한이 없다!”
“여보, 이제 고생 끝인데 죽어도 좋다니. 그런 말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꺼내지 말게.”
“그른가?”
“자자, 이러지 말고 서로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서, 건배!”
“건배!”
섀넌은 시어머니가 될 사람이 꺼낸 ‘한번도 여자친구를 데려온 적 없다.’는 말이 유독 귀에 와서 멤돌았다. 자신도 엘프여왕의 딸이라 섣불리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그런 신분이 아니라서 연애 한번 못해보고 정후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라 정후가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줄 때마다 자신과 연애하기 이전에 누군가 다른 사람과 연애한 적은 없는지와 같은 것들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치 그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간지러운 곳을 어머니께서 시원하게 긁어주시는 게 아닌가.
“크크큭, 입이 근질근질 하구만. 크흠.”
“입드믈구이써라.”
부모님은 잘 모르시는 학창시절의 연애 경험에 대해 알고 있는 지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헛기침을 해댔다.
“거, 입을 다물게 하고 싶으면 맥주나 한잔 시원하니 따라보시게.”
“보시게?”
“형, 눈치 챙겨~”
섀넌이 우리의 대화가 궁금한지 고개를 돌리자 지후가 내 옆구리를 쿡하고 찔렀다.
“어어어어, 목이 마르다고? 기다려. 내가 냉장고에서 시~원한 놈으로다가 갖다줄게. 스릉흐는 동생아.”
“아주 두 번 사랑하면 이빨이 아주 다 갈아서 없어지겠어.”
“두고 보자. 니 여자친구만 집에 데리고 와봐.”
정후가 지후가 마실 맥주를 챙긴다며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섀넌은 부치던 동그랑땡을 키친타월을 깔아놓은 쟁반 위에 올려놓으며 지후에게 조용히 질문했다.
“둘이 무슨 이야기했어요?”
“아, 별 이야기 안했어요. 크큭.”
“그래요?”
좋은 형제 사이와 친근하게 대해주시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는 섀넌은 산영일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인지 마음이 살짝 아려왔다. 자신도 명절이 되어 집에 찾아가면 자신을 환영해주던 부모님이 계셨는데 이제는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두 분은 데이터 상에만 존재하는 분들일뿐이라는 것이 슬프게 느껴졌다.
섀넌의 안에서 선명한 산영으로서의 기억들 때문에 다소 우울했지만 화기애애한 추석의 시끌벅적함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 정후씨.’
지후에게 맥주를 건네주며 자신에게 힘들지는 않은지 쉬엄쉬엄하라며 챙겨주는 정후에게 더 마음이 쓰인다.
“적당히 해도 돼. 우리들 이거 한번에 다 못 먹어. 너무 힘들면 쉬어도 되니까 막 힘들게 안해도 돼.”
“알았어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아들~”
둘이서 꽁냥대는 모습을 본 어머니의 눈빛이 가늘어지셨다.
“어머니, 큰아들 부르셨나이까?”
“엄마는 좀 섭섭할라고 그러네.”
“네?”
아들내미가 잘해야 고부갈등이 없다는데 자신이 너무 섀넌을 챙기다 섀넌이 어머니 눈밖에 나는 건 아닐까 싶어 정후는 조금 걱정이 됐다. 평소 누누이 자신은 며느리가 집에 들어오면 노터치로 살 거고, 시집살이시킬 생각따윈 없다며 드라마 속 나쁜 시어머니를 볼 때마다 이야기해오시긴 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게 아니던가.
“자기 사람이라고 챙기는 모습 보는 건 좋은데 말이지. 이 아들 놈이 생전 지 엄마가 요리할 때 안하던 소리를 하고 있으니 마음이 좀 그렇다. 야.”
“마누라! 그건 그렇지? 아들 자식 키워봐야 아무런 소용 없다는 말이 맞나봐.”
두분이 꽁트하듯 말을 하는 걸 보니 완전히 진심이 아니란걸 눈치챈 정후는 두분의 쿵짝을 맞춰드리기 위해 조선시대의 사극에나 나올 법한 세자연기를 꺼냈다.
“어마마마, 소자는 평소 부모님께서 서로에게 보여주신 지극한 사랑을 지켜보며 언젠가 저도 내자될 사람이 나타나면 꼭 똑같이 해주리라 마음 먹었을 뿐이옵니다. 앞으로 조만간 이 형님처럼 내자될 사람을 데려올 니 생각도 그러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생아?”
은근슬쩍 화제를 동생쪽으로 돌리자 어머니의 눈이 동그랑땡처럼 땡그랗게 변하셨다.
“지후야, 이게 무슨 소리니? 너도 결혼할 생각으로 만나는 여자 있니?”
“엄마, 그게 아니고. 형이 장난친 거야. 형이 갑자기 그러니까 엄마 진짜인줄 알잖아.”
‘인마, 형을 부려먹었을 땐 이런 것도 생각했어야지.’
“글쎄다. 난 농담한 적 없는데.”
“어머니, 저도 정후씨에게 몇 번 들었어요. 지후 씨가 만나는 여자가 지후 씨가 배울 점이 많다고 지후 씨가 정말 좋아한다고 하는 이야기.”
“그러니?”
지후는 섀넌과 내가 편을 먹고 자신을 걸고 넘어지자 두 손을 번쩍 들며 항복을 외쳤다.
“항복! 항복! 포로에 대한 신사적 대우를 원합니다. 아주, 연합군이 따로 없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자꾸나. 이지후.”
비상신호였다. 엄마의 입에서 내 이름 혹은 동생의 이름 혹은 아버지 이름 세 글자가 정확하게 나온다는 것은 빨강의 경고등이었다.
‘형, 이렇게 나올 거야?’
‘니가 먼저 시작했잖아, 인마.’
두 형제가 작은 목소리로 주고받으며 투닥거리자 형제의 엄마는 또 시작이냐며 장난반 진담반 섞인 힘으로 두 아들의 등짝에 스매싱을 한 대씩 선사해주셨다.
“아이고, 지겨워. 나이 먹으면 안 그럴까 싶었는데.”
“이 자식들이. 지금 부모님 앞에서 싸워?”
“에이, 우리 싸우는 거 아니에요. 그치, 동생아?”
“엄마, 아부지. 장난치는 거죠.”
두 형제가 전을 부치다 말고 부침가루가 묻은 손으로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어깨동무를 하며 친한 척을 하자 그제야 살짝 굳어졌던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내가 못 살아.”
“아이구, 내 마누라가 못 살면 안 돼, 난 말이야. 징그러운 아들내미들 없어도 되는데 내 마누라, 아들 엄마, 장모님 딸 없으면 안 돼!”
“크크큭, 할아버지. 그거 다 같은 거 아니에요?”
“너도 나중에 나이 먹어봐라. 조강지처가 최고다!”
‘아버지...걔가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아요.’
아버지께서 옆에서 소방수로 나서준 덕분에 살짝 긴장감이 흘렀던 거실에 웃음꽃이 번졌다.
“아깐 지후한테 섭섭해서 일부러 손 맵게 때린 거지?”
“당신도 참. 그걸 바로 알아채네.”
“같이 이불 덮고 산 세월이 몇 년인데. 아무렴. 큰아들이야.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 신붓감 데려왔으니 경사지만. 아직은 어리게만 느껴지는 막내가 결혼할 사람이 있으면서도 생전 말 한마디 없었는데 우리 마누라~ 기분이 멜랑꼴리해질 수밖에.”
“아주 내 속을 들여다보셔. 흥. 그렇게 잘 알면 잘하시든가.”
“나야. 마누라밖에 없는데 잘해야지~”
“풉”
형제와의 식사를 마치고 TV를 보며 담소를 나누다 형제는 지후의 방에, 섀넌과 엘리스는 정후가 쓰던 방에 들어가고 부부도 안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드러누워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어느덧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싶어 감회가 새로웠다.
“아들놈들이라고 애교같은 거 하나도 없어서 집안이 칙칙했는데 새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아주 신나셨더구랴.”
“아무렴, 당신도 시어머니로서 예쁜 며느릿감이랑 손녀보니 좋지 않소?”
“그래도 한국 문화라든가 그런거 잘 모를까봐 보자마자 걱정이 됐는데 음식하겠다고 옆에서 도우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한국 말도 잘해서 다행이야.”
“내 아들인데 알아서 잘 처신했겠지. 지 엄마 속도 잘 안 썩이던 놈인데 그런 걸로 속 썩이겠어?”
“왜 당신 아들이우? 내 배로 낳은 내 아들인데.”
“거, 지분 50%는 인정해주시게.”
“그럴까?”
안방에서 살며시 들려오는 부모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던 정후는 혹시나 싶었던 걱정을 지울 수 있었다.
“다행이다. 부모님이 싫어하시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형, 우리 엄마, 아빠가 설령 섀넌이랑 엘리스 싫어해도 내색이나 할 사람들이야?”
“그건 그렇지만...이왕이면 좋게 좋게 지내는 게 좋잖냐. 너도 나중에 니 와이프 될 사람 집에 데려와봐. 그럼 내 심정 이해될걸.”
“몰라. 내일 일도 모르고 사는데. 그건 내일의 나에게 맡겨놓고 난 잠이나 잘래.”
“좋겠다. 속 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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